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좋은님 에세이] 아파트 터줏대감
2018.02.09   조회수 : 583    댓글 : 0개

우리 엄마는 이십 년째 아파트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이삿짐 차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바깥에 지키고 서서 몇 동 몇 호에 누가 왔는지 확인하고야만다. 일일이 신경 쓰기 피곤하지도 않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했다.

 

“피곤하긴. 일평생 이렇게 살았는데.”

그건 그렇다. 초등학생 시절 가장 뚜렷하게 기억나는 엄마의 모습은 베란다에서 내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봐 주던 것이다. 내 등굣길과 하굣길에는 엄마의 시선이 따라다녔다.

다리가 불편한 엄마는 베란다 의자에 앉아 바깥 구경 하는 걸 좋아한다. 그런 엄마에게 난 ‘우리 동네 공식 스토커’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 엄마는 별명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평생 쓸모없을 줄 알았건만, 엄마의 스토커 기질 덕에 옆집 할아버지는 목숨을 건졌다.

혼자 사는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분주하게 집을 나서곤 했다. (물론 이 사실 역시 엄마를 통해 알았다.) 그리고 일주일에 절반은 술에 취해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왔다. 매번 자정이 넘어서야 들리던 노랫소리가 그날은 어째서인지 초저녁에 났다.

 

“이상하네. 이렇게 빨리 들어오는 분이 아닌데.”

난 별걸 다 신경 쓴다고 타박했지만 엄마는 굴하지 않았다.

 

“저 집은 누가 가끔씩 들여다봐 줘야 해. 어르신 혼자 사시잖니?”

이십 년 전만 해도 우리 아파트는 이웃간의 정이 꽤 끈끈했다. 그러나 한 집 두 집 동네를 떠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낯선 이들의 터전이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 집만큼은 한자리를 지켰다. 비록 살가운 교류는 끊겼지만 엄마는 계속 이웃들을 살폈다.

“어디서 탄내가 나는 것 같은데. 옆집 아니야?”

엄마가 급히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정말 탄내가 훅 들어왔다. 나는 ‘저녁 준비하다 뭔가 태웠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옆집이 이상하다며, 할아버지가 술에 취하면 집에서도 시끄럽게 노래를 부르는데 오늘은 안 들린다고 했다.

엄마는 굳게 닫힌 옆집 현관문을 재차 확인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머, 어떡해!”

다급한 목소리에 복도로 나갔다. 옆집에서 지독한 냄새와 함께 연기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고가 분명했다. 엄마가 급하게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얼른 119에 신고했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문을 열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아랫집 소녀는 실핀을, 위층 아저씨는 문고리를 부수기 위해 삽을 들고 왔다.

구급 대원이 도착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간 거실은 뿌연 연기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콜록거리며 하나둘 자리를 떴다. 한데 엄마는 할아버지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한다며 물수건을 코에 대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났을 거란 말에 엄마는 “더 빨리 들여다봤어야 하는데…….다 내 잘못이야.” 했다.

 

그렇지만 모두 알 것이다. 엄마가 아니라 나와 다른 이웃들의 무관심이 더 야속하다는걸.

그날부터 아파트 통로가 제법 시끌벅적해졌다. 이 집 저 집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잦아졌다.

옆집 할아버지와는 여전히 잘 지낸다.

종종 우리 집에 뻥튀기와 양갱을 가져다주곤 한다. 어느 날은 아들 식구까지 데려와 고맙다고 인사하며 한우를 선물했다.

할아버지는 지금도 가끔 술을 마시고 들어온다. 하지만 그날처럼 술에 취해 라면 물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잠들지는 않는단다.

 

