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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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막대기가 선생이다

산모퉁이에서 버스가 이마를 내밀면 대문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다. 학교에 가려고 운동화 끈을 묶는데 아버지가 부른다. “가방에 약값 넣어 놨다. 병원 들렀다 와라. 원장님한테 술 끊었다 하고.” 훅, 소주 냄새가 뒷덜미에 닿는다. 아무 말 없이 논두렁을 달린다. 아랫말에서도 산등성이에서도 검은 교복이 달려온다. 차창 밖으로 공동묘지가 보인다. 복수가 그득 찬 아버지의 둥근배가 떠오른다. 황달에 걸린 눈동자가 차창에 붙어 있다. 아버지는 간경화를 앓으면서도 술을 끊지 않는다.

 

오늘은 책가방이 가장 가벼운 날이다. 한 달분 약을 타는 날엔 학교에 책을 두고 온다. 사람을 피해 마지막 버스를 탄다. 가방에서 새어 나오는 약봉지 부딪는 소리가 괴롭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숫돌에 목숨을 가는 것 같다. 쌓이는 소리가 아니라, 파이고 소멸하는 소리다. 나는 벌써 안다. 세상에서 가장 서글프고 비참한 소리는 약봉지끼리 살 비비는 소리다. 아픈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시간은 ‘식후 삼십 분’이란 것도 안다. 인생이 고해라는 걸 이미 안다. 나뭇잎도 파도도 다 힘들어서 뒤척거리는 것이다. ‘식후 삼십 분’은 구차한 목숨과 싸우는 시간이다. 십 년, 이십 년, 하루 세 번 ‘식후 삼십 분’을 기다리는 삶은 장마철 물걸레처럼 축축하다. 약봉지를 뜯는 손끝과 마른 입술의 떨림을 보라. 굴러떨어졌다가도 기어코 기어오르는 목젖이라는 돌을 보라. 벽시계의 시곗바늘도 덜컥, 제 숨결을 몰아쉰다. 아무런 느낌 없이 마시던 공기도 한 조각씩 떼어먹는 선물임을 알게 된다.

  

소주잔 앞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아버지는 혼잣말한다. 그것도 가족이 다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한다. “짧고 굵게 사는 거여. 인생은 다 역사가 증명하는 거여.” 그러고는 맥주잔 가득 소주를 들이켠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소금 안주에 고춧가루와 볶은 깨를 섞어 놓았나 보다. 아버지는 잇새에 낀 참깨를 내뱉으며 어머니를 꾸짖는다. “안주가 너무 기름져. 사는 게 이렇게 느끼하면 안 되는 거여.” 나는 울면서 뒤뜰 장독을 깬다. 안마당에서 울려 퍼지는 아버지의 ‘역사 증명론’이 뒤뜰에서 박살 난다. 앞마당과 뒤뜰 사이에 방이 있고 할머니와 엄마와 동생과 콩나물시루의 눈물이 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아버지가 어디 가서 막대기를 구해 오란다. 잘됐다. 나도 흠씬 두들겨 맞고 싶다. 굵직한 나무토막을 가져간다. 아버지가 말이 없다. 막대기가 아니라 쇠몽둥이를 가져오란 건가. 병든 아버지가 휘두르기에는 너무 무거운가. 마루 밑 장작개비를 가져올까. 아니면 복숭아나무 붉은 햇가지를 베어 올까. 대숲으로 가서 죽비를 만들어 올까. 아니면 도낏자루를 뽑아 올까. 망설이며 주춤거리는 사이 아버지가 목침을 당겨 벤다. 마루를 방구들 삼아 스르르 눈을 감는다.

  

“막대기를 가져왔으면 마당에 쓰고 싶은 말을 써라.” 도낏자루로 두어 글자 욕을 쓴다. 썼다가 발로 비빈다. 도낏자루를 내려놓고 부지깽이로 쓴다. ‘이따위’라는 말을 열 번쯤 쓴다. ‘이놈의 집구석’이라는 말을 다섯 번쯤 쓴다. ‘가출’이라는 말은 썼다가 얼른 발로 문지른다. ‘군대 가자’라는 말도 서너 번 썼다가 지운다. ‘말뚝 박자’라고 쓴다. 그러다가 ‘엄마가 불쌍하다’라고 썼다가 지운다. ‘동생들아 잘 있어라’라고 썼다가 눈물을 떨군다. ‘술 좀 작작 마시지’라고 쓰려다가 막대기로 내 머리통을 때린다. 아버지가 부스스 깨어난다. ‘취침 후 삼십 분’이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부엌에 가서 다시 한잔 마시리라. 아버지가 목덜미를 긁으며 잠꼬대처럼 한마디 내려놓는다.

  

“글은 힘이 센 거여. 몇 글자 더 써 봐.” 다시 목침을 당겨 베고 코를 곤다. ‘제발 건강 좀 챙……’ 쓰다가 부르르 떤다. ‘막내가 겨우 일곱 살이에요’ 눌러쓰다가 엉엉 운다. 아버지가 깨어나서 부엌으로 간다. “너는 소금 밥 먹을 놈이 아녀. 펜대 굴릴 놈이여. 들어가서 공부나 혀. 남은 장독 다 때려 부수지 말고.” 아버지가 부엌에서 다시 한마디 날린다.

 

“모든 건 역사가 증명하는 거여.” 아버지가 벌을 주거나 매타작을 했으면 나는 남은 장독도 다 깨부수고 애먼닭 모가지도 비틀었을 것이다. “슬픔과 화를 글로 다스리지 않고, 술과 몽둥이로 때려 부수려다간 아비 꼴나는 거여.” 식후 삼십 분이 지나면 아버지는 약을 먹고, 나는 원고지 앞에 앉는다. “글은 힘이 세서 울화통도 녹이는 거여. 모든 건 역사가 증명하는 거여. 일기라도 부단히 쓰다 보면 쓸 만한 놈이 되는 것이여.”

 

이정록 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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