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5월호를 소개합니다
- [햇살마루] 물은 99도에서 끓지 않는다
“잡을 수 없는 별을 잡으려고 노력하면 좋은 연주가 나오더라고요.”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천재도 이토록 노력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책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더 이상 못하겠다고 주저앉는 순간,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서 일 미터를 전진해야 한다. 그 일 미터가 쌓여 실력이 된다. 무리했던 그 부분이 내가 모자라는 부분인데, 나는 그 ‘무리’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는 것이다(《밤의 공항에서》 중에서).” 사진을 처음 배울 적이 떠오른다. 1999년, 신문사에서 근무할 때였다. 문학 담당 기자였던 나는 어느 날 여행 기자로 발령을 받았다. 여행 기자는 사진을 직접 찍어야 하는데, 그때껏 사진을 제대로 찍어 본 일이 없었다. 흔히 ‘똑딱이’라고 부르는 조그마한 자동카메라조차 다룰 줄 몰랐다. 여행 기자로 출근한 첫날, 남대문 시장으로 달려가 중고 필름 카메라를 장만했다. 그리고 대형 서점에서 사진 책을 서너 권 샀다. 이후 사진 공부를 시작했다. 책을 뒤지고 인터넷을 찾아 가며 조리개와 셔터 스피드, 노출 등 사진에 대해 공부했다. 쉽지만은 않았다. 모든 일이 그렇듯, 실력은 단숨에 느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먹고살아야 하니 출장을 갈 때마다 사진 찍는 법에 관한 책을 들고 다니며 틈틈이 읽고 따라 했다. 또 한 가지 노력한 게 있다. 바로 ‘사진 보기.’ 좋은 소설가가 되려면 다른 작가의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하고, 좋은 화가가 되려면 다른 작가의 작품을 많이 접해야 한다. 사진도 다르지 않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을 많이 봐야 한다. 행운이었던 건, 기사 작성용 프로그램을 통해 로이터, AP(에이피), 연합 뉴스 등에서 올라오는 사진을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매일 아침 신문사에 한 시간씩 일찍 출근했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통신사 기자들이 올리는 사진을 오백 장씩 보았다. 다큐멘터리 부문에서는 세계 최고의 사진 기자로 꼽히는 이들의 작품이니 최고였다. 아마도 그때 겪은 시간들이(잘 찍지는 못하지만) 내가 사진을 찍으며 살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렀다. 운전도 하지 못하고, 자동카메라도 다루지 못했던 문학 담당 기자가 지금은 일 년에 6만 킬로미터 이상을 운전해 이곳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여행 작가로 살아가고 있다. 많은 이가 말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즐겁게 일하는 사람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고. 미안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아닌 것 같다. 다음 단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노력은 절대로 즐겁지 않다. 오히려 고통스럽다. 헬스장에 다닌 분들은 알 것이다. 티브이에 나오는 강사들처럼 웃으며 운동하면 절대로 좋은 몸매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좋은 몸매는 헬스장에 들어서기 두려울 정도로 ‘빡세게’ 운동해야 탄생한다. 제대로 운동했다면 토할 것 같아야지, 기분이 좋아서는 안 된다. 미국 프로 농구 팀, LA(엘에이) 레이커스의 감독이었던 제리 웨스트는 말했다. “기분이 좋을 때에만 잘한다면 당신은 인생에서 많은 것을 이루어 내지 못할 것이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우리는 모두 한계에 부딪힌다. 나도 당신도. 한계를 느끼지 못했다면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할 테다. 우리의 한계를 넓히는 것은 ‘딱 하나만 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라는 주문이다. 더 이상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 하나만 더 하는 것. 그게 실력이 된다. 한 번만 더 고치자, 한 장만 더 찍자, 한 장만 더 보자, 한 줄만 더 읽자고 스스로를 독려하며 여기까지 왔다. “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99도에서는 물이 끓지 않는다. 물이 끓기 위해서는 1도가 더 필요하다. 최갑수 님 | 시인, 여행 작가
