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옛사랑> 정글짐보다 좋았던
작성일2025년 06월 05일

초등학생 시절, 운동장 구석에 설치된 정글짐을 좋아했다. 정글짐 속 무수한 정사각형은 내게 온갖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곳은 밀림이었다가 감옥이 되고, 비밀 기지 속 사다리였으며, 때론 로봇의 조종간이 되어 내게 악당을 물리칠 기회를 선물해 주기도 했다.
어떤 상상 속 놀이든 그 끝은 하늘과 닿은 맨 꼭대기였다. 나는 정글짐 꼭대기에서 아무것도 붙들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럴 줄 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신나게 놀다가 꼭대기에 올라서서 멀리 또 높이 보았다. 보이는 것은 나의 완전한 세계였다.
그날은 그럴 수 없었다. 서 있기는커녕 다소곳이 앉아서 학교 현관에서 운동장으로 이어지는 곳을 보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내 생일이었다. 반 친구들을 초대했고, 그중에는 너도 있었다. 다들 흔쾌히 응했지만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아도 좋지만 너는 꼭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누구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뛰어나가 정글짐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게 보이니까. 네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교문은 하나뿐이니까, 너는 보일 거였다. 교실에서는 말을 걸 수 없었지. 아이들이 놀릴 테니까. 운동장에서라면 나는 슬쩍 네 옆으로 갈 수 있을 거였다. 가서 생일 파티에 올 수 있느냐고 물어볼 거였다. 그러면 네가 대답하는 것을 잊었다고, 얼른 집에 가방을 내려놓고 너희 집으로 가겠다고 대답해 주겠지. 그런 기대가 나를 기쁘게 했다.
봄. 더없이 맑은 날의 토요일. 나는 좋은 계절에 태어났구나. 크고 작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교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너를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너는 보이지 않았다. 초조해지고 초조해지다가, 울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다. 곧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올 텐데. 다들 선물을 들고 나를 기다릴 텐데. 운동장의 아이들은 드물어지고 너는 오지 않고. 그러다가 마침내 너를 보았다. 나는 단숨에 내려가 너에게 달려갔다. 그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작은 새처럼 콩닥거렸던 심장 박동은 지금도 선하다. 나는 너를 정글짐보다 좋아했다.
유희경 님 | 시인
사진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