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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마루] 게으름과 집요함의 대결
2018.01.04   조회수 : 1,444    댓글 : 3개

신랑은 게으르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왜 오늘 하는가?’가 그의 태도다. 게으르다는 나의 평가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 수많은 사례를 열거할 수 있지만 굳이 세상에 대놓고 자랑할 거리는 되지 못하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여느 부부처럼 나는 그의 게으른 태도를 바꿔 보려고 무던히도 싸우다 번번이 장렬하게 실패했다.  

 

지난해 초, 신랑의 게으름에 집요하게 맞서는 이를 만났는데 A(에이) 보험 회사의 K(케이) 사원이었다. 그의 집요함은 마치 날카로운 창과 같아 신랑의 게으름 방패를 수도 없이 찔렀다. 그는 나처럼 쉬이 나가떨어지지 않았다.  

 

K 사원의 집요한 덫에 덜컥 물린 건 나였다. 신랑의 보험을 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그의 영업 전화에 긍정적인 반응을 한 것이 시작이었다. 당시 신랑은 보험료가 연체되어 새로 가입하는 편이 나은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신랑은 게을렀다. K 사원이 수없이 전화해도 만나지 않았고, 내가 아무리 설득해도 넘어오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중에.” 어쩔 수 없이 가입 제안서를 받고 이해도 되지 않는 설명을 들어야 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집에 가져온 가입 제안서는 텔레비전 리모컨처럼 방에서 굴러다니기만 할뿐, 신랑의 손까지 가지 못했다. 그래도 K 사원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노력은 눈물겨웠고 가열했고 존경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노력이 뜨거워질수록 신랑은 여전한데 나만 점점 괴로워졌다. 신랑이 빨리 보험에 가입하기를 K 사원만큼이나 열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봄여름 내내 신랑을 열심히 겁주고 또 구슬렸다.

 

그 정성이 신랑의 마음에 닿은 걸까? 팔월의 마지막 날, 신랑과 K 사원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날이 결전의 날이 된 건, 보험 회사는 6개월 단위로 나이를 측정하기 때문에 9월부터 보험료가 10퍼센트 인상된다는 K 사원의 조언과 나의 닦달 때문이었다. 신랑과 나는 그와 마주 앉아 두어 시간 동안 설명을 들었다. 신랑은 힘들어했고 질문에만 대답하길 요구했고 본론에만 집중하길 원했지만, K 사원은 극도로 친절했고 사설이 길었고 잡다한 정보가 많았다. 하지만 나는 오늘로 이 모든 여정을 끝낼 수 있다는 생각에 다소 들떠 있었다. 그의 긴 설명이 끝났을 때, 신랑의 대답은 간단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젠장! 6개월을 생각했는데, 또 생각을 한다니. 아들이라면 머리라도 쥐어박고 싶었다.

 

“자기야, 그냥 가입해.” “뭘 그냥 가입해? 20년이나 내야 하는데. 잘 알아보고 해야지.” 어이가 없었다. 퍽이나 알아보겠다. 내가 보험 얘기를 하면 갑자기 “모기가 들어왔나? 또 왱왱댄다.”라며 농으로만 받아치던 사람이.

 

“내일이면 10퍼센트 인상된다잖아. 나이도 있는데 보험료만 더 오르지, 빨리 가입할수록 좋은 거야.” “솔직히 이 보험은 보장 내용이 나랑 안 맞아.” K 사원과 나의 공로를 무너뜨리는 한 방. 하지만 K 사원은 끝까지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꼭연락 달라고 부탁한 후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이 쓸쓸했다. 그리고 난 한없이 허무했다. 그동안 뭘 위해 공들인건가? 신랑의 게으름을 잘알면서 잠시 과소평가한 건아니었나?

 

신랑은 카페를 나오면서 여유롭게 얘기했다. “어휴, 내게 별로 필요한 보장도 아닌데 왜 그렇게 들라고 했어? 이제 연락 오면 딱 잘라서 말해.” 더 이상 대거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난 그저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그래, 당신이 이겼다. 좋겠다,게을러서. 좋겠다, 여유로워서.”

 

그렇게 신랑이 이기는 걸로 게임은 종료된 줄 알았다. 적어도 가을까지는. 10월의 마지막 날, 뜸하던 K 사원에게서 다시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결전의 날 이후 완곡하게 신랑의 뜻을 전했기에 K 사원이 포기한 줄로 굳게 믿었다. 하지만 2차전의 포성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내년에 새로 출시될 보험 내용이 기가 막히다며, 신랑이 여름에 보험을 안 든 게 오히려 다행인 듯싶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아.” K 사원은 다시 일어선 거다. 그의 집요함을 잠시 얕보았다. 그는 더욱 단련되었는지 전화를 끊은 후, 바로 바로 보험 상품들을 문자 메시지로 보냈다. 나는 반복되는 진동음을 들으며 혼잣말을 했다. “유 윈(You Win, 당신이 이겼다)!”

 

2차전의 서막이 밝았지만 그 둘은 다시 만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대결이 끝나지 않는 이상, 이 게으름과 집요함의 대결에서 누가 이길지 모를 일이다. 단지 신랑은 게으름에서 이겼고 K 사원은 집요함에서 이겼는데 나만 실컷 두들겨 맞고 녹다운되었다. 신랑은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K 사원은 계속 전화한다. 신랑과 얘기해 보았느냐고.

 

하여 난 새해를 맞으며 결심한다. 내 일이 아닌 일에 끼어들지 않겠다. 함부로 신랑의 태도를 바꾸려는 만용은 부리지 않겠다. 그건 내 일이 아니야(It’s not my business)!

