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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의 외계어(제18회 생활문예대상 대상)

글 정보
이름 좋은생각 편집부
작성 일시 2023년 06월 08일 14시 19분

남진우 님

 

10대 시절 이대(이화 여자 대학교) 앞 미용실에서 곱슬머리를 좍좍 펴 주는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는 것이 로망이었다. 

 

나는 엄마를 닮아 곱슬머리로 태어났다. 습도가 높은 날이면 구불구불한 머리가 도드라져 촌스러움이 최대치에 달했다. 고통을 호소했지만 엄마는 오히려 매력적이라는 말로 무마하며 이대 앞 떡볶이만 사 주었다.

 

엄마는 남다른 교육열을 지닌 사람이었다. 동네에 새로운 학원이 생기면 곧바로 나를 데려가곤 했다. 

 

중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집에서 혼자 빈둥거리고 있는데 엄마가 허겁지겁 들어왔다. 새로 문을 연 과학 학원에 당장 가 보자는 것이었다. 싫다고 했다가 등짝만 맞고 엄마 손에 끌려갔다.

 

도착한 학원에는 같은 반 친구와 그 아이의 엄마도 와 있었다. 친구도 나처럼 입을 삐죽거렸다. 엄마들끼리 아이들을 데리고 오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우리 엄마는 나와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엄마를 어떻게 알았을까.

 

시든 콩나물처럼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는 원장님의 질문에 의욕 없이 답하는 나를 보더니 무리수를 두었다. “원장님, 과학 성적 오르면 얘한테 ‘스트레스 파마’ 시켜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이런! 이 상황에서 스트레스 파마라니. 얼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엄마의 옆구리를 찌르며 ‘스트레이트’라고 고쳐 주었다. 엄마는 내 찌르기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스트레트? 스트레스? 그래, 스트레스!” 엄마는 마치 스트레스 파마 홍보 대사 같았다. 그러더니 친구 엄마에게도 말했다. “우리 같이 애들 데리고 이대 가서 스트레스 파마 해 줍시다.” 다급해진 나는 학원에 다닐 테니 어서 가자며 엄마의 팔을 잡아끌었다. 

 

몇 달 후 엄마의 바람대로 과학 성적이 조금 올랐다. 마침내 파마를 하러 이대 앞에 갔다. 엄마는 미용실에서도 말실수를 반복하며 스트레이트가 아닌 스트레스 파마를 주문했다.

 

하필 그날 미용실에서 뜨거운 기계를 실수로 내 볼에 대었다. 오른쪽 뺨 끝에는 지금까지 흉터가 남아 있다. 정말 스트레스 파마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 사건을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예민했던 사춘기 시절, 친하지도 않은 친구 앞에서 창피를 당한 기억 때문에 그날 이후 나는 스트레이트 파마를 하지 않았다.

 

결혼 첫해, 시어머니가 내게 요구르트를 건네며 말했다. “이걸 먹으면 ‘헬리콥터 균’을 없애 준다지 뭐니.”

 

그 순간, 돌아가신 엄마의 스트레스 파마가 기억 끄트머리에서 떠올랐다. 

 

우리 엄마뿐이 아니구나. 엄마들은 왜 그렇게 언어를 재창조하게 되었을까? 엄마들의 외계어인가?

 

시간이 흘러 나도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이름을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는 매번 다른 이름이 되었다.

 

아이들은 “으하하!” 웃음을 터뜨리기도, 황당하다며 장난기 섞인 비난을 하기도 한다. 사춘기가 와도 아이들이 이렇게 웃어 줄까? 살짝 겁난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들과 ‘엄마는 외계인’이라는 아이스크림을 고르며 생각했다. ‘엄마들은 외계인이 될 수밖에 없구나.’ 엄마들은 참 정신이 없다. 두 아이가 옆에서 재잘거리는 와중에 식사 준비부터 청소까지 모든 일을 해내야 한다. 

 

엄마는 기억에 스트레이트라는 단어를 꾹꾹 눌러 담을 시간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스트레스건 스트레이트건 중요한 게 아니었겠다. 마흔이 되어서야 엄마를 이해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엄마에게 말하고 싶다. “그래, 스트레스 파마 좀 시켜 줘.”

 

퇴근 후 아이와 휴대폰 게임을 같이하기로 했다. 오늘도 캐릭터들의 이름을 몇 번이나 잘못 부를지, 얼마나 아이에게 구박을 받을지 상상하니 웃음이 난다. 사실 엄마는 외계인이라고 수줍게 고백해야겠다.

댓글 쓰기
  • 김정*2024. 03. 20

    외계인 안 되려고 무지 노력합니다.^^
    나이가 들면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들은 휘리릭~ 스쳐 지나갑니다.
    잡을 기력도 없고요. ㅋㅋ

  • 강정*2024. 03. 17

    저도 요즘 손자한테 구박 받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그것도 몰라! 그게 아니고~~"
    역시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 이시*2024. 03. 16

    그렇구나..
    나도 엄마가 되면 그러겠지?

  • 황영*2024. 02. 13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쓰는 분의 일상은 어떨지 
    친구하고 싶은 유쾌함이 느껴집니다.
    요즘은 스트레이트라고 안하고 매직이라고 하잖아요?
    진작 나왔으면 어머님이 틀리지 않으셨을텐데 말이에요.
    아 그러면 추억이 없으려나요
    그때마다 고쳐줘도 매번 친구이름을 잘못부르던 저희 친정엄마도 그리워집니다.

  • 2024. 02. 08

  • 박건*2024. 02. 02

    새벽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 김서*2024. 01. 27

    우리 시엄니 정성스레 들기름 넣고 파기름 넣어 계란 '스크래치' 내어 아이에게 계란 볶음밥을 내어주시지요. 피자 먹을때 '피크타임' 잊지 말아요~~ (정답은 스크램블, 피클) 외계어 너무 재밌어요 ;-)

  • 환*2024. 01. 09

    그 어설픈 말 실수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음을. 

  • 정안*2023. 12. 04

    짧은 글에서도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니 놀라워요. 멋지십니다!! 

  • 박수*2023. 10. 18

    우리 엄마 생각이 나서 어쩐지 눈물이 납니다. 슬픈데 재밌고 웃긴 훌륭한 글인 것 같습니다 :)

  • 김태*2023. 09. 13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역시 대상은 필력과 내공이 상당하군요.
    -생활문예 공모 어느 탈락자의 댓글

  • 박영*2023. 08. 01

    저도 요즘 아이들앞에서 말의 앞뒤를 바꾸거나 이상한 단어를 말하곤해요... 사춘기인 두 녀석들은 저보고 엄마? 조선시대사람이야?하고 놀리네요... 비록 발음이 세기도 하고, 문장이 떠오르지않을때도 많지만, 우리 나이에 자연스런 삶의 과정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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