- [동행의 기쁨] 스스로 존재하기
“어느 업체에 연락하지?” “견적은 얼마나 나올까?” 타일 교체, 난방 공사 등 집수리를 해야 할 때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질문한다. 하지만 함승호 님(57세)이 운영하는 적정 기술 공방에 찾아오는 이들은 묻는다. “이걸 제가 직접 할 수 있을까요?”함승호 님은 사십 대 초반까지 제조업과 유통업 등에 종사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 그에게 뇌졸중이 찾아왔다. 그는 일을 그만두고 시골로 가서 일 년 반 남짓 동안 재활 치료를 받았다. “그 전에는 얼마를 버느냐, 사업을 얼마나 확장하느냐가 가장 중요했어요. 행복을 헤아리는 방법은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건강에 이상이 생기자 더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살 수 있을까?’ 답을 찾는 여정의 시작은 ‘집’이었다. 나무, 볏짚 등으로 지은 ‘생태 주택’이라면 건강한 삶이 가능할 듯했다. 집수리, 난방 등 여러 생활 기술에도 좀 더 친환경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그렇게 ‘적정 기술’과 만났다. 적정 기술이란 비용과 노동력을 최소화하고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소재를 이용해 접근성을 높인 대안 기술이다. 전구를 직접 갈아 끼우는 일에도 접목할 수 있다. “단지 편리하고 밝게 살려는 욕구에서 끝나는지, 아니면 LED(엘이디) 전구로 바꾸어 생태 보존이라는 가치와 연결하는지가 생활 기술과 적정기술을 가르는 차이예요. ‘어떻게 에너지 소비량을 줄일까? 자연에 부담을 덜줄까?’ 고민하는 게 적정 기술이죠.” 그는 외국의 사례를 찾아 건축을 공부하고, 시공 현장을 영상과 사진으로 남겼다. “그동안 제게 집은 ‘제공받는 것’이었어요. 집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한정적이었죠. 하지만 외국에서 다양한 소재와 아이디어로 집을 짓는 걸 보고 ‘이럴 수도 있구나!’ 깨달았어요. 생각의 전환이었죠. 그 기술을 우리에게 적용할 방법을 고민했어요.” 무조건 새로 짓는 것만이 답이 아니었다. 건강한 집은 결국 자연에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하는데, 집을 새로 짓는 데에는 에너지가 어마어마하게 들기 때문이다. 기존의 자재를 최대한 오래 사용하되, 꼭 수리해야 할 부분에는 친환경 소재를 활용했다. 그는 영상과 사진을 온라인 카페에 올리고 공유했다. 정보가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 볼 수 있었다. 여러 회원이 그 자료를 유용하게 썼다. 그 역시 카페에서 질문하고, 정보를 얻었다. 모두 대가 없는 나눔이었다. “러시아어로 된 자료를 구해서 공부하려는데, 전 러시아어를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삼 일 후에 누군가가 알음알음으로 러시아어를 아는 이를 수소문해 번역본을 보내 줬어요. 외국에 흩어진 자료를 모아 우리나라에 적용할 방법을 연구하는데, 혼자였으면 못했을 거예요. 짧은 시간에 지식을 습득한 건 재능을 아낌없이 나눈 사람들 덕분이에요. 다양한 분이 모여 발전을 거듭했죠.” 그는 이 활동을 통해 자립을 배웠다. 그에게 자립이란 ‘삶을 스스로 유지하는 것’이다.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늘면 오롯이 삶을 꾸릴 수 있다. 그는 결국 ‘기술의 주체 되기’가 삶의 질과 태도를 좌우한다고 믿는다. 그가 처음 워크숍을 열었을 때다. 집수리가 필요한 이웃이 자신의 집을 제공하면 그곳에서 여럿이 함께 기술을 시도하고, 새로운 방안을 마련해 시험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은 다양하다. 내 집을 손수 수리하고 싶은 이부터 조선소에서 삼 사십 년간 근무한 베테랑 기술자, 공학을 가르치는 교수까지. 많은 사람이 같은 관심사를 갖고 모이자 기술은 빠르게 발전했다. 한번은 숙련된 용접공이 실습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이건 이렇게 하면 쉽습니다.” 라며 거들었다. 그러자 어려웠던 일이 간단하게 해결됐다. 