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나의 글쓰기> 어느 카피라이터의 고백
작성일2025년 05월 21일
직업이 카피라이터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은 기대한다. 내가 빠른 시간 안에 호흡이 짧은 글을 척척 써낼 거라고. 잘라 말하건대 명백한 오해다. 물론 세상의 카피라이터들 중에는 순발력과 재치가 넘치는 이도 분명히 있겠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런 부류가 아니다. 광고하고자 하는 브랜드의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뽑아내서 짧은 분량으로 압축하는 훈련이야 누구보다 잘 되어 있으나 내게는 늘 시간이 필요하다. 긴 글을 써 내려가는 시간보다 응축하고 다듬는 데 훨씬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며 일하기 일쑤인 광고 회사에서 늘 원하는 만큼 시간을 들여 카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백하건대 작은 팁들이 없을 리 없다. 중요한 한 줄을 써야 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때 나는 ‘낙차’를 생각한다. 단어와 단어 사이의 낙차.
물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물은 A(에이) 지점에서 B(비) 지점으로 흐른다. A와 B 사이의 높낮이 차이가 거의 없다면 물은 아주 천천히 흐를 것이다. 낙차가 클수록 물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그것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우리는 폭포라고 부른다.
똑같은 일이 문장 안에서도 일어난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도 낙차가 있다. 자주 붙어 다니는 단어 사이엔 낙차가 없다. ‘아름다운’과 ‘얼굴’ 같은 단어가 만나면 그 조합은 당연해 보인다. 편안하지만 귀에 걸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름다운’에 ‘악몽’ 같은 단어가 붙으면? 잘 만나지 않던 단어의 합이기에 나도 모르게 쳐다보게 되는 힘이 있다. 놀라움이 있다. 낙차가 있는 단어를 붙여 보자. 이것이 빈손으로 아이디어 회의에 들어갈 뻔한 나를 몇 번이나 구해 준 나만의 ‘낙차 이론’이다. 영업 비밀을 이렇게 공개하는 게 과연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책 한 권을 쓴 작가라고, 서점에서 잘 팔리는 책을 만나면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한다. 많은 이에게 사랑받은 베스트셀러 제목에는 분명 남다른 매력이 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 제목의 매력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 등장하는 ‘떡볶이’에서 온다.《 언어의 온도》라는 제목의 힘은 그동안 ‘언어’라는 단어에는 잘 붙지 않던 ‘온도’라는 말의 낯섦 덕분이고,《 책은 도끼다》에서는 ‘책’과 ‘도끼’ 사이의 간극에서 오는 신선함에서 시작된다.
단어의 낙차. 지금도 짧고 힘 있는 문장을 써야 할 때면 늘 염두에 두는 기술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광고 일을 하면서 기술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판단 기준이 있으니, 그것은 ‘본질’이다.
어느 정도의 기술은 필요하겠지만, 기교에 의존하는 문장은 쉽게 질린다. 부사와 형용사에 의존하는 문장은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빈약함이 금방 드러난다. 유행에 올라타는 글들은 유행이 유효할 때는 매력적이지만, 유행이 사라짐과 동시에 힘을 잃기 쉽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폭발적으로 사랑받던 시절, 수많은 광고 문구가 “그 어려운 걸 제가 해내지 말입니다.”라는 유행어를 패러디 했다. 당시에는 재미있고 세련되어 보였지만, 지금 다시 보면 분명 그때의 느낌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내가 지금 써야 하는 문장이 오래 두고 빛을 발해야 하는 것, 가령 한 기업의 슬로건이라면 나는 기교를 빼고 담백한 방향으로 적겠다고 다짐한다. 경험에 비추어 봤을때 그래야 오래도록 질리지 않는다.
반면 내가 지금 써 내려가는 문장이 잠깐 휘발되고 사라질 용도라면 유행에 올라타든 의성어와 의태어에 의존하든 크게 개의치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책의 제목이라면, 그 책이 잠깐 폭발적으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오랜시간을 두고 사람들에게 사랑받길 원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선수를 교체하는 감독의 심정으로, 말 잘하고 시끄러운 목소리를 살짝 뒤로 물리고, 생각 깊고 신중하지만 위트 있는 목소리를 앞에 세운다.
노자의 《도덕경》에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구절이 있다. 가장 뛰어난 기교는 오히려 소박하고 수식이 없는 것이라는 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다.
나 역시 사람이라 당장 튀는 제목을 붙여 많은 이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냐마는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기교보다는 본질.”
저자 | 유병욱 님 / 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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