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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봄 나무를 기억해

십 년째 전세로 사는 아파트를 떠나게 되었다. 하필이면 전세 대란 시기와 겹쳐 부동산 시장에 나온 전셋집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나오는 매물도 지금보다 조건은 훨씬 떨어지는데 보증금은 몇억 원씩 비쌌다. 양심이 없네, 양심이 없어. 그 무렵 내가 가장 많이 중얼거린 말이다. 몇 달 마음을 졸이다가 어렵사리 집을 구했다. 평수는 좁아졌는데 보증금은 훌쩍 올라 입맛이 썼다.

 

얼마 후 집주인이 전화를 걸어와 인테리어 견적을 내러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약속 날 집주인 내외와 시공사 직원 여럿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낯선 이들이 집 안 곳곳을 살펴보고 수선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려니 언짢았다. 안 그래도 쫓겨나는 기분인데 내 공간을 침범당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디자이너와 집주인이 자꾸만 내게 질문을 했다. 여름은 얼마나 덥고 겨울은 얼마나 추운지, 통풍과 채광은 어떤지, 살면서 무엇이 불편했고 좋았는지. 이 집에서 지낸 십 년이 필름처럼 펼쳐졌다. 아이들은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느 가게 물건이 좋고, 봄이면 어느 산책로가 아름다운지, 계절마다 다른 온도로 불어오는 바람결까지 전부 떠올랐다.

 

안주인은 디자이너에게 나를 ‘주인보다 더 살뜰하게 이 집을 가꿔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올해 퇴직하면 오랫동안 전세로 내준 이 집을 비로소 누리며 살고 싶다고 했다. 어느새 나는 질문받지 않은 사실까지 낱낱이 들려주었다.

 

“저기 앞산에 십년 동안 어김없이 가장 먼저 새잎을 내는 나무가 있어요. 우리 식구들은 ‘봄나무’라고 불러요. 거실 창을 향해 커다란 탁자를 놓고 앉아 차도 마시고 책도 읽다가 간간이 고개를 들면, 앞산이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 줄 거예요. 저 앞산이 큰 위안이었어요.” 바깥주인도 그 나무를 안다고 했다.

 

안주인은 가끔 놀러 와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청했다. 그들과 나는 전세 계약서로 묶인 관계이자 이사하면 다시 만날 일 없는 사이지만, 우리가 그리워할 봄나무를 그들이 같은 자리에서 지켜볼 걸 생각하면, 그것으로 됐다 싶었다. 이 집에 관해서라면 쫓겨났다는 기분보다 봄 나무를 물려주고 왔다는 애틋한 기억이 앞설 거라고.

 

 

 

이주혜 님 |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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