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좋은님 에세이] 하나뿐인 결혼식
2020.01.31   조회수 : 1,000    댓글 : 0개



거실에 있는 아버지가 나를 부른다. 출근 전에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휠체어에 옮기기 위해서다. 눈을 뜨고 대답해야 하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다. 눈꺼풀도 입술도 꿈쩍하지 않는다. 빠르게 뛰던 심장은 점차 느려지다가 멈춰 버린다.


내가 거의 매일 꾸는 꿈의 내용이다. 나는 근육이 굳어 가는 불치병을 앓는다. 어릴 때는 걸을 수 있었지만 점점 몸이 굳은 탓에 휠체어를 타게 되었다. 하반신이 굳은 다음엔 왼쪽 팔이 마비되었다. 이제 움직일 수 있는 건 얼굴과 오른팔이 전부다.

 

언제 심장이 굳어 버릴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일까. 밤마다 움직이지 않는 몸에 갇히는 악몽을 꾸었다. 도와 달라고 아버지를 부르지만 입술은 떨어지지 않고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잠에서 깨면 무사히 밤을 넘겼다는 안도감과, 오늘도 두려움에 떨며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절망이 동시에 밀려왔다.


하반신이 마비될 무렵, 어머니는 집을 나가서 연락을 끊었다. 그때부터 누나가 나를 돌봐 주었다. 아버지가 나를 휠체어에 태워 거실로 옮기면 누나는 준비해 둔 수건으로 내 얼굴과 손발을 닦고, 밥을 먹여 준다. 엄마 역할까지 하느라 늘 수척한 누나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어느 날 오랫동안 교제한 누나의 남자 친구가 집으로 찾아왔다.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누나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와 나는 무척 기뻤다. 두 사람 다 적지 않은 나이이기에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식 날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자꾸 결혼식에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돈어른과 일가친척, 하객들이 모인 곳에 누나의 동생으로 나타나는 게 미안했다. 그날만큼은 누나가 나라는 존재를 잊고 활짝 웃으며 행복하길 바랐다.

 

결혼식 당일, 정신없이 바쁜 아버지에게 장애인 전용 택시를 타고 혼자 식장에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곤 몰래 공원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딱히 할 일이 없어 전동 휠체어를 앞으로 당겼다 뒤로 밀었다 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아버지가 뛰어오는 게 아닌가. 내가 결혼식장에 오지 않자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내린 곳을 확인한 것이다.

 

나를 발견한 아버지는 굵은 눈물을 흘렸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결혼식장으로 가자고 했다. 누나는 나 없이 결혼식을 올리지 않겠다며 버티는 중이었다. 다음 예식이 예정되어 있어 마냥 기다릴 수 없다고 해도 눈물을 흘리며 요지부동이라고. 사연을 들은 하객들 중 일부도 떠나지 않고 나를 기다린다고 했다.

 

누나는 원래 식을 올리기로 한 화려한 홀이 아니라, 공사 때문에 잠시 닫아 둔 어수선한 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에 화장이 번져 엉망인 얼굴로. 내가 도착하자 끝까지 자리를 지킨 하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결혼식이 열렸다. 주례 선생님이 가 버린 바람에 누나와 매형은 서로에게 쓴 편지로 결혼 서약을 대신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누나가 내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어. 너와 같이 흔들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삶을 사는 것이 누나와 아버지 인생의 가장 큰 자랑이고 보람이야.”


그제야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누나의 말은 내 존재 자체가 도전이고, 살아 내는 매 순간이 값진 열매임을 알게 해 주었다. 언제 멈출지 모르는 심장 대신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기로 했다.

 

누나는 행복한 신혼 생활을 한다. 나는 아버지와 활동 보조사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앞으로도 흔들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인생을 살 것이다.

 

서현준 님 | 충남 논산시

 

 

댓글 쓰기

댓글 (0)

