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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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각자의 산사, 하나의 연등

혼자 통영에 간 적이 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엔 언제나 그랬듯 무작정 걸었다. 나는 심각하게 방향 감각이 부족해 모르는 길에선 모든 걸 운에 맡기는 편이다. 그 길이 나를 데려가는 곳의 유의미함 정도는 그저 내 운의 능력이거나 한계인 셈이다. 걷다 보니 산이 나왔고 등산로가 시작됐다. 등산로는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주사위를 던지는 마음으로 나는 오른쪽을 택했다. 삼십 분 정도 산길을 오르니 아주 작은 산사가 나타났다. 약수라도 마실 겸 절 안으로 들어가자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색색의 연등이 보였다. 늦봄의 초파일 무렵 내걸린 뒤 미처 수거 되지 않은 연등들이었을 것이다. 연등에는 가족 건강이나 시험 합격, 사랑과 결혼의 결실 같은 누군가의 염원이 연의 꼬리 같은 종이에 적혀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바람의 방향대로 하늑거리는 그 염원들을 올려다보는 게 좋았다. 

 

대웅전으로 옮겨 가자 중년 여성 두 명이 목탁 소리에 맞춰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웅전 바깥에 서서 나는, 절대자 앞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절하는 사람들의 염원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도 다른 누군가를 위한 간절한 마음이 배어 있을 염원…….

 

절을 나와 다시 걸었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불현듯 가슴 한쪽이 아파 왔다. 내 삶이란 게 고작 안온한 실내에서 건너다본 창밖의 풍경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가로 살며 그 풍경을 최대한 섬세하게 그리고 예의를 갖춘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애써 왔지만 어쩌면 그 문장은 본질적으로 표면만을 훑은 가짜 심연인지도 몰랐다. 나의 염원은 연등이 된 적 없었고, 내가 다른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한 기억은 너무도 먼 과거에 멈춰 있었다. 나는 다치고 싶지 않았고, 다치지 않기 위해 세상과 사람들에게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낯선 도시의 작은 산사에서 나는 녹슬었으나 거짓은 없는 거울을 들여다본 셈이다.

 

K(케이)시에 다녀오고 두 계절이 지난 뒤 H(에이치)를 알게 됐다. H는 아침에 일어나서, 그리고 잠들기 전에 내게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 무엇을 먹는지,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는지 알려 주고 내 끼니를 묻기도 했다. 나는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해 자주 생각했고 하루에 한 번 이상은 큰 소리로 웃었다. H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그 바람이 너무 간절해서 소설을 위한 문장은 도무지 떠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는 오롯이 H의 것이 된, H만을 위해 쓴 문장은 삭제한 그 편지를 H의 허락을 받아 이 지면에 남긴다.


어느 해 가을엔가

가 본 적 없는 산길을 혼자 걸었습니다. 

 

걷다 보니 작은 산사가 나왔죠.

그토록 작은 산사에도 

물빛 허공엔 연등이 내걸려 있었습니다. 


누군가,

너무도 구체적인 삶을 사는 사람,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해지고 때 탄 연등들 

수없이 물려주고 물려받은 

아기의 배내옷처럼 

생명의 빛 

 

내 몫의 지구가 회전을 하여

하늘과 땅의 위치가 뒤바뀐다면 

연등은 물 위를 떠다니는 

꽃잎처럼 보일까요. 

이 세계의 유일한 실재 

 

내 염원은 한 번도

연등이 되어 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표면만을 앓은 대가인 듯 

 

행복인지 불행인지

왜 웃고 우는지 

그런 것을 곰곰이 헤아리지 않고도 

내 몫의 지구는 무탈하게 생활했고 

나는 그 안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물이 되는 하늘에 발을 담그곤 했습니다. 

희생을 각오하는 절박한 염원이란 늘 이기적이었고 


아침과 밤마다 인사를 해 주고

늘 끼니를 묻는 

친구의 현현, 

자주 위아래 구분 없이 굴러다니는 내 방 앞에

도달한 선물 


늘 당신의 행복을 빕니다. 비록

가장 아프게 무너지는 순간이 

길 위에 있더라도 

언젠가는 도달할 

각자의 산사 

하나의 연등


다가올 모든 순간에 대해

낮은 자세로 

나는 당신의 행복을 빕니다. 


조해진 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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