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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당신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며칠 전 베트남에 다녀온 지인으로부터 커피 선물을 받았다.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받는 그 나라 특유의 커피였다. 잊지 않고 내 선물까지 챙겨 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찬장에는 그 커피가 이미 대여섯 상자는 있었다. 모두 베트남에 다녀온 분에게 받았다. 태국에 다녀온 친구로부터는 마뚬차(태국 전통차)와 허브 비누를, 인도에 출장 갔다 온 분에게는 수분 크림과 향을, 일본에 다녀온 가족에게선 쯔유(일본조미료)와 젓가락, 두통약을 선물받곤 했다. 모두 그 나라 특산물이거나 선물하기 좋은 제품이라고 소문난 것이다.

 

특산물 선물은 해외여행만이 아니다. 여수에 다녀온 부모님은 갓김치를, 강원도에 다녀온 후배는 옥수수와 오징어를 보냈고, 제주도에 사는 선배는 겨울마다 귤을 보내 준다. 특산물 하나 변변치 않은 지방에 사는 게 머쓱해질 지경이다. 먼 여행길에 오른 사람에게 받는 선물이 반복된다 해도 그걸 상상력 부족이라든지 안일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먼 곳에서도 나를 생각해 주었다는 것이니, 선물의 진가는 충분히 발휘된 것이다. 선물을 챙기며 나를 떠올렸을 그 사람, 그 시간에 대한 뭉클한 감격이 바로 선물 자체인 까닭이다. 그래서일까. 그렇게 받은 선물들은 늘 뜯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아깝기도 하거니와 나를 생각해 준 상대의 마음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욕심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나 역시 오래 계획한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를 키우느라, 회사에 다니느라, 각자 살 일이 바빠 제대로 만나지 못한 친구들과의 여행이었다. 주부들의 여행이란 으레 그렇듯이 제법 오랜 준비를 해야 했다. 우리는 여행지를 정하는 것부터 시작해 일정과 차편, 아이들을 맡길 일과 돌아와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미리 준비해 둘 일을 챙기느라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래도 신나고 즐거웠다. 근 십여 년 만의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이 아닌 이들과 떠나는 일은 이례적이고 오랜만이었다. 나만 들뜬 것이 아니라 어쩐지 두 아이도 흥분한 모습으로 나를 배웅했다. 아니나 다를까, 집을 나서는데 열 살짜리 둘째가 소리쳤다.

 

“엄마, 꼭 선물 사 와!”

아뿔싸! 녀석이 칭얼거리지 않고 선뜻 다녀오라고 한 데에는 그런 꿍꿍이가 있는 것이었다. 나는 선심을 쓰듯 알겠다고 크게 말하곤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보낸 하룻밤은 달콤하다 못해 황홀할 지경이었다. 통화나 메신저로만 나누던 대화였다. 목소리와 글자가 아닌, 직접 얼굴을 보며, 손을 매만지며, 웃고 울며 떠드는 그 시간이 그렇게 짧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헤어지는 날이 되었다. 선물을 사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나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다.여행 선물은 특별한 것이 아닌 생활용품을 사는 것. 손톱깎이나 국자, 김치 통이나 슬리퍼 같은 것들. 물론 지역 특산물을 사는 것이 그 여행지를 기념하는 데에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나는 다만 곁에 두고 오랫동안 그 여행지를 떠올리는 무언가를 갖고 싶다. 먹고 나면 까먹고 마는, 쓰고 나면 잊히고 마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내 옆에 둘 수 있는 것.

 

그래서 나는 아이들과 처음으로 떠난 외국 여행에서 빈티지 민소매 티셔츠를 사 왔다. 한여름에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집안일 할 때 그 티셔츠를 입으면 어쩐지 덜 억울한 기분이 들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순천 여행지에서 산 솜바지는 겨울 낚시 철에 요긴하게 입는다. 속초에서는 커피 그라인더를, 광주에서는 스카프를, 화순에서는 빗을, 청도에선 냄비를, 남해에서는 LP(엘피) 플레이어를 사 왔다. 간절한 여행일수록 그곳에서 사 온 물건에 애착이 갈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산 컵에 마시는 커피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고, 거기서 사 온 거울로 보는 내가 더 반짝여 보이며, 그 여행지에서 사 온 사기그릇에 담아 먹는 시금치가 더 남다른 맛이 나는 것처럼. 착각이나 기분 탓이겠지만 얼마나 황홀한 여독인가!

 

이제 곧 봄이 되면 많은 이가 봄나들이를 나갈 것이다. 올해만큼은 지역 특산물 말고 조금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길 권하고 싶다. 귀이개나 탁상시계, 액자도 좋고, 동전 지갑, 튀김 요리기 같은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욕실 커튼이나 베개 보, 스테이플러 같은 건 어떨까. 아, 그래서 강릉 여행에서 내가 사 온 선물은 닭 강정이나 오징어순대가 아니라 가족 파자마 네 벌이었다. 식구들이 쪼르륵 그 옷을 입고 있는 걸 볼 때마다 나는 십여 년 만에 떠난 친구들과의 여행을 떠올리며 혼자 빙그레 웃을 것이다.

 

김이설 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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