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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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그 순간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입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모든 상황이 나를 옥죄어 하루하루 숨이 턱턱 막혔다. 불을 끄면 캄캄한 어둠이 나를 덮쳐 오는 기분에 형광등을 켜고서야 겨우 잠들었다.

 

그 시절 내 온갖 짜증을 받아 준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나는 무척 예민했다. 밥 먹어라, 불 끄고 자라, 일어나라 등 부모님이 하는 말마다 독을 쏘는 동물처럼 대답했다. 부모님은 목구멍까지 화가 올라와도 꾹꾹 밀어 넣으며, 늘 조심스레 내 방문을 닫았다.

 

당시 야간 자율 학습을 해서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학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빠를 만났다. 나는 우연이었다고 기억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우연은 아니었던 듯싶다. 아빠는 그날 담배를 산다는 핑계로 내가 집에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나의 동선에 서 있었다.

 

“뭐야.” 아빠를 본 내가 내뱉은 말이다. 아빠는 말없이 내 책가방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멨다. 우리는 아무 대화 없이 집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그 길에서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안녕. 내일 봐!”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동지였다. 학교는 엄연한 사회였고, 내가 힘들다고 친구들에게 짜증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처럼 가면을 쓴 채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빠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욕실 문을 연 때였다. 거실에서 아빠와 엄마가 머리를 맞대고 손으로 땅콩 껍질을 하나하나 까고 있었다.“ 그래도 친구한테는 웃더라.” 왁자지껄한 텔레비전 소리에 섞여 아빠의 말이 들려왔다. 엄마는 계속 땅콩을 까며 살포시 웃었다.

 

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로 한동안 욕실 앞에 서 있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생경한 느낌이 훅 밀려들었다. 

 

아직도 문득 그 순간이 떠오른다.

 

 

박주혜 님 ㅣ 동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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