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오늘의 만남> 여린 아이들이 세상을 바꾼다
작성일2025년 09월 03일
‘언고기(언어의 고수 되기)’란 이름으로 중학교 1학년 화법 수업을 했다. 8주간 실시하는 자유 학년제 수업 중 한 과목이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정리하는데 학생들이 교실로 돌아가지 않고 내 주변으로 몰려들더니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정이 들어 헤어지기 아쉬웠나 보다.
“선생님, 카카오톡 해도 돼요?” 고운 눈망울을 가진 여학생이 나에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나는 또렷하게 말하는 아이를 보고 조금 놀랐다. 말하기 수업임에도 늘 미소 지은 채 다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아이였다. 나중에서야 담임 선생님을 통해 가정 형편 이야기를 듣고 말수가 적은 이유를 알았다. 자신의 생각을 잘 꺼내지 못하는 그 아이를 보면 마음 한편이 아려 오곤했다.
누군가 내 새끼손가락을 살며시 잡았다. 수업 시간에 말을 별로 하지 않고 웃음만 띤 학생이었다. 질문을 해도 웃기만 했다. 그런데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그 모습이 평소와 달리 애처로웠다.
“선생님, 얘가 언어의 고수예요.” 뒤에 서 있던 다른 남학생이 그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남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이 언어의 고수라고요. 얘하고 쟤가 제 말을 가장 잘 들어 줬어요.” 학생이 가리킨 또 한 명의 친구는 나에게 연락해도 되느냐고 물은 그 아이였다. 다른 아이도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제야 나는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거나 어깨에 손을 얹거나 팔짱 끼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은 함께하고 있었다. 정든 사람과 헤어지기를 섭섭해할 줄 아는 아이들, 친구들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아이와 그래서 고마워하는 아이들, 서로의 손을 잡아 주고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아이들.
“약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드라마 대사가 떠올랐다. 나는 중학생은 ‘중 2병’이란 말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어른을 걱정시키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쳐 주려고만 했다.
나는 잠시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다른 이를 향해 따스한 마음을 베풀 줄 아는 저 여린 아이들이 차가운 세상을 녹일 거라는.
저자 | 문경보님 / 문 청소년 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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