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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만남] 이별 후애(後愛)
2018.10.10   조회수 : 3,303    댓글 : 7개

주말 오후, 남편과 멀찍이 떨어져 앉아 마른 빨래를 함께 개켰다. 남편이 문득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더라도 나에게 더 잘해 줄 걸 하고 자책하지 말기로 해요. 난 충분히 다 받았으니.”

 

나는 살짝 어리둥절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이에는 다섯 식구분의 빨래 더미가 있었다. 다른 질문이나 설명 없이 가장 하고 싶은 대답만 덧붙였다. “나도 이하 동문.”

 

대화는 짧고 담담했지만 또 깊고 다정했다. 이 대화 속에 우리 만남의 본질과 목표가 담겼다. 이별의 순간 받을 것 다 받고 줄 것 다 주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 잘 만났기에 잘 이별할 수 있는 사이.

 

모든 만남은 이별을 예비하고, 모든 이별에는 만남의 본질이 들었다. 어쩌면 만남과 이별의 순환이 이토록 긴밀하기에 우리는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안녕’이라고 같은 인사를 하고, ‘있을 때 잘하라’며 서로의 옆구리를 찌르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또 잘 잊고 잘 속는 데다 빨래 더미처럼 쌓인 수많은 일상의 과제에 압도되어 그 소중함을 쉽게 잊는다. 이별의 지점에 도달하고 나서야 잘 주지 못했음에, 잘 받지 못했음에, 그리하여 이제는 남은 마음, 남은 사랑과 홀로 남겨졌음에 가슴을 친다.

 

이제 막 이별한 사람만큼 만남에 대한 주옥 같은 통찰을 전해 주는 사람도 없는 법. 시어머니와 이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남편과의 사소한 말다툼 후 뒤 틀려 차가워진 내 마음을 다시금 말랑말랑하게 적셨다.

 

“우리가 서로에게 원한 건 그저 사랑을 주고받는 것뿐일 텐데, 남는 것은 결국 못다 준 사랑밖에 없는데, 왜 우리는 그토록 많은 시간 서로 원망하고, 오해하고, 너무 가까워지지 않으려는 데에 마음을 썼는지 몰라요.”

 

미처 전하지 못한 남은 사랑이 회한과 자책, 미련으로 전환되는 것을 들으며, 내 안의 사랑을 차갑게 얼려 두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순간마다 마음을 고쳐먹자고 결심한다. 아낌없이 주고, 받은 것을 소중히 간직하자고. 이별 후 남는 사랑이 없도록.

 

