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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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밤길

평생 그림을 그리며 살다가 나이 오십에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다. ‘끼니 걱정을 해야 할 형편에 더 이상 그림 재료를 구할 수 없다.’라는 건 변명이고, 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을 그리며 사는 일에 지친 것이 더 큰 이유였다.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 이쯤 했으면 할 만큼 한 거야.’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작업실을 정리하고 2교대 부직포 생산 공장에 취업했다.

 

내가 하는 일은 부직포 재료인 원사를 종류별로 계량해 기계에 넣는 것이다. 생산 시스템이 자동화되지 않아 일일이 사람 손으로 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다 보니 육 개월을 버티는 사람이 없단다. 아니나 다를까, 일을 시작한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젓가락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팠다. 손톱 주위엔 거스러미가 생기고 피가 맺혔다. 의자에 똑바로 앉기 힘들어 복대를 두르고 밥을 먹을 적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으려나, 이렇게 살려고 파리 유학까지 다녀왔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 일쑤였다. 동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언제까지 출근할 것인가.’ 내기를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곳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없었다. 삼 년간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산 덕분에 지금은 전반적인 생산 공정에도 참여할 만큼 일에 적응했다.

 

지난해 12월, 젊은 시절 함께 유학한 옛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식이 끊긴 지 꼭 이십 년 만이었다.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느라 애를 먹었다며 “지금 있는 곳이 어디야? 우리 만나야지!” 하며 목청을 높이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나를 어떻게 보여 줘야 하나, 두렵고 걱정되어 잠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약속을 취소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역에 도착해 군중에 섞여 있는 친구를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친구는 눈앞에서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계속 두리번거리며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반가운 만큼 어색하고 불편한 시간이었다. 아직도 선명한 청춘의 기억 앞에 지금 내 모습이 서글펐다. 저녁을 먹는 동안 친구의 얼굴에 언뜻 찬 기운이 스치면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니.’ 하고 나를 동정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도록 둘 걸 그랬다.’ 가슴 저리게 후회하며 친구를 밤 기차에 태워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왔다. 가로등이 길을 훤히 비추었지만 마음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피카소를 꿈꾼 찬란한 시절이 있었다. 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행복하면 좋겠다는 아름다운 꿈을 꾸었지만, 막상 그 꿈에서 깨고 보니 현실이 악몽 같았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누워 있는데 친구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자네를 보며 나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었네. 고마워, 자네는 역시 멋진 친구야.” 열등감과 패배 의식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야간 근무를 하다 보면 유독 시간이 더디게 가는 날이 있다. 아무리 일해도 끝이 없고 도무지 날이 밝을 것 같지 않은 날. 친구를 다시 만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메모지에 적어 놓았다.

 

“아무리 깊고 어두운 밤이어도 그 끝은 언제나 새벽이었네. 우리 지금까지 그 길을 오십 년 넘게 걸어오지 않았나. 몇 번이고 넘어져도 괜찮네. 길이 어두워서 그런 걸 어쩌겠나. 다시 일어나 걸으면 그뿐이라네.”

 

김동규 님 | 충남 천안시

제14회 '생활문예대상' 대상 - 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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