그렇게 축열식 벽난로를 귀농인들에게 보급하고, 연료를 기존의 6분의 1만 쓰고도 같은 효과를 내는 난방 기술을 개발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공방을 유지하고 생활하는 비용은 주로 시공 일로 충당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일정 중 80퍼센트 이상은 워크숍이 차지한다. “이윤이 적어도 워크숍을 계속하는 이유는 ‘삶을 바꾼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시장으로부터 단순히 서비스와 물건을 제공받던 사람들이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환경을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지난해 공방을 찾은 사람 중 70퍼센트는 자신의 손으로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싶어 했다. “배우러 와서도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하고 걱정해요. 일단 엄두를 내야 해요. 저마다 배우는 속도는 다르지만 결국 능력을 갖추게 돼요.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를 내는 거예요.”그는 일상에서 만나는 적정 기술로 ‘뽁뽁이’를 꼽았다. 겨울철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면 실내 온도를 2~3도 높이고, 난방비를 20퍼센트 줄일 수 있다. 또 구청이나 관공서에서 파쇄한 종이를 모아 물에 푼 뒤 풀을 부어 벽돌로 만든다. 이렇게 탄생한 종이 벽돌은 단열에 효과적이다. “‘어떻게 하면 연료를 덜 쓰면서 따뜻하게 지낼까?’라고 질문하면 주변에 많은 소재가 보여요. 변화된 생활을 그려 보고,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발전시키는 게 중요해요.” 그의 목표는 적정 기술을 집수리뿐 아니라 생활 전반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그는 믿는다, 개인의 삶이 바뀌면 공동체도 변한다고. “에너지가 적게 드는 집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연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이자 생태의 일부예요. 공동체와 생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신의 자리에서부터 고민해야 해요. 모두가 연결되어 있어요.”적정 기술은 그의 삶을 바꾸었다. 이제 그는 ‘내가 주체가 되어 삶을 꾸리고, 스스로 존재한다.’라고 느낄 때 행복하다.글 _ 정정화 기자, 사진 _ 케이이미지
- [특집] 책이라는 탈출구
할머니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월급날이면 할머니에게 책을 한 아름 사 주었다.당시 열한 살이었던 나도 아버지가 사 오는 책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는 업고 있던 막냇동생을 내 등에 업혀 주고, 책과 돋보기를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동생을 업고 할머니가 느릿느릿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그 책이 어서 나한테 오기를 기다렸다. 그건 할머니와 나의 약속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퇴근할 때까지 할머니를 대신해서 동생을 봐 주면 자기 전까지 그 책은 내 것이 되었다. “딸랑.”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부리나케 할머니한테 동생을 맡기고 책을 받아 쥐었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설레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지극정성으로 책을 사 준 이유가 무엇인지, 할머니가 왜 그토록 책에 집착하는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내 큰삼촌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할머니는 책을 무기로 그 슬픔을 이겨 내고 삶의 의욕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 세상에 책만 한 명약은 없다.”라고 믿는 할머니 가까이에서 긴 시간을 보내며 나도 웬만한 일에 끄떡하지 않는 강인함과 씩씩함을 배웠다. 중국에서 한국어 강사로 있을 때다. 나는 상하이 곳곳을 지하철과 버스로 오가며 열심히 수업했다. 택시비, 생수값마저 아끼며 돈을 모았다. 그렇게 팔 년 만에 작은 아파트 하나 장만할 비용을 마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적금 통장부터 현금, 금붙이, 전자제품까지 모두 사라졌다. 도둑은 돈이 될 만한 물건을 탈탈 털어 갔다. 도둑이 든 지 하루가 지난 후에야 발견했으니 적금 통장 보안조차도 이미 물 건너간 뒤였다. 팔 년간의 삶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화가 나고 분통이 터져 몇 날 며칠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침대에 몸져 누웠다. 그러다 문득 서재 문을 열었다. 