선안남 님 | 상담 심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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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임미열
201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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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절의가을은쓸쓸하다기보다 주마등처럼지나가는 추억의한모서리~
임미열
201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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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의사랑과노부부의인생길 서로동반되어같이가주었지만 하늘나라의문턱까지만가주었던막내딸의부모사랑바라보기
최길웅
2018.10.18
중요한 것을 잊고 지낸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영자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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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읽고
남편한테늘투정만바라는제가
새삼부끄럽습니다
저도부모님으로부터물려받은
천연적인사랑나눔의베품 즐기면서 살아고있는데 때로는 이것이벅찰때가있네요
그래서인지 저또한 투정을하고  바라기도하네요작년여름에는한분뿐이던친정엄마 갑작스럽게보내드려서너무맘아프고우울증걸린듯
살았거든요 남편하고도사이도안좋았구요
근데지금은 잘지내려제가노력중이네요
든든하게지켜주는남편이늘고맙기도
감사하네요
임계선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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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결혼한 것이라 서로 같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우리. 
동갑나기인 우리도 어느덧 인생의 가을에 들어섰네요, 남은 삶이 얼마일지 몰라도 서로 더 챙겨주고 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유재성
2018.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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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것에 인색했던 나의 잘못을 반성하고 받는것만 좋아했던 나의 욕심을 이순간 고쳐 먹기로 했습니다
koris74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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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 끊어진 여기에서는 엄마도 아빠도 형도 마누라도 아줌마도 아저씨도  그리고 나도 때가 되면 증발해버린다. 다른 여기의 나가 이런식으로 살아가겠지. 다른 때의 다른 여기의  나도 마찬가지겠지.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것처럼 또 다른 내가 여기서 살아가겠지
정글이 무성한 것처럼 사람들은 무성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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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괜찮아 마을
2019.08.07   조회수 : 384    댓글 : 0개
작년 이맘때 목포의 ‘괜찮아 마을’에 청년 서른 명이 모였다. 조금은 비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도, 실패해도 괜찮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유대감을 목표로 6주간 진행된 실험 공동체. 우리는 열심히 살면서도 점점 내면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스스로에게 제대로 말을 걸 수 있을 때까지 조금 더 긴 생각과 위로의 과정이 필요했다.괜찮아 마을에 온 이유는 다양했다. 부모님이 강제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상사의 폭언 때문에, 진짜 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나왔다. 어떤 이는 무리에서 “너는 너무 튄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괜찮은가?”를검색하다 이 마을을 알았다고 했다.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틀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같았다. 나는 요리사 참가자의 말을 듣고 그 투명한 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레스토랑에서 ‘자! 오늘 각자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 보자.’라고 하면 모두가 토마토 소스로 파스타를 만들어요. 그러면 저는 토마토를 튀겨서 파스타를 만들죠. 토마토 파스타 맞잖아요? 토마토 소스 파스타 만들자고 한 건 아니니까…….”6주간 우리가 계속 맞서 싸워야 하는 게 있다면 투명한 틀을 탈피하는 것이었다. 서로를 틀에 가두려는 시선에서 벗어나고, 무엇보다 자꾸만 틀 안으로들어가려는 습관을 버리려 노력했다. 오히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아 조급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한심해했지만, 넘어질 적마다 서로를 일으켜 세우며함께 나아간 순간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그 지난한 과정을 통해 깨달았다. ‘괜찮아 마을’에서 무언가를 배워 괜찮은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이미 괜찮은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모습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우리는 이 마을에서 찾은 단서의 조각을 갖고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과연 나와 친구들은 우리가 살고 싶은 투명한 틀 밖의 세상도 하나의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요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그런 날이올까? 어느 때보다 서로에게 큰 응원이 필요한 요즘이다.김송미 님 | 영화 〈다행이네요〉 감독
