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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오늘의 만남> 산책

작성일2025년 09월 05일

 



 

아무래도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나 보다. 나가서 같이 걷자는 아버님의 말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따라나섰으니. 아이의 여름 방학을 맞아 잠시 시댁에 내려간 우리 식구는 오랜만에 거하게 외식했다. 가족 중 나 말고는 선뜻 따라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걷는 내내 아버님의 끝없이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잠자코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각오가 필요하다.

그날도 아버님은 집을 나서자마자 이미 아흔여덟 번쯤 반복한 레퍼토리를 꺼냈다. 나는 이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네.” “아.” “정말요?”를 적절히 돌려 가며 추임새를 넣기로 한 것이다. 너무 많이 들어서 외울 지경이지만, 이제는 내게도 아버님의 이야기를 ‘취향에 안 맞는 배경 음악’ 정도로 여길 수 있는 관록이 생겼다.

“내가 예전에 ‘배희길’이라는 만화가 밑에 잠깐 있었다 아이가.” “네.” “선 긋고, 지우개질 하고, 허드렛일이 하도 많아가 이기 사람 할 짓인가 그캤지.” “아.” “그래가 어느 날 못 견디고 도망쳐 나왔다 아이가.” “정말요?”

이런 식이었다. 아버님의 얘기에 답하는 사이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아버님도 이에 질세라 두 번째 단골 레퍼토리를 꺼냈다.

“내가 예전에 서울에서도 살아 보고, 부산에서도 살아 보고, 전국에 안 살아 본 데가 없는데 여기만 한 데가 없다 아이가.” “네.” “여기만치…… 헉, 낙동강이 바로 앞에 있고… 헉헉…….” “아.” “앞뒤로 산 있고…… 헉헉, 공기 좋고…헉헉…….” “정말요?” “근데, 어미는…… 잘 걷네. 헉헉.”

아버님은 비 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려 이따금 말을 멈추면서도 걸음을 늦추진 않았다.

“조금 천천히 걸을까요? 근데 그러면 운동 효과가 별로 없을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으은지(아니). 어미 걸음이 딱 좋다. 헉헉, 계속 이렇게 걷자…….”

어느새 우리는 칠곡보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언제 과식했냐는 듯 말끔히 소화가 된 상태였다. 다만 아버님의 이야기가 끊긴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물론 우리 둘 중 누구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글 | 송아람 일러스트레이터

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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