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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마루] 게으름과 집요함의 대결
2018.01.04   조회수 : 1,530    댓글 : 3개

신랑은 게으르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왜 오늘 하는가?’가 그의 태도다. 게으르다는 나의 평가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 수많은 사례를 열거할 수 있지만 굳이 세상에 대놓고 자랑할 거리는 되지 못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여느 부부처럼 나는 그의 게으른 태도를 바꿔 보려고 무던히도 싸우다 번번이 장렬하게 실패했다.  

 

지난해 초, 신랑의 게으름에 집요하게 맞서는 이를 만났는데 A(에이) 보험 회사의 K(케이) 사원이었다. 그의 집요함은 마치 날카로운 창과 같아 신랑의 게으름 방패를 수도 없이 찔렀다. 그는 나처럼 쉬이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K 사원의 집요한 덫에 덜컥 물린 건 나였다. 신랑의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의 영업 전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신랑은 보험료가 연체되어 새로 가입하는 편이 나은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신랑은 게을렀다. K 사원이 수없이 전화해도 만나지 않았고, 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넘어오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중에.” 어쩔 수 없이 가입 제안서를 받고 이해도 되지 않는 설명을 들어야 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집에 가져온 가입 제안서는 텔레비전 리모컨처럼 방에서 굴러다니기만 할뿐, 신랑의 손까지 가지 못했다. 그래도 K 사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노력은 눈물겨웠고 가열했고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노력이 뜨거워질수록 신랑은 여전한데 나만 점점 괴로워졌다. 신랑이 빨리 보험에 가입하기를 K 사원만큼이나 열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봄여름 내내 신랑을 열심히 겁주고 또 구슬렸다.

 

그 정성이 신랑의 마음에 닿은 걸까? 팔월의 마지막 날, 신랑과 K 사원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날이 결전의 날이 된 건, 보험 회사는 6개월 단위로 나이를 측정하기 때문에 9월부터 보험료가 10퍼센트 인상된다는 K 사원의 조언과 나의 닦달 때문이었다. 신랑과 나는 그와 마주 앉아 두어 시간 동안 설명을 들었다. 신랑은 힘들어했고 질문에만 대답하길 요구했고 본론에만 집중하길 원했지만, K 사원은 극도로 친절했고 사설이 길었고 잡다한 정보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오늘로 이 모든 여정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들떠 있었다. 그의 긴 설명이 끝났을 때, 신랑의 대답은 간단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젠장! 6개월을 생각했는데, 또 생각을 한다니. 아들이라면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다.

 

“자기야, 그냥 가입해.” “뭘 그냥 가입해? 20년이나 내야 하는데. 잘 알아보고 해야지.” 어이가 없었다. 퍽이나 알아보겠다. 내가 보험 얘기를 하면 갑자기 “모기가 들어왔나? 또 왱왱댄다.”라며 농으로만 받아치던 사람이.

 

“내일이면 10퍼센트 인상된다잖아. 나이도 있는데 보험료만 더 오르지, 빨리 가입할수록 좋은 거야.” “솔직히 이 보험은 보장 내용이 나랑 안 맞아.” K 사원과 나의 공로를 무너뜨리는 한 방. 하지만 K 사원은 끝까지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꼭연락 달라고 부탁한 후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쓸쓸했다. 그리고 난 한없이 허무했다. 그동안 뭘 위해 공들인건가? 신랑의 게으름을 잘알면서 잠시 과소평가한 건아니었나?

 

신랑은 카페를 나오면서 여유롭게 얘기했다. “어휴, 내게 별로 필요한 보장도 아닌데 왜 그렇게 들라고 했어? 이제 연락 오면 딱 잘라서 말해.” 더 이상 대거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난 그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그래, 당신이 이겼다. 좋겠다,게을러서. 좋겠다, 여유로워서.”

 

그렇게 신랑이 이기는 걸로 게임은 종료된 줄 알았다. 적어도 가을까지는. 10월의 마지막 날, 뜸하던 K 사원에게서 다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결전의 날 이후 완곡하게 신랑의 뜻을 전했기에 K 사원이 포기한 줄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2차전의 포성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내년에 새로 출시될 보험 내용이 기가 막히다며, 신랑이 여름에 보험을 안 든 게 오히려 다행인 듯싶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아.” K 사원은 다시 일어선 거다. 그의 집요함을 잠시 얕보았다. 그는 더욱 단련되었는지 전화를 끊은 후, 바로 바로 보험 상품들을 문자 메시지로 보냈다. 나는 반복되는 진동음을 들으며 혼잣말을 했다. “유 윈(You Win, 당신이 이겼다)!”