이달의 좋은생각
[좋은님 에세이] 33년 만의 영화관
2019.08.07   조회수 : 314    댓글 : 1개
부모님은 십오 년 동안 가게를 운영했다. 연중무휴라 누가 아프거나 가게 공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야 문을 닫았다. 긴 설 연휴를 앞두고 쉬는 날을 세어 본 나는 부모님에겐 휴일을 기다리는 설렘이 없을 거란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막에도 오아시스가 있고 가뭄에도 단비가 내리는 법인데, 휴일 없는 삶이란 얼마나 막막한가.몇 년 전부터 휴일을 정하길 권했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휴식이 필요하다며. 부모님은 매출이 줄고 단골도 끊긴다며 거절했다. 보다 못한 나는 이렇게 외쳤다. “대형 마트도 한 달에 이틀 쉬는데, 우리가 얼마를 더 벌겠다고 몸을 혹사시켜!” 그 말이 부모님 마음을 움직일 줄은 몰랐다. 결국 한 달에 두 번쉬기로 결정했다.문제는 휴일에 벌어졌다. 한 번도 제대로 쉰 적 없는 부모님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랐고, 가게 문을 도로 열 생각까지 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묻지도 않고 영화표 세 장을 예매했다. 이미 결제해서 취소할 수 없다고 억지를부려 영화관으로 유인했다. 그 핑계가 통한 건 33년 만에 영화관 가는 아빠 덕분이었다. “너희 엄마랑 데이트할 때〈부시맨〉 본 게 마지막이야.”그때는 엄마마음을 사로잡으려 영화 관람에 거금을 썼단다. 그 뒤론 텔레비전으로 충분하다는 아빠의 철학에 따라 영화관에 가지 않았다고.영화관에 가기 전, 아빠는 나에게 물었다. “옷은 어떤 걸 입고 가야 해?” 아빠한테 영화관은 그렇게 먼 곳이었다.아빠는 내가 사 준 팝콘 상자를 품에 안고 휘둥그레진 얼굴로 극장에 들어섰다. 나에겐 너무 익숙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은 아빠에겐 입이 벌어질 만큼엄청난 문화 충격이었다. 대형 스크린, 풍성한 소리, 바삭바삭하고 달콤한 팝콘, 재미있는 내용과 맛깔스러운 배우들 연기까지. 그날의 영화관은 완벽했다.“재미있는 거 있으면 종종 데려가 줘.” 영화 보는 동안 아이처럼 즐거워하며팝콘 한 상자를 몽땅 비운 아빠는 벌써 다음 휴일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열심히 일한 뒤에 오는 꿀맛 같은 휴식, 그 달콤함을 부모님과 함께하자고 영화관을 나서며 다짐했다.강미경 님 | 서울시 성북구
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가족의 품
2019.08.07   조회수 : 463    댓글 : 1개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엄마가 분홍색 포대기를 안고 집으로 왔다. 그 안에는 태어난 지한 달 된 여자아이가 있었다. 외삼촌의 사생아였다. 아이를 보육원에 보낸다기에 엄마가데려온 것이다.수정(가명)이는 외동딸로 자란 나에게 특별한 동생이 되었다. 분유 먹이기, 기저귀 갈기,재우기까지 내가 도맡았다. 그래서인지 나를 유독 잘 따랐다. 수정이는 우리 가족에게 웃음을 가져다주는 소중한 존재였다.무언가 조금씩 어긋난다고 느낀 건 수정이가 중학교 3학년 무렵이었다. 수정이는 거짓말을 하고, 화장과 옷차림에 부쩍 신경 쓰더니, 급기야 불량 학생과 어울려 다녔다. 새벽에귀가하기도 했다. 가족들이 타일렀지만 귀찮은 잔소리로 여겼고, 점점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잦은 거짓말과 도를 넘은 일탈은 일상이 되었다. 수정이의 눈빛과 말투, 표정은 낯설기만 했다.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좋은 친구를 사귀라는 내 말에 소리를 꽥 질렀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수정이가 나를 친엄마처럼 따랐던 만큼 충격도 컸다.엄마 없이 자라 그렇다는 말을 듣지 않게 하려고 엄하게 대한 것이 수정이의 반항심을키운 걸까. 아니면 자신의 불우한 가정사에 불만을 품은 걸까. 수정이는 우리 가족과 점점더 멀어졌다.결국 수정이는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 우리에게 “저를 찾지 마세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라는 쪽지만 남긴 채 가출했다. 엄마는 몸져눕고, 아빠와 나 역시 충격을 받았다. 수정이 친구를 수소문해 찾아 나섰다. 수중에 돈도 없고 지낼 곳도 마땅찮은 녀석이 대체 어디로 갔는지 답답했다.집을 나간 지 보름이 될 무렵, 인근 소도시의 한 오락실에서 수정이를 찾았다. 내 동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확 달라진 모습이었다. 나는 수정이가 돌아오지 않을 걸 직감했다.“언니, 나 돌아갈 생각 없어. 다신 찾지 말아 줘. 키워 준 건 고마운데 그동안 나 솔직히숨 막혔어. 언니는 나 이해 못할 거야. 미안해.”눈물로 호소했으나 끝내 설득하지 못했다. 나는 은행에서 얼마간의 돈을 빼 수정이 손에 쥐여 준 채 돌아섰다.칠 년이 흘렀다.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날, 밤늦게 초인종이 울렸다. 나가 보니 자신을 쏙 빼닮은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수정이가서 있었다. 내 결혼 소식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온 것이다.허름한 옷차림에 피곤이 덕지덕지 내려앉은 얼굴이지만, 내가 아끼고 사랑한 동생이 맞았다. 홀로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떻게 사는지 짐작이 갔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말없이 수정이를 끌어안았다. 수정이는 내 품에서 그간의 외로움과 모진 현실을 토해 낸 뒤에야 울음을 멈추었다.“나 면목 없어서 고모랑 고모부 얼굴은 못 보겠어. 결혼 정말 축하해. 행복하게 잘 살아.식장엔 못 가겠고 언니 얼굴은 한번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어. 결혼식장에 꼭 와서 두 분에게 인사드려. 엄마는 아직도 네가 돌아올까 봐 밤에 문을 잠그지 않고 주무셔. 지금 네가 어떻게 살든 신경 쓰지 말고 돌아와. 우리는 가족이잖아.”아무 대답 없이 돌아간 수정이는 결혼식장에 아이를 안고 나타났다. 돌고 돌아 마침내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김경진 님 | 서울시 송파구
