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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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일생일대의 운

 

노력보다 운이 중요하다는 말이 싫었다. 불운한 사람의 삶을 무시하는 말 아닌가. 

 

아무리 땅만 보고 걸어도 그 흔한 오십 원짜리 하나 주울 일은 내게 없었다. 학창 시절에는 똑같이 담을 넘어도 나만 혼나기 일쑤였다. 대학 입학에도 세 번이나 좌절했다. ‘남들은 이 정도 했으면 붙었을 텐데, 운도 없지. 또 떨어지다니.’ 운이 없다고 인정하기엔 억울하니 차라리 내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이었다.

 

학교는 적응을 못해 자퇴했고, 일을 시작할 만하면 몸이 아팠다. 집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져 병원에 가서 약을 타다 먹는 일이 잦았다. 결혼을 생각했던 연인은 두 번이나 바람을 피우고 떠났다. 

 

억울했다. 나에게는 좋은 일도, 좋은 사람도 없는 걸까. 삶이 술술 잘 풀리는 이들이 부러웠다.

 

모든 걸 털어 버리고 싶어 배낭여행을 떠났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사기를 당했다. 한 달간 머물기로 약속하고 여행 전부터 방세를 입금하라고 재촉한 집주인이 연락 두절이었다.

 

그 새벽, 눈물을 꾹 참고 공항에서 초록색 여권을 든 한국인을 찾아 도움을 청해 겨우 첫날 밤을 보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일자리를 주겠다는 꼬임에 속아 또 돈을 날렸다. 영어로 설명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지만, 경찰서로 가서 사기꾼을 잡아달라고 애원했다. 경찰이 말했다. “일자리를 주는데 돈 받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돌려받지 못할 거야.”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더 무기력해지기 전에 미련 없이 다른 곳으로 떠나기로 하고 항공권을 샀다. 그러나 비행기를 놓쳤다. 렌터카를 빌려 고속 도로를 달리는 중에는 갑자기 사이드 미러가 똑 떨어져 날아갔다.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왔지만, 다시 정비소로 차를 돌려야 했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불운이 곱절이 되어 나를 감싸는구나! 그 다음은 무엇일까 궁금한 찰나, 갑자기 배가 아팠다.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자 빨리 응급실에 가라고 했다. 급성 충수염으로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 너털웃음이 났다. 그렇게 나는 프랑스 어느 작은 섬 병원의 첫 번째 한국인 환자가 되어 병상에 누웠다.

 

볼만했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엄마에게 하소연하다가 출생의 비밀을 들었다. 나를 임신하고 오 개월 된 때에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더란다. 병원에서는 임신 중이라 약도 주사도 쓸 수 없으니 아이를 포기하라고 권했다. “실명할 순 없잖아요. 아이는 다시 가지면 돼요.”

 

엄마는 며칠을 펑펑 울었다고 했다. 고민하다 다른 병원을 찾아다니길 몇 주, 한쪽 눈앞이 다시 선명해졌다. 그렇게 내가 태어난 것이다. 아뿔싸, 태어나지도 못할 운명이었다니. 운이 좋아 살았구나. 나는 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일생의 운을 배 속에서 모조리 써 버린 셈이다. 

 

왜 하는 일마다 이 모양이냐며 울먹였지만, 사실은 반대였다. 내 삶의 시작부터가 가장 큰 행운이었다.


돌아보니 고마운 일투성이다. 건강하게 밥 먹고 사는 것, 무사히 일하고 여행 다니는 것. 운 좋아 다치지 않고 돈만 잃었고, 수술 잘 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지 못할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삶의 태도가 바뀌었다. 나는 누가 뭐래도 행운아다. 불운마저 겪을 수 있게 해 준 삶에 고맙다.


전은지 님 | 인천시 남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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