 

2차전의 서막이 밝았지만 그 둘은 다시 만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결이 끝나지 않는 이상, 이 게으름과 집요함의 대결에서 누가 이길지 모를 일이다. 단지 신랑은 게으름에서 이겼고 K 사원은 집요함에서 이겼는데 나만 실컷 두들겨 맞고 녹다운되었다. 신랑은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K 사원은 계속 전화한다. 신랑과 얘기해 보았느냐고.

 

하여 난 새해를 맞으며 결심한다. 내 일이 아닌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 함부로 신랑의 태도를 바꾸려는 만용은 부리지 않겠다. 그건 내 일이 아니야(It’s not my business)!

 

이미경 님 |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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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유지호
2018.01.06
삭제
천성을 바꾼다는 것이 만용님을 알지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게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저도 올 한해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보고자 다짐해 봅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coms333
2018.01.06
다른 사람의 성격을 개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주변에 저도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친구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서로 터치 안하니까 친구로서 더 오래가네요.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홍종호
2018.01.31
삭제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닌가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너무나 게으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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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그 많은 노심초사 덕에
2018.10.10   조회수 : 304    댓글 : 0개
한창 꽃이 핀 시절에는 날이 추웠다. 아카시아꽃이 추운 날씨를 못 견디고너무 빨리 져 버린 통에 꿀벌 치는 사람들이 울상이었다. 봄 같지 않은 봄 때문에 즐겁지가 않았다. 짧은 장마 끝에 타는 가뭄이 너무 길었다. 한낮엔 맨 흙바닥에 발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세상천지가 펄펄 끓었다. 여름은 너무 여름 같아괴로웠다. 일망무제로 높고 넓어진 가을 하늘을 기대했건만 장마 같은 장대비가 하루가 멀다 하고 퍼붓는 통에 온 집 안이 눅눅했다. 눅눅한 방바닥에 개미들이 떼 지어 출몰했다. 개미를 쓸어 내며 울고 싶어졌다. 날씨만 놓고 보면 올해는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리 행복하지 못한 날들이 이어진 것 같다.그칠 것 같지 않던 비가 뚝 그친 어느 날을 틈타 기습적으로 김장 무씨를 넣고 김장 배추 모종을 했다. 씨와 모종들은 비가 너무 안 와도, 너무 많이 와도안 되는지라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건지,안 오기를 바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날이 이어졌다. 그리고 비는 어김없이 장대비로 쏟아졌다. 무씨는 썩을 수도 있고 배추 모종은 그 뿌리가 일어나서 해 나는 어느 날엔다 말라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나의 우려와는 다르게 비 그친 어느 날 무씨는 딱 내가 심은 그만큼씩 돋아나고 배추 모종은 가늘디가는 실뿌리를 착근하게 땅에 내리고 그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을 품새로 늠름하다. 왈칵 눈물이 날 지경이다.시골에 이사 와서 작은 텃밭을 일구고 씨앗을 땅에 넣을 때마다 사실은 그런 비슷한 노심초사를 했다. 이 작은 씨앗에서, 지금은 어떤 형태도 상상할 수없는 조그만 먼지 혹은 부스러기 같은 물체에서 어떻게 그 풍성한 초록 잎이,그 장대한 줄기가, 그 튼실한 열매가 생겨날쏘냐, 긴가민가해진 것이다. 의심이라면 의심이고 불안이라면 불안인 그런 심사는 그 조그만 씨앗들에서 싹이 터흙 위로 삐죽삐죽 올라와 줄 때에야 눈 녹듯 사라진다. 그동안에 나는 오늘은싹이 텄나, 안 텄나, 자고 일어나면 밭으로 내달렸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모든씨앗은 딱 내가 뿌린 만큼 올라왔다. 올라와서 벌레나 새한테 제 몸을 내준 것말고는 언제나 나의 씨앗들은 난 만큼 정확하게 커 주었다. 그러고는 햇빛과바람과 물의 힘만으로도 내게 천둥 같은 기쁨을 안겨다 주었다. 내가 보탠 것은 오직 노심초사뿐이었는데도.시장에 가서 깜짝 놀랐다. 지난한 봄과 여름을 생각하면 시장에 흠집 하나없는 노오란 배, 윤기 흐르는 붉은 사과, 탱글탱글한 포도가 어떻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싶어서다. 나는 지레 포기했다. 