같은 카테고리의 글들

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상 이야기
2020.03.03   조회수 : 1,038    댓글 : 0개
내가 여덟 살이던 때,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기도 전의 일이다. 난생처음 학교에서 열린 사생 대회에 참가했다. 내 기억 속 첫 ‘컴페티션(경연)’의 날. 주제는 내가 읽은 동화 속 한 장면 그리기였다.그날 내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옆자리 친구의 그림은 지금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히 기억난다. 그 친구는 외국에서 살다 왔고, 이름도 ‘새라’인 데다가,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 학년짜리가 구사했다고 보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신선한 기법을 써서 나를 단번에 매료시켰다.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위에 수채화 물감을 덧칠하면 물감이 크레파스가 칠해진 부분만 근사하게 비껴간다는 사실을, 나는 새라의 그림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그날 저녁, 나는 목욕을 마친 뒤 엄마에게 새라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알록달록한 양탄자 위에 풍성한 파마머리의 공주님이 앉아 있고, 커다란 부리를 가진 새 수십 마리가 양탄자의 가장자리를 물고 힘차게 날갯짓하고 있는 그림에 대해서.양탄자는 하늘을 날고 있었고, 공주님의 머리카락은 양탄자가 날아가는 방향과 반대로 휘날리고 있었으며, 배경에는 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고. 하얀색 크레파스로 그린 구름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옅은 하늘색 물감 위에서 도드라졌고, 꼭 진짜 구름 같았다고.나는 그렇게 멋진 그림을 그린 새라가 꼭 상을 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엄마가 내 그림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어떤 그림을 그려 냈는지, 상을 받을 것 같은지. 나는 내 그림이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 건 그냥 그렇다고. 상을 못 탈 것 같고, 안 타도 상관없다고.그해 학부모 백일장 문집에 엄마의 글이 실렸다. 활자화된 엄마의 글을 읽는 건 처음이었는데, 나는 첫 문단을 읽자마자 깜짝 놀랐다. 내가 사생 대회 후 새라의 그림 이야기를 했던 일이 고스란히 적혀 있던 것이다.순간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당시 나는 목욕하고 난 직후였고,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그 이야기를 했다. 내가 팬티도 입지 않고 한 이야기가 온 동네로 배포되는 책에 실렸다는 사실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이야기를,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을 나한테 허락도 없이, 심지어 나를 알 법한 사람들이 보게 하는 게 그 어린 마음에도 어쩐지 부당하게 느껴졌다.하지만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런 마음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어느 날, 딸이 사생 대회를 하고 와서 종알거렸다는 이야기. 대회가 있다고 집에서 스케치북이며 크레파스 등등을 챙겨 갈 때에는 분명 자기도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고 상을 타고 싶었을 텐데, 정작 다녀와서는 온통 친구의 그림에 대한 칭찬이었다는.자신은 상을 안 타도 상관없으니 그 친구가 꼭 상을 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딸의 눈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자기보다 잘난 친구를 대하는 마음이 질투가 아닌 게 얼마나 기특했는지.그 글에는 내가 팬티도 입고 있지 않았다는 내용 같은 건 없었고, 내 그림은 그냥 그랬다는 나의 쭈그리 같은 멘트도 쏙 빠져 있었다. 글 속의 나는 실제의 나보다 조금 더 사려 깊었고 조금 더 근사했다.나는 그 글의 주인공이 새라가 아닌 나라는 사실이 무척 신기하고 또 기뻤다. 그리고 그냥 지나갈 뻔했던 삶의 한 장면이 언어를 입고 종이에 인쇄되어 글이 될 수 있으며 그걸 읽는 일이 아주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나도 이런 글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그 대회에서 새라는 최우수상을 탔고, 나는 아무 상도 타지 못했다. 엄마는 학부모 백일장에서 딸의 이야기로 장려상을 탔다. 그로부터 이십오 년 뒤, 나는 창비 신인 문학상을 타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장류진 님 | 소설가
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파랑 머리
2020.03.03   조회수 : 992    댓글 : 0개
서른한 살이 된 해를 기억한다. 나는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내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기력했고, 실체 모를 어떤 것을 무작정 그리워했다. 서른이 될 때는 별생각 없더니 그제야 방황이 찾아온 걸까.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어떻게 살아야 하나, 몇 년 후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 살고 있나,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많은 게 ‘문득’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그즈음 문득 파란색 머리가 마음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스무 살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봤을 때 케이트 윈슬렛의 파랑 머리를 보고 약간 충격받았다. 처음 보는 머리색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염색할 생각을 했지?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 여운은 꽤나 컸던지, 이후 종종 끄적인 그림 속의 나는 파랑 머리였다.