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아들이 떠나는 날
2019.08.07   조회수 : 578    댓글 : 1개
당연히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다. 언젠가 다 큰 아들에게 “잘 가라.” 하고 말할 날이. 그날이 오면 울지 말고 축하해 줘야지, 숱하게 생각했다. 오늘이 그 날이다. 그런데 이 눈물은 대체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마음 방구석에 쟁여 두었던 것일까?어제 아들은 이곳 발리의 보육원 아이들과 캠핑을 떠났다. 지난 7년간 아들은 방학마다 이 아이들과 함께였다. 보육원은 아들에게 제2의 집이 되었다. 오늘 저녁 아들은 캠핑에서 돌아오자마자 밤 비행기를 탈 것이다. 나는 당분간 발리에 남을 테고 아들은 한국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한다.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것이다. 나는 아들을 스테이크집에 데려갈 것이다.발리에서는 만 원이면 훌륭한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스테이크는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하지만 자주 가지는 않았다. 아들이 보육원에서 몇 시간씩 땀을 흘린 날에도 “다음에.” 하고 미루곤 했다. 조금 전까지 아이들과 정말로 좋은 것을 함께 나눈 뒤에, 보육원을 나서자마자 곧장 아이들과 나눌 수 없는 고기를 아들에게만 먹이는 일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나는 내내 그런 엄마였다.근검함, 노동, 나눔의 의미에 강한 방점을 찍는 엄마. 많은 순간 아들은 내가 답답했을 것이다. 그저 참아 주었을 것이다. 사춘기 이래로 나는 늘 내가 참고 기다려 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부모가 참고 기다려 준다는 표현처럼 우스운 것이 있을까? 무엇을 참고 기다리는가? 자식이 내가 바라는 대로 되기를?아들이 자란 세계는 내가 자란 세계와 다르다. 아들이 살아갈 세계도 내가 살아갈 세계와 다르다. 아들은 내가 바라는 이상과 다른 자신만의 이상으로 살아갈 테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 피곤할 것이다. 이미 살아 본 그 맥락을 잘 알면서도 참아 준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좀 살아보았다고 곁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짬짬이 내가 아는 부스러기를 내밀었다. 보호한다고 강요했고 가르친다고 멱살을 잡았다.부모라는 집단은 숙명적으로 ‘보수’ 집단이다. 그 미안함으로 미처 알지 못했던 방구석에 들어가 쟁여 둔 눈물을 닦는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걸레질한다. 아들과 함께한 날들을 되돌아본다. 아들이 삼 킬로그램으로 내게 온 그날을, “음마!” 하고 부른 그날을, 처음 다섯 발자국을 걸은 그날을, 내가 아무리 초라해도 “엄마, 사랑해.”라고 말해준 날을, 세 발에서 네 발로 다시 두 발로 숨차게 함께 달린 자전거 길을, 내 키를 앞지른 열한 살의 봄날을, 방에서도 이어폰을 끼고 앉아 ‘보수’의 말에 대항했던 열다섯 살을 그리고 종종 어른의 눈빛을 하고 마주앉아 고개를 끄덕이는 지금, 열아홉을.우리는 수많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표현으로서의 산과 강이 아니라, 정말로 오대양 육대주의 수많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나는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내 인생에서 앞으로 너만 한 여행 친구를 찾지는 못할 거야. 순수하고 사랑 많은 내 최고의 여행 친구. 네가 내 인생으로 들어와 주어서 엄마는 엄청나게 커 버렸다. 그 성장을 잘 감당할 때도 있었지만, ‘어른 노릇’이 힘들어 한계를 드러낸 적도 많았지. 좋은 밥, 편안한 잠, 깊은 포옹만 주면 되었을 텐데 더 많은 게 필요한 줄 알고 어리석게도 뛰어다녔다. 엄마의 분주했던 어리석음일랑 잊고 좋은 기억만 가져갈 수 있다면. 네가 그럴 수 있다면. 네가 떠나면 엄마는 다시 작아질 거야. 이십사 시간 어른이 아니어도 되는 편안함으로 살아가겠지. 간혹 내가 철 지난 농담을 하거나 소중한 것을 깜빡해도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렴. 이제는 네가 어른이 될 차례니까. ‘엄마’라는 거대한 이름을 나처럼 작은 사람에게 선사해 주어서 고마웠다. 마음의 모든 방을 비우며, 사랑하는 엄마가.”최후의 방까지 모두 닦았다. 아들이 돌아올 시간이다. 세수를 해야겠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울다가도 아이가 올 시간에는 세수를 하고 말간 얼굴로 맞았다. 그때에 내게 뛰어들어 와 안긴 아이는 언제나 향기롭고 싱그러워서 환한 태양처럼 방금 전까지 내가 운 자리에 빛을 비췄다. 덕분에 슬픔에도 절망에도 함몰되지 않고 오늘까지 살아왔다.그러니 오늘, 아들 앞에서는 울지 않을 것이다. 축하만 해 줄 것이다. 고마워만 할 것이다.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썰어 먹어야지. 우리는 또, 잘, 살아갈 것이다.오소희 님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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