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장바구니0

이달의 좋은생각

[좋은님 에세이] 잘해 왔다

 집을 리모델링하며 가구들을 처분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거실 한편에 자리한 나무 장식장이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데, 엄마가 내 방에 책장으로 놓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다. 나보다 오랫동안 부모님과 함께한 장식장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내려앉아 상단만 남아 있었다. 어쩐지 그모습이 나와 닮아 보였다.

 

 엄마가 유방암과 희소병인 골수 섬유증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보호자를 자처했다. 일과 결혼은 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엄마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었다. 하지만 최근 친구들에 비해 내가 뒤처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조바심으로 남과 비교하며 내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장식장을 버리자니 나를 무책임하게 버려두는 듯했다. 불확실한 현실에 뚜렷한 변화를 만들고 싶었다. 나는 장식장을 책장으로 고쳐 쓰기로 했다. 먼저 치수를 잰 뒤, 원래 있던 선반을 치워 책장이 들어갈 공간을 만들었다. 유리문 네 개를 떼고 젯소를 칠했다. 하얗게 바뀐 책장처럼 내 움츠린 마음도 조금씩 펴졌다. 이후 진회색 페인트를 칠하고 말리기를 세 차례 반복했다.

 

 지난 사 년이 떠올랐다. 엄마는 길고 힘든 치료 과정을 잘 버텨 주었다. 여리기만 했던 나는 담대해졌고, 부모님의 책임감과 희생을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멈춰 있는 게 아니었다. 느리지만 성장하는 중이었다. 건조가 끝난 책장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제야 얼룩진 옆면과 살짝 틀어진 선반이 눈에 들어왔다. 결점이라기보다 책장의 일부분처럼 보였다. 방 한 쪽에 자리한 책장에서 안정감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인생에는 정해진 노선도, 속도도 없다. 나는 그 사실을 머리로만 이해했기에 위축되었다. 장식장을 고치면서 그 뜻을 온전히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 이 시간은 앞으로 든든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책장의 먼지를 닦고 흐트러진 책을 다시 꽂았다. 그리고 엄마를 힘껏 안아 주었다.

 

 

오미형 님 | 충남 당진시

 

 

 


고객문의

  • 정기구독02 - 337 - 0332
  • 다량문의02 - 330 - 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