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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나의 글쓰기] 중년 백수, <열하일기>를 만나다

 

2020년이라니, 어릴 적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종종 접한 해다. ‘과연 그런 시대가 오기나 할까. 그 전에 지구가 멸망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심드렁하게 올해를 보내고 있다. 살 만큼 살았다는 뜻이리라.


특별한 감회는 없지만 살아온 날 대부분을 책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은 놀랍고 신기하다. 내 인생은 읽기와 쓰기 그리고 말하기로 가득하다.


동서양의 고전에서는 하나같이 이런 삶이야말로 지복(至福, 더없는 행복)이라고 말한다.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좋은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나는 대체 어떻게 이런 복을 누리게 되었을까?


결정적인 변곡점이 있었다. 삼십 대 중반에 박사 학위를 받고 취업하려 분투했다. 마흔 즈음 결국 교수가 되기를 포기하고 제도권 밖에서 살아가기로 작정했다. 백수가 된 것이다. 먹고살기도 막막했지만 그보다 답답한 건 네트워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공부를 어떻게 혼자 한단 말인가. 그래서 시작한 것이 지식인 공동체다. ‘수유+너머’를 거쳐 현재는 ‘감이당’이 나의 현장이다.


2002년 느닷없는 인연으로 잡지를 만들게 되었다. 나에게 창간호 특집 《열하일기》가 할당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열하일기》와 인연이 없었다. 무슨 기대나 감흥이 있을 리 만무했다. 순전히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솔직히 그저 그랬다. 하지만 글을 써야 하니 두 번, 세 번 읽을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스펀지에 물 스며들 듯이 점점 빠져들었다.


《열하일기》는 천하의 명문장으로 쓰였지만 그렇다고 ‘스펙터클’ 한 여행기는 아니다. 매력이 뭐냐고 묻는다면 글쎄다, 전체적으로 그 리듬과 울림이 감응을 일으킨다고 해야 하나. 분명 이전에 읽은 어떤 책과도 달랐다. 책과 사상, 문체와 수사학에 대한 나의 전제를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얼마 후 한 출판사에서 기획한 ‘고전 리라이팅(다시 쓰기) 시리즈’에 합류하면서 《열하일기》와의 인연이 이어졌다. 타이밍이 절묘했다. 이쯤 되면 운명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읽고 또 읽으면서 누구를 만나든 《열하일기》에 대해 떠들어 댔다. 

 

그때 온몸으로 실감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천지 만물이 《열하일기》로 통할 수 있음을. 그해 겨울 원고를 완성했고, 그것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은 내 인생을 180도 바꾸었다. 일단 역마살이 심하게 들었다. 《열하일기》 속 여정을 수없이 왕래했을 뿐 아니라, 이 책으로 얻은 명성(?) 덕분에 미국 코넬 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초빙 교수로 지내는 일까지 벌어졌다. 마흔이 되도록 비행기를 타 보지 않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때 이후 비로소 내 인생의 지평선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전문가로서 고전 문헌을 연구했다면, 이제는 삶을 위한 글쓰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때부터 나는 ‘고전 평론가’라는 소명을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고전 평론이란 고전의 지혜를 현대인의 삶과 대각선으로 연결하는 작업이다. 고전은 내 인식의 토대이자 일상의 현장이면서 밥벌이의 원천이 되었다.


이후 《임꺽정》, 《동의보감》, 《서유기》도 만났다. 중년 백수에서 고전 평론가로 인생 역전한 셈이다. 또 책 이십여 권을 냈다. 그 책들이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고, 수많은 벗을 만나게 해 주었다. 그 복을 많은 이와 나누기 위해 지난해 글쓰기에 대한 책까지 출간했다.


이 모든 것의 출발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있다. 연암이 열하로 가는 대장정에 동참한 해가 바로 경자년(1780년)이다. 내가 태어난 해 역시 경자년(1960년)이다. 경자년에 태어나 경자년(2020년)을 맞이했으니, 바야흐로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돈 셈이다. 


그래서? 서두에서 말했듯이 그것 자체는 별 의미 없다. 하지만 연암과의 특별한 인연을 환기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2020년은 충분히 설렌다.


“땡스, 연암!”


고미숙 님 | 고전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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