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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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당신은 어떤 손을 가졌습니까

요즘 남편은 텀블러를 들고 출근한다. 지구의 미래를 위해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여 보겠노라는 결심이다. 그러다 보니 종종 남편의 텀블러를 세척할 일이 생기는데 이상하게 내가 만지기만 하면 뚜껑 부품 하나가 빠졌다. 이거 또 이러네, 고개를 갸웃하니 남편이 그런다. 또? 하여간에 가시손이라니까.

 

가시손이라니, 그런 말은 처음 들었다. 사전을 찾아보니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거나 때리는 느낌이 찌르는 듯한 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북한 말이라는데 도대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 아무려나 만지기만 하면 뭐든 잘 고장 내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어려서부터 유명했다. 연년생인 언니의 물건은 십 년을 써도 새것 같은 데 반해 내 것은 아니었다. 손끝만 스쳐도 꼭 표가 났다. 그래서 완전 범죄가 불가능했다. 언니 옷이나 신발을 몰래 착용하고 외출한 날엔 전쟁도 그런 전쟁이 없었다고 한다. “야, 안희연, 너 이리 안 와? (이하 생략)”


억울함이 없는 건 아니다. 나라고 일부러 망가뜨리고 싶었겠는가. 훔쳐 입은 옷임을 매 순간 자각하며 극도로 조신하고자 애썼음에도 하필 그때 가슴팍에 빨간 양념이 튀고 흰 운동화가 사람들 발에 밟히는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이왕 억울한 김에(?) 가시손의 동지들을 떠올려 보기로 한다. 가장 먼저 영화 〈겨울왕국〉의 엘사가 떠오른다. 엘사는 만지는 것마다 꽁꽁 얼어붙게 만드는 무서운 손을 가졌다. 엘사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스스로 장갑을 끼고 얼음 성에 갇혔지만, 동생 안나의 활약으로 봄의 왕국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영화는 분명 해피 엔딩이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가시손의 주인인 나는 엘사에 극도로 감정 이입을 한 나머지 극장 불이 켜진 뒤에도 얼음 성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엘사의 생애를 놓고 봤을 때 얼음 성에 홀로 유폐된 시간은 겨우 한 조각의 과거겠지만, 그 한 조각이 집채만큼 커져 엘사의 남은 인생을 뒤흔드는 순간이 정말 없을까. 기억이란, 시간이란,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오는 것. 아마도 엘사는 홀로였던 순간의 추위를 영원히 잊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 〈가위손〉의 주인공 에드워드는 어떤가. ‘사랑을 만질 수 없는 남자’라는 포스터 카피에서부터 이미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 화면에 뾰족한 가위 손을 가진 그가 등장했을 땐 눈물을 줄줄 흘리고야 말았다. 손이 너무 차가워 보였기 때문이다. 저 마음 내 알지. 손이 가위인 슬픔 내가 알지. 사랑하는 사람을 코앞에 두고도 얼굴 한번 쓰다듬지 못하는 그가 너무 고독해 보였다. 다행히 영화는 한 사람의 불행과 고립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것을 재치 있게 돌파해 나간다. 그가 가위 손의 장기를 살려 정원의 나무들을 사슴으로, 공룡으로 만들었을 땐 얼마나 환호했던지! 그 장면은 무척 아름다워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가위 손의 주인 에드워드는 훌륭한 정원사가 되어 불행에도 쓸모가 있음을 멋지게 증명한 셈이다.


제가 이래요. 저한테 오면 전부 망가져 버려요. 얼마 전 한 드라마 남자 주인공도 연인에게 그렇게 이별을 고했더랬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가시손으로서의 정체를 고백하며 하루빨리 그녀를 보내 주는 일이었다. 그라고 왜 사랑받고 싶지 않았겠는가. 내 삶은 물론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살아가기란 힘든 일이다. 그러니 가시손의 동지들이여, 어쩌겠는가. 비록 우리가 가진 건 가시손에 불과하더라도 하나라도 더 섬세하게 살피고 조심하는 수밖에.


 

그나저나 가시손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아마도 쓸어 담고 쓰다듬고 치료하는 손이겠지. 다행히 세상엔 가슴팍에 청진기를 대고 숨소리를 듣거나 진맥을 짚어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손도 존재한다. 내가 무수한 ‘나’의 총합이듯, 나의 손안에도 무수한 손이 자리할 것이다. 그러니 가시손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해서 한평생 ‘파괴지왕’으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닐 터. 연습하는 손은 게으른 손을 이길 테고 호기심 가득한 손은 나태한 손을 앞설 것이다. 그래서 묻는다. 오늘, 당신은 어떤 손을 가졌습니까? 그 손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따뜻합니까?

 

안희연 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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