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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국밥집 그리고 수련 이모 (제6회 청년이야기대상 금상)

글 정보
이름 좋은생각 편집부
작성 일시 2022년 10월 05일 10시 24분
김현숙 님 

 

스무 살 여름은 암담했다. 남들은 꽃다운 시절이라는데, 나는 참 볼품없고 초라했다. 대학생이 된 친구들은 방학 동안 여행이니 연애니 자기 계발이니 매일 바쁘게 보냈다.


나는 원하는 대학이 아닌 터라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3월 중순쯤 휴학계를 제출하고 다시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부모님에게 손 벌리기 싫어 입시 학원이 아닌 독학을 택했다. 하지만 게으르고 무기력한 생활에 발을 들여놓고 말았다. 처음엔 등을 두드리며 응원해 준 부모님도 불같이 화내며 용돈을 끊어 버렸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르바이트할 곳을 찾아야 했다. 야간 공부가 적성에 맞았던 나는 낮 동안 일할 가게를 수소문했다. 내 눈에 들어온 건 국밥집 서빙 아르바이트였다. 급하게 일손을 구하는 터라 젊고 체격이 좋은 나는 그날 바로 일을 시작했다.


낡고 좁은 국밥집은 중년의 이모가 혼자 꾸려 나갔다. 이모가 국밥을 끓이면 나는 서빙하고 설거지했다. 재료 손질과 반찬 만드는 일도 도왔다. 손님이 적었기에 일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료하게 가게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낯을 가리는 나는 이모에게 살갑게 말 붙이기가 어려웠다.

 

어느 날, 화장실에 다녀오니 이모가 보이지 않았다. 부엌 뒤쪽을 서성거리자 구석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는 이모가 보였다. 당황한 나는 발을 동동 구르

다 마음을 굳게 먹고 서럽게 우는 이모의 어깨를 안아 토닥였다.


“이모,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생긴 거예요?”


이모는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다가 이내 엉엉 울며 그동안 쌓인 걱정과 불안을 털어놓았다. “어떡하니, 장사가 안돼서 어떡해. 나는 앞으로 뭐 먹고 사니.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비참하고 초라해서 살기가 싫어.”


사실 나도 이모의 걱정과 불안을 곁눈질로 읽었다. 어려운 가게 사정에 아르바이트비를 받아도 되나 싶어 밤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으니까. 이모는 오늘은 이만 문을 닫자고 했다. “집에 가 봐. 아르바이트비는 걱정 말고. 이런 모습 보여서 면목이 없구나.” 나는 차마 앞치마를 벗지 못하고 이모 앞에서 머뭇거렸다. “왜? 괜찮으니까 가 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랑 술친구나 해 줄래? 너 소주는 마실 줄 아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는 그런 나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냥 해 본 말인데. 스무 살 애랑 술친구를 다 해 보네.”


이모는 가게 문을 잠그고 냉장고에서 소주 두 병을 꺼내 왔다. 안주는 국밥에 속이 꽉 찬 달걀말이였다. 그날 늦은 오후부터 밤까지 우리는 술친구가 되었다. 서로 몰랐던 점도 알았다. 나는 이모가 이혼하고 받은 위자료로 가게를 열었다는 것을, 이모는 내가 수능을 준비하며 용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모의 이름도 처음 알았다. ‘박수련’이었다. 내 이름은 촌스러운데 이모는 얼굴처럼 이름도 참 곱다 말하니 이모의 얼굴이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이모는 어린애가 늙은이를 놀린다고 손사래 쳤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이후로도 손님은 여전히 적었지만 우리는 웃음과 수다로 가게를 채웠다. 이모는 내게 공부하느라 힘들 테니 맛있는 걸 많이 먹어야 한다며 파전이나 떡볶이 같은 간식도 종종 해 주었다. 국밥집에서만큼은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공부에 대한 압박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행복했던 시간도 마침표를 찍었다. 이모가 결국 가게를 접는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겨울의 초입이었다.


아르바이트 마지막 날, 이모는 두 손 가득 반찬을 싸 주었다. 아르바이트비 봉투는 두툼했다. 이모는 ‘어떤 결과를 맞든 너는 반짝반짝 빛날, 미래가 탄탄대로일 멋진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다.


“너만큼 웃는 모습이 예쁜 애를 본 적이 없어. 네가 웃으면서 ‘이모.’ 하고 부르면 화병도 싹 도망갈 정도야.” 이모의 말처럼 나를 감동시킨 것은 없었다. 눈물이 흘렀다. 이모는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나는 수능에 실패했고, 휴학계를 낸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이모의 가게는 금방 다른 가게로 바뀌었다. 그 뒤로도 이모와 종종 연락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이모에 대한 기억만큼은 평생 잊히지 않을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모, 저를 기억하시나요? 이모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많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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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2023. 09. 14

    스무 살에 귀한 경험을 하셨네요. 저도 글을 읽으면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잘 읽었습니다. 

  • 최은*2022. 10. 17

    살다보면 힘든시기에 갑작스레 찾아오는 귀인들이 있더랍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생각지못하게 나타나 홀연히 사라지는 그분들덕에 힘을내고 그따뜻한 응원을 마음에 간직한채 다시금 앞을향해 갈수있도록 도와주는것만 같았어요. 그기억은 잊혀지지않은채 영원히 내마음에 작은희망으로 남아있어주어서 참 감사한것같습니다. 

  • 이건*2022. 10. 11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네요. 아르바이트 급여를 받아도 되나.. 참 마음이 따뜻하신 분 같아요. 내용 속 이모님도 어디건가 건강히, 여전히 좋은사람으로 잘 살고 계실거에요. 알바하면 그저 가기싫은 발걸음을 억지로 떼어 출근하고. 쉬는날과 월급나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기 마련인데.. 아무튼 따뜻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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