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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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25년의 원동력

사실 처음 공채를 통과했을 때만 해도 나는 성우에 대해 잘 몰랐다. 방송국에서 작가, 엠시(MC), 리포터 등 닥치는 대로 일하다 성우 시험을 봤고 덜컥 붙었다. 합격은 무척 기뻤으나 막상 연수를 받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만반의 준비를 한 동기들과 비교해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연수 기간 동안 받은 단골 질문은 “왜 성우가 되었나?”였다. 동기들의 답은 절절했다. “네 살 때부터 성우가 꿈이었다.” “대기업 회장 비서직을 그만두고 삼 년을 준비한 끝에 붙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어쩌다 보니 성우가 되었다.”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나 또한 성우가 평생 꿈이었다는 거짓말 뒤에 숨어 속을 끓였다.

 

드디어 사원 출입증을 받고 성우실에 입성하는 날, 동기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우울했다. 방송에 투입되면 분명 나의 모자람이 들통날터라 자신이 없었다. 결국 사표를 내기로 마음먹었다.

 

성우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배들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서 와라.” “축하한다. 드디어 시작이네?” “여기 좀 앉으렴.” 나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뜨면 길거리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 언니, 오빠의 모습인데, 눈을 감으면 여기저기서 멀더, 스컬리, 사오정, 짱구, 영심이가 말을 건넸다.

 

그 엄청난 매력과 강렬함에 얼이 빠져 눈만 껌뻑대는 내게 샤론 스톤이 말했다. “어머, 우리 막내가 긴장한 모양이구나? 호호.” 그제야 나는 성우가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알았다. 성우는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이 담긴 삶을 단지 목소리 하나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표를 안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지금은 아니다. 한번 제대로 배워 보자. 사표는 그다음에 던져도 늦지 않다.’ 그렇게 성우라는 길에 올라섰고 25년이 흘렀다. 가끔 질문을 받는다. 지금까지 성우를 계속한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그때마다 떠오른다. 25년 전, 성우의 본질을 온몸으로 느꼈던 그 생경한 소리의 충격이. 그리고 덧붙인다. 어떤 직업이든 본질을 온전히 느끼고 이해하면 그 힘으로 오래 달릴 수 있다고.

 

박형욱 님 | 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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