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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5월 호 맛보기> 받아쓰기 히어로

작성일2025년 04월 10일

 

받아쓰기 히어로

  

오늘은 받아쓰기 8단계 시험을 보는 날이다. 문제를 불러 주며 1분단 맨 끝에 큰 덩치를 웅크리고 앉아 글씨를 눌러 적는 서준이를 바라봤다. 

서준이는 느린 학습자다. 한글을 다 깨치지 못해서 띄어쓰기와 줄이 표시돼 있는 받아쓰기 단계장을 보며 시험을 보곤 했는데, 6단계 시험을 보던 날에는 단계장 없이 세 개나 맞았다. 우리 모두 서준이에게 다가가 손뼉을 쳐 줬고 그는 으쓱하며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그런데 7단계 시험을 보던 날에는 어렵다며 시험 보는 내내 짜증을 부렸다. 다시 단계장을 보며 시험을 보겠느냐고 묻자 더욱 화를 냈다. 그날은 네 개를 맞았다. 지난주보다 잘했다고 칭찬했지만, 서준이는 책상에 엎드려 발을 쿵쿵대며 한참을 씩씩거렸다.

오늘 본 8단계 시험 결과를 확인하니 여섯 개나 맞았다. 놀라운 결과였다. 진심으로 기쁘고 기특해서 치켜세우며 칭찬했는데 서준이가 갑자기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교실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 찼다. 

“서준아, 왜 우는 거야? 여섯 개 맞았으면 정말 잘 본 거야.” 그래도 울며 책상을 치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을 달래다 결국 스스로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이번 시간에 공부할 주제는 ‘초능력이 생긴다면?’입니다.”

하늘을 날거나 과거나 미래로의 여행, 순간 이동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잔뜩 나왔다. 흥미로운 주제에 서준이도 울음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며 갖고 싶은 초능력을 말했다. 

“저는 시, 시간을 멈추고 싶어요.” 

“그렇구나. 시간을 멈추고 무얼 하고 싶니?” 

“수, 숙제를 하고 싶어요.” 

초능력이 생겼는데 숙제를 한다고? 서준이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교실 안에 있는 모두가 숨죽였다. 온 힘을 다해 들으려고 집중하는 순간. 이따금 찾아오는 진정한 배움의 순간.

 “숙제하는 데 시간이 너, 너무 오래 걸려요. 깜깜할 때까지 했어요. 조, 졸린 데도 엄마가 자꾸 숙제하라고 했어요. 엄마랑 집에서 시험 볼 땐 다 맞았어요. 배, 백 점이요.”

기이한 자세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눌러 쓴 공책에 다른 친구들보다 몇 배 더 단단하게 뭉쳐진 노력이 배어 있음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깜깜하고 졸린데도 포기할 수 없었던 숙제. 시간을 멈추고서라도 다 해내고 싶은 받아쓰기. 너무나 간절히 원했던 백 점.

쉬는 시간 종이 쳤다. 팔랑거리는 아이들이 뿔뿔이 교실 밖으로 나갈 때, 서준이는 상처 입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시무룩해 있었다. 

“서준아, 선생님이 너한테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을 줄게.” 

“네? 어떻게요?”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 다 집에 가면, 시간을 멈추자. 다시 연습하고 시험을 새로 보는 거야. 어때?” 

“좋아요!”

우리 둘은 방과 후에 남아 또 한 번 받아쓰기 단계장을 읽었다. 집중해서 일그러진 아이의 눈썹과 잔뜩 긴장한 어깨를 보며 드래곤볼의 ‘정신과 시간의 방’을 떠올렸다. 그래, 우리 초사이어인이 되어 보자.

드디어 재시험이 시작됐다. 서준이에게 긴장하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스멀스멀 불안이 차올랐다. 자꾸 틀렸기 때문이다. 백 점은커녕 처음 본 시험보다도 더 많이 틀리고 있었다. 

아… 불안하다. 또 화를 내고 울어 버리면 어쩌지. 눈치를 보며 채점을 시작했다. 열 문제 중 네 개를 맞았다. 눈을 질끈 감고 무슨 위로를 건네야 할지 할 말을 찾고 있는데. 

“어? 선생님! 저, 네 개 맞은 거예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이의 표정이 밝게 빛났다. 

“어, 어. 맞아. 네 개 맞았네.” 

“와, 그러면, 그러면, 아까 여섯 개고 지금 네 개니까…. 더하면 열 개죠? 

백 점이죠?” 

“어?” 

“6 더하기 4는 10!” 

“어, 그래그래! 아하하하 그러네! 맞아, 열 개. 백 점이야!” 

“와! 백 점이다, 백 점!” 

아이는 이마에 땀을 한번 쓱 닦은 뒤 내 손을 잡고 방방 뛰었다. 얇은 단계장이 펄럭거리다 책상 아래로 훌훌 떨어졌다. 그러자 아주 소중한 보물 지도라도 되는 듯 얼른 주워 가방에 넣더니 덩실덩실 춤을 추고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챙겼다. 

서준이는 두툼한 가방을 메고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한 뒤 나를 으스러질 듯이 껴안아 주고 떠났다. 그 모습이 너무 예뻐 고개를 내밀고 복도 끝에서 그가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지켜봤다. 이미 아이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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