올해는 과일 같은 것은 먹어 볼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시장에는 작년이나, 재작년이나 똑같이 과일 장수는 과일을팔고 채소 장수는 채소를 팔았다. 농부들은 어떻게 저 채소들을, 저 과일들을시장에 내놓을 수 있었을까.나는 이따금 학교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 놀란다. 아, 저 많은 아이를, 저 아이들만큼이나 많은 부모가 기르고 있구나, 부모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기르고 있겠구나. 그리고 나도, 내 동무도, 지금의 어른도, 그 어른의 어른도 다 그렇게 누군가의 수고로 길러져서 아이가 어른이 되었구나. 새삼스러워져서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올 때가 있다. 자연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코끼리도, 원숭이도 그 어미 혹은 가족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어른이 된다. 그어미들의 노심초사의 나날이 아기 코끼리, 아기 원숭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다.시장에 나온 저 채소, 저 과일 하나하나가 다 농부의 노심초사에 다름 아님을 알겠다. 내가 농사를 지어 보니 알겠다. 예전에 우리 어머니는 내가 말썽을부리면 나중에 꼭 너 같은 자식을 낳아 봐야 당신 속을 알 거라는 말씀을 노상했다. 그때는 그 말이 듣기 싫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아이가 속을 상하게 하면 나도 모르게 우리 어머니의 그 말씀이 내 입에서도 나왔다. 어머니 말씀대로 예전의 나처럼 속을 썩이는 자식을 키워 보니 알겠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절로 크는 건 없다는 것을. 그리하여 이 세상에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은, 결국 어디선가 그리고 누군가의 끊임없는 노심초사 덕분이라는 것을.누군가의 노심초사가 아닌들 이 가을에 저 아름다운 과일들을 어떻게 맛볼 것이며 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를 어디 가서 들을 것인가. 사정이 그러하니 과일 사는 사람은 흠집 난 과일이라도 너무 타박하지 말고, 어린 사람은 어른의 잔소리에도 좀 너그러워지기를 바라는 게 그리 무리한 바람은 아닐것이다.공선옥 님 | 소설가
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행운
2018.09.07   조회수 : 1,822    댓글 : 1개
늘 반항아라는 꼬리표가 붙었던 학창 시절.나는 부모님,선생님,친구까지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아이였다.어릴 적부터 깊어진 부모님과의 갈등의 골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선생님들의 평가도 한결같았다. “길들여지지 않으려 하고,딱히 하고 싶어 하는 것도 없는 아이.”방황을 거듭하다 일본 지휘자‘오자와 세이지’가 오케스트라와 합창을 암보(악보를 외워 기억함)로 지휘하는 영상을 보았다.가슴이 뛰었다.인생에서 처음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자존감이 낮은 시기였던 탓에 내가 감히 지휘자가 될 거라는 생각은 못 했다.단지 관련 전공으로 대학을 다닐 수만 있다면 행복할듯했다.그러나 클래식 음악 작곡가인 아버지는 여자아이에게 지휘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크게 반대했고,갈등은 더욱 심해졌다.나는 서러움이 북받쳐 집을 나가고야 말았다.얼마간 친구에게 신세 지다 돌아오니 부모님은 비로소 나를 속박하길 포기한 듯했다.도전이라도 해 보자는 생각에 몰래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떨어지더라도 어차피 아무도 모르겠지.’이런 생각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화성법(작곡 또는 지휘과 입시에서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과목 중 하나)책을 펴며 가슴이 벅차올랐고 난생처음 느껴 보는 설렘에 푹 빠졌다.스스로 나의 길을 찾고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맛보게 해 주었다.스무 살,내 인생의 전환점은 그렇게 불현듯 찾아왔다.음악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지휘자로 살아간다는 것.같은 분야에 있는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으며 무리 없이 성취를 이루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나 역시 주변에 나름 긍정적이고 열심히 사는 캐릭터로 알려져 있으니 늘 든든한 지지가 함께하는 사람으로 보이리라.하지만 부모님은 소위‘엘리트 학생’을 접하는 분들이고,당신들의 가르침과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훌륭한 제자들과 나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소심했던 나는 스펀지는커녕 부모님의 힐난과 비교에 늘 상처받았다.그러던 내가 무언가에 정신없이 빠져들어 설렘을 느낀 것,그로 인해 커다란 전환점을 맞은 건 정말이지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 아닐까.진솔 님|대구MBC(엠비시)교향악단 전임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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