도둑이 서재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차곡차곡 꽂아 놓은 책들이 흐트러짐 없었고, 독서 노트와 필통도 탁자에 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그 책들을 마주한 순간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 몸에 서서히 힘이 도는 듯했다. “이 세상에 책만 한 명약은 없다.” 할머니 말이 떠오르면서 숨통이 트였다. ‘할머니처럼 책을 읽으면서 이 악몽 같은 기억을 떨치고 싶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시시각각 나를 괴롭히는 기억을 털어 버리려면 책과 일에 몰입해야했다. 나는 그길로 학원에 전화를 걸었다. 집에서 멀다는 이유로 쭉 거절하던 수업을 하기로 계약했다. 자동차 부품 회사였는데, 그곳까지 갈 버스와 지하철이 없기에 회사 통근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아침 여섯 시에 집에서 출발하면 여덟 시에나 회사에 도착했다. 나는 직원들 점심시간에 강의했기에 꼬박 네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퇴근할 때도 마찬가지로, 통근 버스를 타야 하는 오후 다섯 시까지 또 네 시간을 기다렸다. 나는 그동안 책을 읽었다. 박경리의 《토지》, 김진명의 《고구려》, 조정래의 《태백산맥》, 여러 위인전과 자서전을 매일같이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처럼 책에 빠져든 적이 없었다. 한줄 한 줄이 내 몸 구석구석에 신선한 혈액처럼 흘러들었다. 그토록 나를 괴롭힌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책이라는 탈출구가 없었다면 나는 분노와 원망에 휩싸인 채 새 출발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습관이라고만 생각한 책 읽기가, 최악의 시기를 정신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시기로 바꿔 주었다. 귀덕 님 | 경기도 양주시
- [오늘의 만남] 봄 나무를 기억해
십 년째 전세로 사는 아파트를 떠나게 되었다. 하필이면 전세 대란 시기와겹쳐 부동산 시장에 나온 전셋집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나오는 매물도 지금보다 조건은 훨씬 떨어지는데 보증금은 몇억 원씩 비쌌다. 양심이 없네, 양심이 없어. 그 무렵 내가 가장 많이 중얼거린 말이다. 몇 달 마음을 졸이다가 어렵사리 집을 구했다. 평수는 좁아졌는데 보증금은 훌쩍 올라 입맛이 썼다. 얼마 후 집주인이 전화를 걸어와 인테리어 견적을 내러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약속 날 집주인 내외와 시공사 직원 여럿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낯선 이들이 집 안 곳곳을 살펴보고 수선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려니 언짢았다. 안 그래도 쫓겨나는 기분인데 내 공간을 침범당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디자이너와 집주인이 자꾸만 내게 질문을 했다. 여름은 얼마나 덥고 겨울은 얼마나 추운지, 통풍과 채광은 어떤지, 살면서 무엇이 불편했고 좋았는지. 이 집에서 지낸 십 년이 필름처럼 펼쳐졌다. 아이들은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느 가게 물건이 좋고, 봄이면 어느 산책로가 아름다운지, 계절마다 다른 온도로 불어오는 바람결까지 전부 떠올랐다. 안주인은 디자이너에게 나를 ‘주인보다 더 살뜰하게 이 집을 가꿔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올해 퇴직하면 오랫동안 전세로 내준 이 집을 비로소 누리며 살고 싶다고 했다. 어느새 나는 질문받지 않은 사실까지 낱낱이 들려주었다. “저기 앞산에 십년 동안 어김없이 가장 먼저 새잎을 내는 나무가 있어요. 우리 식구들은 ‘봄나무’라고 불러요. 거실 창을 향해 커다란 탁자를 놓고 앉아 차도 마시고 책도 읽다가 간간이 고개를 들면, 앞산이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 줄 거예요. 저 앞산이 큰 위안이었어요.” 바깥주인도 그 나무를 안다고 했다. 안주인은 가끔 놀러 와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청했다. 그들과 나는 전세 계약서로 묶인 관계이자 이사하면 다시 만날 일 없는 사이지만, 우리가 그리워할 봄나무를 그들이 같은 자리에서 지켜볼 걸 생각하면, 그것으로 됐다 싶었다. 이 집에 관해서라면 쫓겨났다는 기분보다 봄 나무를 물려주고 왔다는 애틋한 기억이 앞설 거라고. 이주혜 님 | 소설가, 번역가
- [좋은님 에세이] 햇살 같은 한마디
