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좋은생각 6월호 맛보기> 우리 천천히 들어가자
작성일2024년 09월 13일
<우리 천천히 들어가자>
스물여덟 봄, 결혼을 앞둔 나는 완벽한 식을 치르고 싶었다. 신부 화장과 머리 손질이 끝난 거울 속 내 모습은 꼭 공주 같았다. 새벽부터 무섭게 내리던 비까지 멈춰 마치 온 우주가 내 결혼을 축복하는 듯했다.
식이 시작되고 신랑이 입장하자 환호성이 쏟아졌다. 긴장감에 입이 마르고 다리가 저려 왔다. 곧이어 신부 입장곡 첫 소절이 울려 퍼졌다.
“딸, 우리 천천히 들어가자.”
노래에 딱 맞춰 들어가야 한다는 내 말에도 아빠는 자꾸 같은 말만 반복했다.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 문이 열렸다. 아빠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내다 뒤늦게 우아한 미소를 장착했다.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꽃길 끝 단상에서 신랑이 나를 맞이했다. 긴장한 아빠의 얼굴과 멀리서 울먹이는 엄마가 눈에 스친 것도 잠시, 나는 냉큼 신랑의 손을 잡았다. 감미로운 축가, 공중에 날리는 꽃잎, 화려한 샹들리에와 나를 바라보는 신랑의 미소…. 완벽했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니 휴대폰에 친구들이 보내 준 사진과 축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신랑과 둘이 깔깔대며 보던 그때, 가족 사진 한 장이 눈에 띄었다. 그 속에서 아빠는 주먹 쥔 손을 무릎에 올리고 군인처럼, 화난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못내 서운한 마음
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결혼식 사진에서 아빠만 인상 쓰고 있더라고. 그리고 그날 왜 계속 천천히 가자고 한 거야?” “너 넘어질까 봐 그랬지.”
아빠는 시집간 딸의 투정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받아 줬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결혼 후 집안 건사하랴, 맞벌이하며 아픈 아이 키우랴 고된 삶은 나를 끝없이 감정의 밑바닥으로 밀어넣었고 결혼 앨범을 들여다볼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어느덧 또다시 결혼기념일이었다. 창밖의 예쁜 풍경은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따뜻한 햇살이 내리던 봄날에 결혼했는데, 그날 나 참 예뻤는데.
오랜만에 결혼 앨범을 꺼내 들자 축의금 봉투가 쏟아져 나왔다. 무심히 줍다 아빠의 글씨가 적힌 봉투를 발견했다.
‘딸, 결혼 축하해. 아빠는 네가 좀 더 천천히 갔으면 했는데…. 살면서 힘들 때마다 아빠가 언제나 뒤에 있다는 거 잊지 마.’
눈물이 핑 돌았다. ‘아, 그래서였구나. 아빠는 행진이 끝나면 딸에게 고단한 삶이 펼쳐질 것을 알았구나. 언젠가 딸에게 위로를 주고 싶어 여기 이렇게 마음 한구석 남겨 뒀구나.’ 그날 울지도 웃지도 못한 아빠의 속내를 진즉에 헤아리지 못한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애교 없는 딸내미는 아빠에게 속마음은 꺼내지 못한 채 투정만 늘어놓는다. 아빠라면 다 알아줄 거라는 어처구니없는 믿음으로.
“아빠, 오는 길에 단팥빵 하나만 사다 주면 안 돼? 고로케도. 식지 않게, 바삭하게!”
오늘도 한 번 더 철없는 막내딸 노릇을 하려 한다. 백발의 아버지가 조금 더 천천히 늙길 바라며.
장민정 님 | 경기도 광주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