김하늘 님 | 인천시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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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새로운 마을new
2018.02.09   조회수 : 562    댓글 : 0개
성북동 주민 센터에서 ‘마을 코디네이터’로 일한 지 삼 년째. 나에게 ‘이만 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루에 이만 걸음 걷는다는 뜻이다. 동네 구석구석 다니며 소외된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주민들이 모여 만든 ‘마을 계획단’과 함께마을 가꾸는 일을 한다. 마을 계획단 덕에 성북동엔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그중 ‘미니 정원 만들기’ 사업이 있다.한 주민이 쓰레기로 뒤덮인 공터나 자투리땅에 꽃과 나무를 심어 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모두 제집 앞을 먼저 꾸미고 싶어 해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서로 소통하면서 꼭 필요한 곳부터 가꿔 나가기로 했다.버스 정류장 앞 화단에 꽃을 심을 때는 주변 상인들까지 나와 쓰레기 정리,가지치기를 도왔다.유난히 무더웠던 지난여름엔 길가 자투리땅에 정원을 만들었다. 먼저 그곳에 쌓인 쓰레기를 치웠다. 무려 트럭 두 대 분량. 주민들은 땀 흘리며 일하는우리를 보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한 할머니는 시원한 간식 사 먹으라며만 원을 쥐여 주기도 했다.깨끗해진 땅에 꽃을 심고 물을 주니 몰라보게 달라졌다.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나던 길이 어느새 걷기 좋은 길로 바뀌었다.가장 달라진 것은 마을 계획단에 참여한 주민들의 마음이다. 그동안 소원했던 주민들이 함께 꽃을 심고 난 뒤에는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처음엔 문을 두드리기도 어려웠지만, 이젠 집에 이웃을 초대해 마당에 돗자리를 깔고 찐 감자와 미숫가루를 나눠 먹는다.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에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도 한다.하루는 여든에 가까운 단원 할머니가 아들에게 보내려던 문자 메시지를 실수로 단체 채팅방에 올렸다. “마을 계획단에 열심히 참여하는 게 일상의 큰 활력이 된다.”라는 내용이었다. 할머니의 진심이 전해져 모두 뿌듯했다.함께하는 주민들이 있기에 나도 더욱 힘을 내 일한다. 마을은 시골에만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서울 도심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 성북동에서는 주민이 주민을 만나면서 새로운 마을이 만들어지고 있다.박예순 님 | 마을 코디네이터
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오 나의 슈퍼new
2018.02.09   조회수 : 568    댓글 : 0개
이사한 지 어언 일 년이 지났다. 이곳은 내가 초등학생 때까지 이모네가 살았던 동네다.일 년에 한두 번씩 들른 기억이 난다.당시 이모네는 차 한 대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좁은 골목에 있는 벽돌집이었다. 산으로둘러싸여 어릴 땐 이모가 시골에 사는 줄 알았다.십오 년이 지난 지금 이 동네에는 높은 아파트와 흰색 건물이 잔뜩 들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것들도 있다. 목욕탕과 제과점 그리고 슈퍼다. 편의점이 아닌 슈퍼. 특히 우리 집 앞 현대슈퍼는 내가 이 동네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다.이사 온 첫날, 물을 사러 슈퍼에 갔다. 문을 열자마자 작은 종이 울리며 내가 왔음을 알렸다. 주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사 왔구먼.” 하며 단박에 내가낯선 사람임을 알아챘다. 며칠 뒤 들렀을 땐 할머니가 있었다.“할아버지가 말한 그 처자구먼. 새로운 동네에서 잘 살길 바랄게요!”우리 가족을 반겨 주는 것 같았다.슈퍼는 늘 새벽 다섯 시에 문을 열고, 자정에 닫는다.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셔터를 올리고 내리는 드르륵 소리가 난다. 이건 단골만 아는데, 아침잠이 없는 할머니가 새벽에 문을열면 할아버지가 오전 아홉 시쯤 나와 바통을 이어받는다. 열두 시에 할머니가 점심밥을챙겨 나오면 같이 식사하고 번갈아 자리를 지킨다. 저녁 일곱 시에 저녁을 먹은 다음 할머니가 먼저 들어가서 자고, 자정까지 가게를 보던 할아버지가 셔터를 내리면 슈퍼의 하루는끝난다.지난여름, 온 동네가 정전이 됐다. 안 그래도 열대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였다.엄마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하나둘 슈퍼로 모여들었다.슈퍼 할아버지가 마을 이장님처럼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전력 공사에 전화를 걸어 사실을 알렸다. 사람들은 기술자가 올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한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함께 더위를 견뎠다.요즘엔 슈퍼에 가기 망설여질 때가 있다. 택배 때문이다. 이사 온 후 처음 택배를 시켰는데 한참이 지나도 안 오는 거다. 이상하다 싶어서 연락하니 ‘현대슈퍼에 맡겼다.’고 했다.맡겨 달라 한 적도 없는데 왜 거기에 있는지 의아했다.“택배가 여기 있다고 해서요.”