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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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게으름과 집요함의 대결

신랑은 게으르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왜 오늘 하는가?’가 그의 태도다. 게으르다는 나의 평가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 수많은 사례를 열거할 수 있지만 굳이 세상에 대놓고 자랑할 거리는 되지 못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여느 부부처럼 나는 그의 게으른 태도를 바꿔 보려고 무던히도 싸우다 번번이 장렬하게 실패했다.  

 

지난해 초, 신랑의 게으름에 집요하게 맞서는 이를 만났는데 A(에이) 보험 회사의 K(케이) 사원이었다. 그의 집요함은 마치 날카로운 창과 같아 신랑의 게으름 방패를 수도 없이 찔렀다. 그는 나처럼 쉬이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K 사원의 집요한 덫에 덜컥 물린 건 나였다. 신랑의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의 영업 전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신랑은 보험료가 연체되어 새로 가입하는 편이 나은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신랑은 게을렀다. K 사원이 수없이 전화해도 만나지 않았고, 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넘어오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중에.” 어쩔 수 없이 가입 제안서를 받고 이해도 되지 않는 설명을 들어야 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집에 가져온 가입 제안서는 텔레비전 리모컨처럼 방에서 굴러다니기만 할뿐, 신랑의 손까지 가지 못했다. 그래도 K 사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노력은 눈물겨웠고 가열했고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노력이 뜨거워질수록 신랑은 여전한데 나만 점점 괴로워졌다. 신랑이 빨리 보험에 가입하기를 K 사원만큼이나 열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봄여름 내내 신랑을 열심히 겁주고 또 구슬렸다.

 

그 정성이 신랑의 마음에 닿은 걸까? 팔월의 마지막 날, 신랑과 K 사원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날이 결전의 날이 된 건, 보험 회사는 6개월 단위로 나이를 측정하기 때문에 9월부터 보험료가 10퍼센트 인상된다는 K 사원의 조언과 나의 닦달 때문이었다. 신랑과 나는 그와 마주 앉아 두어 시간 동안 설명을 들었다. 신랑은 힘들어했고 질문에만 대답하길 요구했고 본론에만 집중하길 원했지만, K 사원은 극도로 친절했고 사설이 길었고 잡다한 정보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오늘로 이 모든 여정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들떠 있었다. 그의 긴 설명이 끝났을 때, 신랑의 대답은 간단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젠장! 6개월을 생각했는데, 또 생각을 한다니. 아들이라면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다.

 

“자기야, 그냥 가입해.” “뭘 그냥 가입해? 20년이나 내야 하는데. 잘 알아보고 해야지.” 어이가 없었다. 퍽이나 알아보겠다. 내가 보험 얘기를 하면 갑자기 “모기가 들어왔나? 또 왱왱댄다.”라며 농으로만 받아치던 사람이.

 

“내일이면 10퍼센트 인상된다잖아. 나이도 있는데 보험료만 더 오르지, 빨리 가입할수록 좋은 거야.” “솔직히 이 보험은 보장 내용이 나랑 안 맞아.” K 사원과 나의 공로를 무너뜨리는 한 방. 하지만 K 사원은 끝까지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꼭연락 달라고 부탁한 후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쓸쓸했다. 그리고 난 한없이 허무했다. 그동안 뭘 위해 공들인건가? 신랑의 게으름을 잘알면서 잠시 과소평가한 건아니었나?

 

신랑은 카페를 나오면서 여유롭게 얘기했다. “어휴, 내게 별로 필요한 보장도 아닌데 왜 그렇게 들라고 했어? 이제 연락 오면 딱 잘라서 말해.” 더 이상 대거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난 그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그래, 당신이 이겼다. 좋겠다,게을러서. 좋겠다, 여유로워서.”

 

그렇게 신랑이 이기는 걸로 게임은 종료된 줄 알았다. 적어도 가을까지는. 10월의 마지막 날, 뜸하던 K 사원에게서 다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결전의 날 이후 완곡하게 신랑의 뜻을 전했기에 K 사원이 포기한 줄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2차전의 포성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내년에 새로 출시될 보험 내용이 기가 막히다며, 신랑이 여름에 보험을 안 든 게 오히려 다행인 듯싶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아.” K 사원은 다시 일어선 거다. 그의 집요함을 잠시 얕보았다. 그는 더욱 단련되었는지 전화를 끊은 후, 바로 바로 보험 상품들을 문자 메시지로 보냈다. 나는 반복되는 진동음을 들으며 혼잣말을 했다. “유 윈(You Win, 당신이 이겼다)!”

 

2차전의 서막이 밝았지만 그 둘은 다시 만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결이 끝나지 않는 이상, 이 게으름과 집요함의 대결에서 누가 이길지 모를 일이다. 단지 신랑은 게으름에서 이겼고 K 사원은 집요함에서 이겼는데 나만 실컷 두들겨 맞고 녹다운되었다. 신랑은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K 사원은 계속 전화한다. 신랑과 얘기해 보았느냐고.

 

하여 난 새해를 맞으며 결심한다. 내 일이 아닌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 함부로 신랑의 태도를 바꾸려는 만용은 부리지 않겠다. 그건 내 일이 아니야(It’s not my business)!

 

이미경 님 |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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