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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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책이라는 탈출구

할머니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할머니에게 책을 한 아름 사 주었다. 당시 열한 살이었던 나도 아버지가 사 오는 책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업고 있던 막냇동생을 내 등에 업혀 주고, 책과 돋보기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동생을 업고 할머니가 느릿느릿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그 책이 어서 나한테 오기를 기다렸다.

 

그건 할머니와 나의 약속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퇴근할 때까지 할머니를 대신해서 동생을 봐 주면 자기 전까지 그 책은 내 것이 되었다. “딸랑.”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부리나케 할머니한테 동생을 맡기고 책을 받아 쥐었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설레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지극정성으로 책을 사 준 이유가 무엇인지, 할머니가 왜 그토록 책에 집착하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내 큰삼촌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할머니는 책을 무기로 그 슬픔을 이겨 내고 삶의 의욕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 세상에 책만 한 명약은 없다.”라고 믿는 할머니 가까이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나도 웬만한 일에 끄떡하지 않는 강인함과 씩씩함을 배웠다.

 

중국에서 한국어 강사로 있을 때다. 나는 상하이 곳곳을 지하철과 버스로 오가며 열심히 수업했다. 택시비, 생수값마저 아끼며 돈을 모았다. 그렇게 팔 년 만에 작은 아파트 하나 장만할 비용을 마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적금 통장부터 현금, 금붙이, 전자제품까지 모두 사라졌다. 도둑은 돈이 될 만한 물건을 탈탈 털어 갔다. 도둑이 든 지 하루가 지난 후에야 발견했으니 적금 통장 보안조차도 이미 물 건너간 뒤였다.

 

팔 년간의 삶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 몇 날 며칠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침대에 몸져 누웠다.

 

그러다 문득 서재 문을 열었다. 도둑이 서재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차곡차곡 꽂아 놓은 책들이 흐트러짐 없었고, 독서 노트와 필통도 탁자에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그 책들을 마주한 순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 몸에 서서히 힘이 도는 듯했다.

 

“이 세상에 책만 한 명약은 없다.” 할머니 말이 떠오르면서 숨통이 트였다. ‘할머니처럼 책을 읽으면서 이 악몽 같은 기억을 떨치고 싶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시시각각 나를 괴롭히는 기억을 털어 버리려면 책과 일에 몰입해야했다.

 

나는 그길로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집에서 멀다는 이유로 쭉 거절하던 수업을 하기로 계약했다. 자동차 부품 회사였는데, 그곳까지 갈 버스와 지하철이 없기에 회사 통근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아침 여섯 시에 집에서 출발하면 여덟 시에나 회사에 도착했다. 나는 직원들 점심시간에 강의했기에 꼬박 네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로, 통근 버스를 타야 하는 오후 다섯 시까지 또 네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그동안 책을 읽었다.

 

박경리의 《토지》, 김진명의 《고구려》, 조정래의 《태백산맥》, 여러 위인전과 자서전을 매일같이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처럼 책에 빠져든 적이 없었다. 한줄 한 줄이 내 몸 구석구석에 신선한 혈액처럼 흘러들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힌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책이라는 탈출구가 없었다면 나는 분노와 원망에 휩싸인 채 새 출발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습관이라고만 생각한 책 읽기가, 최악의 시기를 정신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기로 바꿔 주었다.

 

 

 

 

귀덕 님 | 경기도 양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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