 

이미경 님 | 극작가

 


 

댓글 (3)

유지호
2018.01.06
삭제
천성을 바꾼다는 것이 만용님을 알지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게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저도 올 한해 여유를 가지고 사람들을 바라보고자 다짐해 봅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coms333
2018.01.06
다른 사람의 성격을 개조(?)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가 봅니다. 주변에 저도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친구가 있는데 신기하게도 서로 터치 안하니까 친구로서 더 오래가네요.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홍종호
2018.01.31
삭제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닌가봅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너무나 게으릅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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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마가렛과 오동나무
2018.07.09   조회수 : 1,302    댓글 : 1개
지난해 겨울이었다.“겨울에 차를 더 자주 마셔요. 달걀도 많이 먹고요.”장작 난로 위 낡은 주전자에서 물이 끓고 있었다. 다른 계절에는 물 끓이는 전깃값이 아까워 차도 달걀도 별로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이미 날이 충분히 저물었다.“왜 불을 안 켜세요?”“아직 볼 만하잖아요.”나는 답답했지만 조금 더 참아야 했다.안방에는 혼자 누울 자리에만 전기담요가 자리 잡고 있었다.“지난 추위에 하수도가 얼어 버렸어요. 수리비가 많이 들어 봄까지 기다리기로했어요. 봄이 오면 막힌 관이 뚫리겠지요. 난 겨울이 좋아요.”옷은 늘 비슷하거나 같다. 의자에 걸어 둔 옷을 한번 들어 보았더니 생각보다훨씬 무거웠다.“장수 읍내 시장에서 만 사천 원에 샀어요. 참 따뜻해서 좋아요.”처음 만났을 때 값이 조금 나가는 목도리를 선물로 내밀었다.“가져가세요. 이런 비싼 건 불편합니다. 시장에서 산 오천 원짜리 목도리가 너무 편하고 좋습니다.”나는 포장도 뜯지 못한 채 그대로 들고 돌아왔다.그녀는 ‘사랑’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못하게 한다. 사랑의 숭고함 때문이기도하지만 자신이 아직도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란다.그녀는 우리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진주에서 귀한 외동딸로 태어났다. 간호 학교를 거쳐 간호사로 독일에 갔다. 그곳 병원에서 온갖 힘들고 궂은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밝았다. 그러고는 그곳의 한국인과 결혼을 했고, 2남 1녀를 두었고, 식당을 차렸고,내친김에 조그만 호텔까지 운영했다. 잘되었다. 아니 잘했다. 아니 무조건 열심히 했다.어느 날, 파란만장한 자신의 과거와 호텔과 모든 자산을 정리하고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장수군의 한 나지막한 마을 언덕에조그만 집과 사과밭을 마련했다.“사과 농사는 다른 사람이 짓고 있는데 한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사과나무에 약을 치면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어느덧 여름이 왔다. 일흔이 넘었지만 갈수록 몸이 좋아지고 있다. 마당가에 하얀 마가렛이 무리 지어 피어 있다.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어쩌면 저렇게 예쁘냐며 눈을 떼지 못한다. 제법 큰 오동나무 한그루도 그늘을 넓고 짙게 펼치고 있다.그녀는 내가 쓴 《사랑의 인사》를 무척 좋아한다. 날마다 하나씩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글을 썼냐’고 묻고 또 물었다. 그러면서스스로 대답했다.“정 선생과 내가 같은 경험을 많이 했나봐요.”그러면서 여러 번 이렇게도 말했다.“이 책에 더 이상 손대면 안 돼요. 더 이상나올 게 없고 나올 필요도 없어요. 깊은 마음을 글로 꺼내 놓은 거예요. 따뜻하게 끌어내 주었어요.”겨울 어느 날, 친구 직원과 장수에 갔을때였다.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그녀얼굴이 빨갰다.“오늘은 정 선생이 와서 그런지 얼굴이 빨갛네요?”“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정 선생한테 안 좋아요.”말은 부드러웠지만 냉엄한 경고였다. 얼굴이 빨개진 건 난로 때문이었지만, 잘못된 칭찬은 사람을 버린다는 뜻이었다.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넋을 잃는다. 그런중에도 나는 한마디도 놓칠 수 없다. 한마디한마디가 명언이고 지혜다.“말이 중요하다, 언어가 정확해야 한다.”“어지러운 세상 내가 감수하면 자유로워진다.”“정치는 말 공장이다. 멀리하라.”“쉬운 것은 늘 도움이 안 된다.”“자기가 하는 것만큼 남도 그럴 줄 안다.”“겨울을 좋아하면 추위를 이길 수 있다.”“좋다고 생각하면 자기 것이 된다.”“부족함이 많다고 느끼기에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집중했기 때문이다.”“모든 것이 내 삶이다. 불편해하지 말자.”“몸을 움직여라. 그러면 스스로 치유된다.”그녀는 《사랑의 인사》 1만 5천 207부,「좋은생각」 24만 부 이상을 교도소, 다문화 가정, 문해 학교, 초·중·고 교사와 학생 등에게 어떤 조건도 부담도 없이 보내주었다.내가 물었다.“한두 번은 몰라도 어떻게 이렇게 꾸준히 하세요?”“두 분의 아버지가 보고 계시잖아요. 육신의 아버지와 영원한 아버지.”그녀를 두고 대단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숭고하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아름답다고 하면 어떨까? 아마 이 말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자신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높이면 불편해하기 때문이다.자연스럽다. 그녀는 그냥 그렇게 산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하고 있고, 그렇게 살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충만한 기쁨이다. 생명력이다.비단 박순련 님뿐이겠는가? 좋은님 한 분 한 분이 이렇게 살고 있다. 그들은 좋은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이상도 도덕도 양심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산다. 원래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조용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 내는 것이다. 무엇이 이보다 더 소중하고 아름답겠는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정용철 「좋은생각」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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