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AZINE] <마음 상영관> 영원을 품은 오늘
작성일2025년 04월 29일

하루 혹은 특정 시간이 반복되는 이야기를 통칭 ‘타임 루프(Time Loop)물’이라고 부른다. ‘고리’라는 뜻처럼 이 장르의 인물들은 어느 시간의 끝과 시작이 서로 연결되어 무한 반복되는 세상을 경험한다.
1993년 개봉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은 그런 시간 반복 서사 중 가장 유명한 ‘원조 맛집’쯤 되는 작품이 아닐까한다.
주인공 필 코너스는 매사 불평불만을 달고 사는 방송사 기상 캐스터다. 그는 우리의 경칩에 해당하는 성촉절 취재를 위해 동료 제작진과 한 지방 소도시에 들른다. 해마다 2월 2일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이 행사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어 그에게는 지겹고 따분하기만 하다. 소박하고 정겨운 마을 행사를 즐기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그는 어서 취재를 끝내고 돌아가기만 바랄 뿐이다.
하지만 폭설이 내려 그와 일행은 하루 더 머물게 되고, 이튿날 아침 그는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맞이한다. 그렇게 어제가 오늘이 되고, 내일이 다시 오늘이 되는 나날을 보내기 시작한다.
나는 이 영화를 고등학생 때 처음 봤다. 중간고사가 끝난 날, 친구와 영화를 보며 나도 저런 하루를 겪는다면 어떨까 상상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때는 하루라도 빨리 입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 시간이 계속된다니 얼마나 답답한가.
“늘 지루했지. 시간아 흘러라, 흘러. 그땐 그랬지.” 그즈음 유행한 노랫말이 딱 내 심정이었다. 어서 시간이 지나 그 가사처럼 현재가 회상할 수 있는 과거로 변해 있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시간은 정말 잘 흘러갔고, 이후 인생의 여러 계절에 <사랑의 블랙홀>을 보았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보기도 하고, 디브이디를 사서 다른 때, 다른 마음으로 감상했다.
이십 대 어느 봄, 흐드러지게 핀 벚꽃 아래 서 있었던 날을 기억한다. 내 눈 안에 있는 그 사람의 얼굴도. 이런 것이 행복일까, 모든 게 완벽한 순간이었다. 심장은 두근거렸고, ‘내가 지금 진짜 살아 있구나.’ 느꼈다. 그 멋진 하루가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반복되는 하루를 끝낼 마법의 열쇠가 결국 사랑이었다면, 지금 내 손에 그 열쇠가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두렵기도 했다. ‘이 꿈 같은 하루가 순간으로 끝나면 어쩌지.’ 하고.
직장인이 되어 쳇바퀴 돌듯 하루를 보내는 시절에는 아침에 눈뜨는 순간이 제일 싫었다. 출근길 전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평생 볼 것 같아 두려웠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베개에 머리가 닿는 찰나였다. ‘밤이 계속돼 차라리 내일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었다. 그냥 계속 자고만 싶었다.
그 시기 어느 휴일 <사랑의 블랙홀>을 다시 보았다. 주인공이 한없이 부러웠다. 나에게도 반복되는 하루가 주어진다면 하고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공연도 보러 다니고, 여행도 가고, 책도 읽고, 맘껏 낮잠도 즐길 텐데. 주인공에게는 저주 같았던 무한의 하루가 당시 쉴 틈 없었던 내겐 마치 꿈의 휴가처럼 보였다.
삶의 여러 모퉁이와 고개에서 <사랑의 블랙홀>을 만났다. 그때마다 영화 내용은 당연히 그대로였다. 주연 배우 빌 머레이는 여전히 특유의 뚱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변한 건 나뿐이었다. 마치 반복되는 오늘을 겪는 주인공처럼.
때로는 그런 생각을 한다. 어떤 이에겐 반복되는 하루가 황당한 설정이 아닌 현실일 수 있다고. 누군가는 똑같은 하루하루를 사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살고 있겠지.
그래도 아쉬울 건 없다. 결국 타임 루프의 비밀을 깨달아 내일을 맞을 테니. 다행히 나도 어제에 이어 오늘을 이렇게 살고있다.
넓게 보면 <사랑의 블랙홀> 속 하루가 우리 인생 같다. 하루가 생애 전부인 하루살이에게는 이 영화가 마치 불교의 윤회나 니체가 말한 ‘영원 회귀’를 다룬 이야기일 수도 있으리라. 살면서 이 영화를 몇 번은 더 볼 듯하다.
저자 | 이동은 님 / 영화감독, 그래픽 노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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