슈퍼에 가서 얘기하자 할아버지가 자연스럽게 말했다.“저기서 찾아가.”할아버지는 손으로 택배함을 가리켰다. 거기엔 택배가 이미 수북이 쌓였다. 아파트처럼경비실이 따로 없어 받는 사람이 부재중일 때 다들 이곳에 택배를 맡긴다고 했다. 우리 동네의 암묵적인 규칙이다.믿을 만한 곳이라 안심되지만, 택배만 달랑 가져오기가 그렇다. 뭐라도 사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마땅한 게 없다. 그래서 갈 때마다 과자 한 봉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사 온다. 가장 덜 머쓱하게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다.어느덧 자정에 셔터 내리는 소리는 잘 시간을 알려 주는 알람이 됐고, 새벽 다섯 시에문 여는 소리가 나도 더 이상 잠을 깨지 않는다.가끔은 슈퍼에 들어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얼마 전엔 할아버지가 할머니 속을 꽤나 썩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은 집에 가는 길에 미처 다 듣지 못한할머니 이야기를 마저 들어야겠다.최수희 님 | 경기도 고양시
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내가 본 최고의 엄마new
2018.02.09   조회수 : 559    댓글 : 1개
야생의 초식 동물들은 새끼를 낳으면 그들이 두 다리로 일어서서 젖을 찾아먹도록 응원한다.일어나지 못한다고 해서 부축하거나 몸을 숙여 젖을 물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육식 동물들은 새끼들이 젖을 떼면 직접 사냥할 수 있도록 작은 동물을 잡아다 놓고 훈련을 시킨다.조류도 새끼들의 날개가 여물 때까지만 돌보다가 독립을 시키는데 이때 날지못하는 새끼에게 매우 냉정하다.동물만 그러한가. 옛날 부모들은 아이들을 강하게 키우려고 노력했다. 동물의세계와 똑같았다. 어디 부모뿐인가, 마을 사람들도 함께 키워 주었다. 잘못을 보면 꾸짖어 아이들을 단단하게 키우는 데 한몫을 했다.세상이 많이 변했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을 어화둥둥 품에 안고 키운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면서.나는 초등학교 교사로 삼십팔 년간 근무하다 명예퇴직을 했다. 삼십팔 년이 만만한 세월인가? 퇴직한 지 어느덧 구 년째에 접어들지만 생각과 행동은 아직도학교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있다.식당에서 뛰는 아이를 붙들고 ‘얘야, 먼지 나니까 뛰지 마라. 그러는 것 아니다.’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아이를 보면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예의를 지켜야지. 그러지 마렴.’ 하고 가르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고 온몸이비틀린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참는다.처음부터 이렇게 비겁했던 건 아니다. 퇴직하고 금방은 사명감을 가지고 애들을 가르쳤다. 그랬더니 부모들이 야단이었다.“웬 참견입니까. 우리 아이 기죽이지 마세요.”마을 사람들이 함께 키운 아이들은 묵은 전설이 되었다. 그래서 나도 바뀌고말았다.식당에 아이들이 있으면 멀리 자리 잡고 앉았다. 공공장소에서 애들이 떠들면외면하고 그들이 갈 때까지 기다렸다.이런 답답한 세태를 나만 느꼈겠는가?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 앞날이 캄캄하다고 한탄한다. 그러면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한 엄마 때문이다. 내가 만난 최고의 엄마.몇 년 전 일이다. 케이티엑스(KTX)를 탔는데 통로를 사이에 두고 젊은 엄마와어린 아들 둘이 앉아 있었다. 엄마도 책을 읽고 네다섯 살쯤 된 아이들도 책을 읽는 중이었다.그림책을 금방 다 읽은 아이들은 몸을 비틀었다. 나는 그 순간 ‘아, 조용히 여행하기는 틀렸구나.’ 하고 조마조마했다. 큰아이가 화장실을 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다녀오라고 했다. 큰아이가 가자 작은아이도 따라갔다.이쯤에서 나는 그 엄마를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다른 엄마들 같으면 큰아이부터 화장실에 데리고 왔다 갔다했을 텐데 그녀는 무심히 책만 읽었다.화장실에 다녀온 두 아이는 몸을 더욱 비틀었다. 큰아이가 또다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엄마가 책에서 눈을 떼더니 엄하게 말했다.“방금 다녀왔잖아.”“오줌 마렵단 말이에요.”작은아이도 덩달아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탁자에 신문지를펼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너희 운동화 잠깐 벗어 봐.”“…….”아이들은 운동화를 벗어 신문지에 올려놓았다. 끈이 달린 운동화였다. 엄마가운동화 두 켤레의 끈을 모조리 풀었다.“자, 아까처럼 운동화 끈을 한번 꿰어 볼까?”나는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두 아이는 열심히 운동화 끈을 꿰기 시작했고 엄마는 다시 책을 읽었다. 아이들 운동화는 작아서 아무래도 끈을 꿰기가 더어렵다. 하지만 두 아이는 집중해서 끈을 꿰고 잘못 꿰면 다시 풀어 나갔다. 그 모습이 퍽 즐거워 보였다.내가 만난 가장 지혜로운 엄마였다. 책 읽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 준 것만도 훌륭한 교육이다. 기차 안에서 조용하도록 기지를 발휘한 건 또 어떤가. 아이들이흥미를 가질 만한 놀이를 만들어 심심할 틈 없게 해 주었다. 운동화 끈을 꿰면서아이들의 소근육도 자극되니 그처럼 좋은 일이 없다.내릴 무렵 엄마는 신문지를 치우고 탁자를 닦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본 엄마의 지혜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내 가슴속에 감동으로 남아 있다.우리나라 오천만 명의 인구 중에서 지혜로운 엄마가 어디 그녀뿐이겠는가?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곳곳에 그녀 같은 엄마가 많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소중애 님 | 동화 작가