내키는 대로 살고 싶은 한편, ‘나이가 들면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모든 걸 충족하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현재를 우선 생각하며 살아야겠지. 일상은 출퇴근이라는 틀에 고정되어 있으니 그 위에 다양한 고명을 올려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이를테면 파랑 머리 같은…….이틀 후 미용실로 갔다. 내 생애 첫 염색이었다. 서른한 살에 염색으로 일탈을 하다니. ‘기왕 할 거 제대로 하자.’ 싶었다.“ 무슨 색으로 해 드릴까요?”“ 전체는 보라색, 중간중간에 파란색 넣어 주세요.”염색은 생각 이상으로 길고, 힘들고, 지루했다. 탈색을 두어 번 하고 나니 금발이 되었다. 염색약을 바르고 기다리기를 몇 시간. 영롱한 파란빛 머리와 지독한 몸살을 얻었다.막상 하고 나니 회사에 갈 일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은 꽤 괜찮아 보였다. 괜히 부끄러워 모자를 쓰고 집에 와서는 혼자 머리를 흔들며 춤을 췄던 것 같기도 하다. 남들 눈에는 전혀 춤처럼 보이지 않았겠지만.신기할 만큼 내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앞으로 다시는 염색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으나.그날 이후 유독 밝아 보인다는 말, 예전보다 좋아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머리 색깔 외에는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어떻게 전보다 더 행복한 걸까? 야근 후 저녁을 먹다가 호주행 비행기표를 사기도 하고, 일을 더 열심히 했고, 더 잘 쉬게 되었다.반년 뒤 발리에서 만난 지금의 남자 친구는 훗날 추억했다. 오묘한 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고. 돌이켜 보면 나는 이것이 단순히 머리색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것을 한 작은 용기가 내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믿는다. 어떤 시도에는 일상을 꽤 많이 바꾸는 힘이 있다.이정은 님 | 싱가포르에서
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셀의 뒷면
2020.03.03   조회수 : 585    댓글 : 0개
“그림은 극사실적인데 애니메이션 같은 느낌도 나요.”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이야기한다. 미술적 재능은 도예를 하는 어머니에게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는 걸 새삼 느낀다.유년 시절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수작업으로만 이루어진 애니메이션 작업이 디지털로 바뀌는 긴 시간 동안 아버지는 프리랜서로 애니메이션 효과를 담당하는 일을 했다.‘셀 애니메이션’은 셀이라는 투명한 필름 뒷면에 손으로 일일이 물감을 올려 작업한다. 예쁜 앞면을 위해 뒷면에는 많은 붓질을 하고, 겹겹의 물감을 쌓는 등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움직이는 장면 일 초당 셀 스물네 장이 필요하다. 길고 지루한 작업이다.아버지는 〈머털 도사〉 시리즈, 〈아기 공룡 둘리의 얼음 별 대모험〉, 〈펭킹 라이킹〉 등 나와 같은 세대라면 알 법한 애니메이션에 참여했다. 해외 작품에도 참여한 덕분에 나는 우리나라에서 개봉하지 않은 해외 만화 영화도 접할 수 있었다. 생일이면 《보물섬》, 《만화 왕국》 같은 두꺼운 만화 잡지를 선물받고 기뻐한 기억이 난다. 그렇게 자라 왔기에 내 그림에서 애니메이션 감성이 묻어 나오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결과다.어느새 아버지가 한창 애니메이션 일을 한 때의 나이가 되었다. 나의 많은 부분이 그 시절 아버지와 닮았다. 아버지는 하루 열두 시간 이상 우직하고 섬세하게 작업했다. 요즘 나도 하루 열두 시간 넘게 그림을 그리고 꼼꼼하게 작업한다.문득 아버지가 투명한 셀에 그린 그림이 생각난다. 셀의 뒷면이 마치 아버지 같았다. 어린 시절에는 물감 자국만 보이는 그 뒷면이 싫었다. 그처럼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 적도 있다.결혼하고 가장이 된 지금은 다르게 와닿는다. 보이지도,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 수많은 노력과 땀이 있다는 걸 안다. 지금 나에겐 셀의 뒷면이 꽤나 멋스럽게 느껴진다.정우재 님 | 서양화가
이달의 좋은생각
[좋은님 에세이] 날개를 펴다
2020.03.03   조회수 : 817    댓글 : 1개
대학 졸업을 앞둔 무렵,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다. 집은 경매로 넘어갔고, 다섯 식구가 사글세 집으로 이사했다.난 아르바이트비를 들고 호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 비행기푯값을 제하니 한 달 살기도 빠듯했다. 그 돈으로 방을 구하고 보석 매장에서 일했다. 도시락을 싸고, 무료 트램을 타거나 걸어 다녔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자격증을 딴 다음 한국에 돌아와 영어 강사가 되었다.매달 빚 갚는 아버지를 도우면서 임용 고시 준비하는 동생을 뒷바라지했다. 청바지와 티셔츠 몇 장으로 한 계절을 나면서도 당당했다. 이 고비를 넘기면 날개를 달고 비상할 거라는 희망을 품었다. 동생이 시험에 붙고, 아버지 개인 회생 절차도 끝났을 때 비로소 속내를 털어놓았다.“경찰이 되고 싶어요. 지금부터 공부하겠어요. 필요한 돈은 모아 두었으니 허락만 해 주세요.”쉽지는 않았다. 낙방을 거듭하면서 자신감을 잃었다. 돈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시름에 젖을 즈음, 엄마가 온 가족을 한자리에 불러 놓고 말했다.“우리 큰딸, 노량진으로 가라. 이제껏 독서실 다니면서 혼자 공부했으니 수험생들 모인 곳에 가서 자극도 받고, 원 없이 공부하거라.” 동생도 “내가 언니 뒷바라지할게.” 했다.나는 여행 가방에 옷가지와 책을 싣고 노량진으로 향했다. 지칠 때마다 가족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마침내 합격한 순간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다. 이젠 안다. 부단히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은 없다는걸.도현단 님 | 대전시 서구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