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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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밥국을 끓이며

 

쌀통이 또 바닥을 드러냈나 보다. 어머니의 공기엔 오늘도 식은 밥이 담겼다. 쌀통이 가득 찬 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쌀통이 가득하면어머니도 막지은 따듯한 밥을 먹을 수 있으련만.

 

“엄마는 왜 맨날 식은 밥만 먹어?” 몰라서 한 질문이 아니었다. 참 특이한 식성이라며 못 본 척 수저질을 하는 아버지 들으라고 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노름과 술에 빠져 집안 살림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육성회비를 내기 위해 주인집에 쩔쩔매며 돈을 빌리러 갈 때마다 마치 남의 집 일 구경하듯 쯧쯧 혀를 차며 먼산바라기나 하던 당신이었다.

 

“응, 나는 식은 밥에 물 말아 먹는 게 제일 맛있더라.” 나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밥알을 으깨다가 그날 아침도 밥을 남겼다. 오랜 묵계처럼 누이들도 밥그릇을 다 비우지 않았다. 눈치는 있었던지 아버지도 아쉽다는 듯 수저를 놓았다. 식은 밥이 있어야 저녁에 밥국을 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 쌀이 떨어져서 수제비나 칼국수 같은 밀가루 음식도 지겨워질 때면 어머니는 밥국을 끓여 내놓았다. 언뜻 국밥을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닌가 싶은 밥국은 식은 밥을 곤죽이 될 때까지 끓여서 국과 거의 비슷한 상태로 만든 음식이었다. 묽기로 따지면 죽이나 미음에 더 가까웠지만 김치나 시래기, 콩나물을 넣어서 국밥을 흉내 낸 요리였다. 

 

아닌 게 아니라 밥알과 일심동체가 되어 풀어진 섬유질을 한술 뜨면 장날 할머니 손을 잡고 간 장터에서 먹은 국밥 맛이 나는 것도 같았다.

 

밥알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근하게 끓인 밥국은 공갈빵처럼 식은 밥 한 공기를 세 공기쯤으로 부풀려 놓았다. 식은 밥 두 공기면 우리 다섯 식구가 모처럼 국밥 외식을 한 듯한 포만감을 느꼈고, 손님이라도 오는 날이면 대접할 몫까지 요령껏 뚝딱 차려지곤 하였으니 마술이 따로 없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밥국은 분명 국밥이 아니었다. 언뜻 보기엔 그릇을 듬직하게 채워서 깊은 신뢰감을 주지만 배를 두드리며 돌아서면 얼마 지나지 않아 뿌듯하던 배가 쏙 꺼지고 마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풍선 바람 빠지듯 배가 꺼지면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밥국의 비애였다.

 

밥으로 공갈이라도 쳐서 시장기를 속여야 했던 그때, 어머니는 서둘러 잠자리를 깔았다. 공갈이 탄로 나면 뾰족한 대책이 없었기에 자지 않겠다고 떼쓰는 누이들에게 회초리를 드는 날도 있었다.


쉽게 허기가 찾아온다는 단점에도 나는 밥국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아이였다. 공동 수도와 화장실, 처마와 처마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을 공동 마당으로 쓰던 산동네 마을의 어머니들은 누구든 밥국을 끓였는데 집집마다 그 맛이 천차만별이었다. 

 

어느 집에선 라면 스프를 풀었고, 어느 집에선 신김치 국물로 맛을 냈으며, 또 어느 집에선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재료들로 경탄스러운 맛을 창조했다.

 

저녁때가 되면 나는 친구들 집으로 밥국 순례를 떠났다. 우리 집 양식을 조금이라도 아끼려는 속내가 있었지만 실은 저마다 다른 밥국 맛을 즐기기 위한 식도락 기행에 가까웠다. 

 

다음 날은 친구가 우리 집으로 저녁 마실을 오기도 했기에 가난한 산동네 아이들의 식도락은 언제나 공평한 편이었다.


“수야, 너거 집 안직 쌀 안 떨어졌나? 오늘은 너거 집으로 밥국 먹으러 갈까?” “ 지난주에 내가 너거 집에서 먹었으이까 안 될 게 뭐 있겠노?” 

 

학교를 마치고 친구와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시장을 통과하던 어느 날이었다. 상인들이 길바닥에 내다 버린 시래기를 줍는 허름한 차림의 아주머니가 보였다.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거리가 있었음에도 한눈에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면서 친구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엉뚱한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이럴 때 소독차라도 지나가면 좋을 텐데……. 영문을 모르고 따라오는 친구에게 뚝뚝 흐르는 눈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시장 길바닥의 배춧잎이나 시래기를 주워 와서 끓인 어머니의 밥국은 국밥으론 채울 수 없는 허기를 달래 주었다. 삶이 식은 밥인 것만 같을 때 가끔씩 밥국을 끓인다. 나의 밥국엔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어머니의 사랑과 눈물이 있다.

 

손택수 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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