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한비야의 뜨겁게 몰두했던 순간들> 일기장아, 올해도 잘 부탁해
작성일2026년 01월 22일

“예쁜 공책이요!”
어릴 때부터 생일이든 어린이날이든 누가 무슨 선물 사 줄까 물으면 이렇게 말했다. 비싸고 좋은 것도 갖고 싶지만 번번이 이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나 또한 적극적으로 예쁜 공책을 산다. 초등학생 때는 알토란같이 모은 용돈을 털어 그 비싼 일제 공책을 샀고, 세계 일주 여행 중에는 눈썹도 빼고 갈 만큼 짐을 가볍게 꾸렸지만 예쁘고 특이한 공책을 보면 눈 딱 감고 샀다. 지금도 대형책방에 가면 아무리 바빠도 공책 코너는 꼭 둘러보고 여행 기념품으로 사 오는건 십중팔구 공책이다. 그렇게 알뜰살뜰 모은 공책을 꺼내 놓고 새해에는 어느것부터 쓸까, 고민하는 것이 나만의 즐거운 새해맞이다.
이 예쁜 공책 욕심은 순전히 일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표지 디자인과 모양과 크기가 맘에 드는 공책에 일기를 쓰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해마다 새해 첫 날, 제일 맘에 드는 공책을 골라서 첫 장, 첫 줄에 1월 1일이라고 날짜를 적고 첫 문장을 쓸 때 드는 그 경건함과 긴장감은 늘 처음인 양 새롭다.
일기 쓰기! 이게 새해 결심의 단골 종목인 살 빼기, 운동하기, 영어 회화, 책 읽기와 더불어 제일 많이 하는 결심이란다. 하지만 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일기 쓰는 습관이 오래전에 몸에 배어서다. 초등학교 2, 3학년을 같이한 무서운 담임 선생님은 일기 쓰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우리는 일기 쓰기 숙제를 방학은 물론 학기 중에도 해야 했다. 한번은 짝꿍이랑 서로 지난 일기를 베껴 쓰다가 걸려서 둘 다 눈물 쏙 빠지게 혼나고 교실 뒤에서 손 들고 서 있던 적도 있다. 선생님 역시, 우리 일기장에 ‘참 잘했어요’ 검사 도장만 찍는 게 아니라 꼼꼼히 읽어야만 할 수 있는 소감을 한마디씩 적어 주셨다.
나도 처음에는 하기 싫어서 온갖 잔꾀를 부리며 마지못해 했는데 자꾸 잘 썼다는 칭찬을 받으니까 나중에는 신이 나서 열심히 썼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가정 방문을 왔을때 엄마랑 언니들 앞에서 칭찬을 해 주셔서 얼마나 우쭐했는지 모른다. 그 때문일까? 그
‘혹독한’ 일기 숙제를 같이했던 친구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는 확실히 그때 일기 쓰는 습관이 몸에 배어들었다.
질풍노도의 사춘기 때는 물론 요즘도 하루라도 일기장에 내 마음을 털어놓지 않으면 답답하고 개운치가 않다. 지금까지 쓴 백 권
도 훨씬 넘는 일기장이야말로 내 추억의 저장고이자 아이디어 창고이자 보물 1호이다.
이 글을 쓰면서 장롱 깊숙이 보관하는 지난 일기장 몇 무더기를 꺼내 살펴보았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손때 묻은 각가지 크기와 모양과 여러 나라에서 온 일기장들이 오랜친구인 양 반갑다. 가만히 보니 내 예쁜 공책 욕심은 변함없지만 일기장 취향은 하는 일과 나이에 따라 변하는 것 같다.
한때는 여행지에서 산 공책을 주로 썼다. 20권 정도의 한 무더기는 세계 여행을 하던 시기다. 밝은 초록색 헝겊 표지인 아프가니스탄 공책, 가죽에 인두로 지져 문양을 넣은 에리트레아 공책, 형형색색 구슬 장식이 아름다운 이란 공책……. 다른 무더기 공책에는 유엔(UN)이나 월드비전 등의 로고가 많다. 심지어 난민촌 아이들이 쓰다 만 파란색 유니세프 공책을 묶어 쓴 일기장도 보인다. 구호 현장에서 일하던 때다. 최근에는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이화여대 공책을 연이어 쓰고 있다.
한때는 고급스러운 다이어리도 썼지만 몇년 전부터는 단순하고 작은 스프링 노트를 사용한다. 에이포(A4) 사이즈의 3분의 2 정도
크기라야 가지고 다니기 쉽고 스프링이 있어야 그 안에 볼펜을 넣고 다니기 좋다. 요즘처럼 자꾸 깜빡할 때는 바로 적어 놓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적자생존이다!) 볼펜 찾는 사이에 뭘 적으려는지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간혹 스마트폰 메모 기능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숫자나 키워드 정도라면 모를까, 난 어쩐지 종이에다 연필로 써야만 성이 차고 생각이 정리되는 것 같다. 이것도 습관일거다.
꺼내 놓은 일기장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 몇 권의 일기장을 더 쓰게 될까? 몇 권이건 맘에 쏙 드는 일기장
이 될 것은 확실하다. 예쁜 공책 욕심이 없어질 리가 없으니 말이다. 새해를 여는 지금, 오랜 세월 내 곁에 있어 준 이 ‘예쁜’ 일기장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진다.
일기장아, 내 보물덩어리야, 그동안 고마웠어. 올해도 잘 부탁해!
저자 | 한비야님 / 국제 구호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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