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25년의 원동력
2018.01.08   조회수 : 1,803    댓글 : 2개
사실 처음 공채를 통과했을 때만 해도 나는 성우에 대해 잘 몰랐다. 방송국에서 작가, 엠시(MC), 리포터 등 닥치는 대로 일하다 성우 시험을 봤고 덜컥 붙었다. 합격은 무척 기뻤으나 막상 연수를 받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만반의 준비를 한 동기들과 비교해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연수 기간 동안 받은 단골 질문은 “왜 성우가 되었나?”였다. 동기들의 답은 절절했다. “네 살 때부터 성우가 꿈이었다.” “대기업 회장 비서직을 그만두고 삼 년을 준비한 끝에 붙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쩌다 보니 성우가 되었다.”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나 또한 성우가 평생 꿈이었다는 거짓말 뒤에 숨어 속을 끓였다.드디어 사원 출입증을 받고 성우실에 입성하는 날, 동기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우울했다. 방송에 투입되면 분명 나의 모자람이 들통날터라 자신이 없었다. 결국 사표를 내기로 마음먹었다.성우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배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와라.” “축하한다. 드디어 시작이네?” “여기 좀 앉으렴.”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뜨면 길거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 언니, 오빠의 모습인데, 눈을 감으면 여기저기서 멀더, 스컬리, 사오정, 짱구, 영심이가 말을 건넸다.그 엄청난 매력과 강렬함에 얼이 빠져 눈만 껌뻑대는 내게 샤론 스톤이 말했다. “어머, 우리 막내가 긴장한 모양이구나? 호호.” 그제야 나는 성우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았다. 성우는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이 담긴 삶을 단지 목소리 하나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나는 사표를 안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지금은 아니다. 한번 제대로 배워 보자. 사표는 그다음에 던져도 늦지 않다.’ 그렇게 성우라는 길에 올라섰고 25년이 흘렀다. 가끔 질문을 받는다. 지금까지 성우를 계속한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그때마다 떠오른다. 25년 전, 성우의 본질을 온몸으로 느꼈던 그 생경한 소리의 충격이. 그리고 덧붙인다. 어떤 직업이든 본질을 온전히 느끼고 이해하면 그 힘으로 오래 달릴 수 있다고.박형욱 님 | 성우
이달의 좋은생각
[좋은님 에세이] 눈이 내리면 어머니가 온다
2018.01.08   조회수 : 2,254    댓글 : 2개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고등학교에 가는 줄 알았다. 한데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리니 형을 불러 나를 데리고 서울로 가라고 했다.내 고향은 버스가 하루 세 번 다니는, 신작로에서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외진 동네였다. 세 가구뿐인 주민은 한 가족같이 어울려 지냈고, 병풍처럼 둘러 싸인 산은 계절마다 먹을 것을 풍성하게 내주었다. 그래서 순박한 마음과 넉넉한 정을 지니고 살았다. 그 정겨운 곳을 떠나야 한다니. 아버지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읍내에 나가 표를 끊어 왔다. 동네 형, 누나들은 무척 아쉬워했다.서울로 가기 전날 밤, 툇마루에는 보따리들이 나와 있었다. 어머니는 콧잔등에 얼음이 맺히는 것도 모른 채 분주했다. 내겐 눈길도 주지 않고, 무얼 물어봐도 시큰둥하게 말하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아쉬움에 쉬이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 한껏 들뜬 어머니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오메, 이것이 뭔 일이다냐. 아따 겁나게 내려브네이.” 방문을 여니 굵은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당에 선 어머니를 눈사람으로 만들 기세였다. 눈이 발목까지만 쌓여도 버스가 다닐 수 없는데, 그날은 토방을 다 덮을 만큼 내렸다. 어머니는 보따리에 싼 음식이 상하겠다고 푸념하면서도 목소리는 밝았다. 서울로 가는 날은 보름이나 미뤄졌다. 그간 나는 어리광 부리며 어머니 냄새를 맘껏 맡았다.함박눈을 맞으며 자식을 며칠 더 품을 수 있는 기쁨에 들떴던 어머니. 지금도 눈이 내리면 그해 겨울 어머니의 모습이 내 가슴을 두드린다.우정광 님 | 대구시 남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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