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좋은생각 7월호 맛보기> 내 안의 주홍글씨
작성일2024년 09월 13일
<내 안의 주홍글씨>
내 주변에는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많다. 별다른 가정사도 없고 형편도 넉넉한 집안. 사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고등학생 무렵,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알코올에 중독됐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서 나와 동생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동시에 생계까지 책임졌다.
그 희생으로 의대에 들어갔지만, 적응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사는 동네로 무시를 당하기도 했고, 한번은 돈을 벌어야 해서 동아리 합숙을 빠진다고 했다가 거짓말한다며 폭언을 듣기도 했다. 병원 인턴 면접 날, 부모님의 직업을 들은 교수의 반응은 내 착각이라 믿고 싶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점점 예민해졌다. 정신 건강 의학과를 전공했지만 집안 이야기가 꺼려졌고, 알코올 중독 남성 환자를 보면 화가 났다.
그런 나를 치료해 준 건 오히려 환자들이었다. 스스로 원해서 그렇게 된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연민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집안 이야기를 꺼내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환자들의 정신 건강을 돌보는 의사가 건강하지 못한 정신을 가졌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러다 어느 책에서 와닿는 구절을 발견했다. 서자 출신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힌 인물에게 주인공이 말했다. “네가 선택한 일도 아닌데, 주변 사람들이 서자라는 말만 해도 화를 내니 참으로 못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로 내가 선택한 일도, 저지른 일도 아닌데 뭐가 그렇게 부끄러웠을까.
나는 이제 당당하다. 힘든 시간을 뚫고 각자 훌륭하게 자리잡고 살아가는 우리 가족이 자랑스럽다.
노현재 님 | 서울시 마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