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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오늘의 만남> 연애편지의 방향성

작성일2025년 04월 01일


 

얼마 전에 서른여섯이 되었을 뿐이니, 사실 옛사랑이라 부를 만한 것은 없다. 다 그럭저럭 최근 사랑이다. 그마저도 그립거나 애틋한 사람 같은 건 남지 않았고 서로가 서로를 빨리 잊는 쪽이 건강할 것 같은 파국이었다.

후회되는 게 있다면 사방팔방에 연애편지를 너무 많이 뿌렸다는 것 정도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 누군가 집요하게 그 편지들을 발굴해 서간집을 내면 어쩌나, 가끔 최악의 상상을 해 본다. 그런 일을 실제로 당한 과거의 작가들이 있기에. 제인 오스틴의 언니가 동생의 편지들을 불태운 것은 얼마나 현명했던가? 정말이지 연애편지는 첩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읽고 나면 불쏘시개로 쓰지 않는 한 위험한 듯하다. 어딘가 잠자고 있을지 모를 편지들에 대해선, 이제 와 자동 발화를 바랄 수도 없으니 애초에 모두 버려졌기만을 빈다.

그렇지만 스물 몇 살의 언젠가, 깊은 밤 스탠드를 켜 두고 편지를 쓴 기억 자체는 즐겁게 남았다. 길게 쓰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꼭 한 장에 압축했고, 오자가 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쓰기 위해 조용한 시간을 택했다. 얇은 편지지만큼이나 미술관에서 파는 두껍고 커다란 엽서도 좋아했다. 머릿속에서 스물다섯번쯤 쓴 다음에야 손으로 적었다. 연필이 적합할 때도, 검은색으로 보이는 짙은 초록색 펜을 택할 때도 있었다. 부드럽고 잔여물이 남지 않는 볼펜이나 기분 좋게 종이를 긁는 만년필도 자주 썼다. 편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헤어질 쯤엔 상대방의 앞날에 구구절절한 축복을 하곤 했다. ‘당신이 되어야 할 것이 되세요, 가능성을 꽃피우세요, 가고자 하는 곳에 가닿으세요.’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한 게 아닐까. 아무도 내게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으니.

만약 그 나이의 내가 경제적으로 조금 더 안정되고,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 더 존중받고, 길거리를 다니는 것이 안전하게 느껴졌다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한 편지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최근이다. 젊고 가난하고 매일 상처받아야 했고 불안했기에 풍덩풍덩 관계에 뛰어든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러니 연애편지를 자주 쓰는 사람이라면 편지에 쓰는 말들을 스스로에게도 들려주면 좋겠다. 옛사랑을 그리워하듯이 지난 나이의 자신을 편안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정세랑 님 소설가
사진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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