보육원에서 삼 년여를 지낸 햇살이는 말도 어느 정도 하고, 본인 취향과 성격이 형성되는 시기에 우리와 가족이 되었다. 결혼하고 육 년간 둘이서만 지내던 우리 부부는 아이와 생활하면서부터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거먹이면 설사할까, 저거 입히면 감기 걸릴까…….햇살이를 입양한 지 일주일쯤 지난 저녁, 잠자리에 누운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깜짝 놀라 왜 그러냐고 물으니 자기도 모르겠단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일주일을 보낸 초보 엄마의 심정을 다 알지 못했다. 해 줄 말이 없어 그저 바라만 보는데, 햇살이가 엄마 주위를 맴돌았다. ‘아…… 햇살이는 어른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보겠구나.’ 사회 복지사와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의 밝은 모습만 접하다가 갑자기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니 당황스러운 듯했다. 햇살이는 엄마의 팔다리를 주무르더니 이내 고사리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내는 더 눈물이 날 수밖에. 한참을 안절부절못하던 햇살이가 한마디 했다.“엄마, 미안해요.” ‘너 때문에 우는 거 아니야, 햇살아. 엄마가 그냥 몸이 힘들어서 저절로 눈물이 나는 거야. 햇살이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야.’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을 테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아내는 그저 햇살이를 껴안고 펑펑 울 뿐이었다. 도저히 그대로는 잠들 수 없을 듯해 다 같이 거실로 나갔다. 우리는 재미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하나 본 뒤에야 겨우 진정하고 다시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첫 고비를 넘겼다. 나는 “앞으로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수백 개겠지만, 지금처럼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면서 넘어가 보자.”라며 아내를 다독였다. 그로부터 오 년이 흘렀다. 수많은 산을 넘는 동안 나와 아내는 네 아이를 입양한 다둥이 부모가 되었다. 첫째 아들은 벌써 열일곱 살이다(열네 살에 세 번째로 입양 온 아들이 장남이 되었다). 지금 우리 가족은 가평의 전원주택에서 지낸다. 강아지 여섯 마리를 돌보며, 아이들 홈스쿨링까지 거뜬히 해내는 아내를 보니 감회가 새롭다. 강내우 님 | 성악가, 유튜브 ‘가평별곡’ 운영자 원고 응모 정기 구독
- [새벽 햇살] 숨은 씨앗
천둥 번개가 건물을 건드렸는지, 갑자기 비상벨이 울려 잠을 깼다. 직원들이 안심하고 자라고 했으나 이미 시각은 새벽 다섯 시. 기상 시각까지 얼마 남지 않은 데다, 다시 잠들기가 애매해 교도소 운동장을 바라봤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운동장 바닥에 고인 물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몇 년 전 나는 우울증을 겪었다.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아팠고 삶을 포기하고 싶기까지 했다. 병원에서 입원을 권유받은 무렵, 사고가 일어나 이곳에 오게 되었다. 구치소에서 울며 보낸 첫날 밤, 나는 생각했다. ‘내 인생은 끝났구나.’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은 오히려 인생의 전환점에 선 듯하다. 우선 우울증 치료를 받으며 다행스럽게도 건강이 좋아졌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꿔 온 제빵사가 되고자 자격증도 두 개 취득했다. 수용자를 사랑으로 품어 준 선생님의 자상한 가르침과 인생 2막을 의미 있게 살고 싶은 나의 간절함이 빚어낸 결과였다. 나는 큰 성공을 원하지 않는다. 다만 나 자신을 예전처럼 원망하지 않고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미국의 소설가 존 허시가 쓴 책 《1945 히로시마》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새 잡초들이 무성해져 잿더미를 뒤덮어 버렸고, 죽은 도시의 앙상한 뼈대 사이 사이로 야생화들이 만발했다. 가공할 만한 폭탄조차도 땅속에 숨어 있던 생명의 씨앗에는 그 위력을 미치지 못했다.” 폭탄이 떨어진 땅에도 싹이 돋고 꽃이 핀다. 나 역시 좌절하지 않고 새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의 인생에도 새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리라 믿는다. 새벽 햇살 책 후원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