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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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겸손(제17회 생활문예대상 금상)

글 정보
이름 좋은생각 편집부
작성 일시 2022년 09월 08일 10시 30분
김슬아 님 

 

그 봄을 기억하는 이유는 내 생애 최고령 수험생을 만났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토익 수업에 오신 거 맞나요?”


훈자 씨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이렇게 물었다. 원래라면 친근하게 이름 뒤에 ‘씨’와 같은 존칭을 붙이며 몇 월에 있는 토익 시험을 치를 거냐고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훈자 씨에겐 그럴 수 없었다. 가끔 나보다 나이 많은 수강생을 마주하긴 했지만, 그들 중엔 훈자 씨처럼 백발이 성성한 사람도, 알이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낀 사람도 없었다. 1949년생 학생은, 1989년생 선생에겐 어딘가 조심스러운 제자였다.


훈자 씨가 듣는 수업은 새벽 6시 30분에 시작하는 ‘토익 초보 탈출반’이었다. 그녀는 늘 6시에, 심지어 어느 월요일엔 5시 30분에 어둑한 학원 입구 계단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훈자 씨는 강의실 구석 자리를 선호했다. 창문과 가장 가까운 그 자리는 문을 열어 놓으면 꽃가루가 들어와 책상에 노랗게 쌓였다. 건물 앞 대로에서 밀려드는 매연과 먼지, 이따금 낡은 방충망을 뚫고 들어오는 작은 벌레도 그 자리에 앉은 이를 괴롭혔다. 말하자면 훈자 씨의 자리는, 지금껏 누구도 앉으려 하지 않은 곳이었다.


훈자 씨는 자리가 불편하다고 내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가장 일찍 강의실에 오면서도 불편하고 더러운 자리에 앉았다. 분홍색 마스크와 보라색 꽃이 그려진 손수건으로 먼지와 싸우면서도 어색하게 쥔 연필을 놓지 않았다. 알파벳은 읽고 쓸 줄 알았지만 마지막 수업 때까지 ‘p(피)’와 ‘q(큐)’를 구분하지 못해 멋쩍게 웃었다. 나도, 다른 수강생들도 훈자 씨가 토익 수업을 듣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끝까지 묻지 않았다.

 

마지막 날, 나름 책거리랍시고 소소하게 간식 시간을 가졌다. 넉살 좋은 학생이 훈자 씨에게 물었다. “할머니, 아니, 선생님. 왜 이 수업을 들으세요?” 훈자 씨는 체크무늬 장바구니에서 초코파이 두 상자를 꺼내 학생들에게 하나씩 나눠 주며 수줍게 말했다.

 

“손주가 있었는데 매일 이거 공부한다고 그렇게 고생을 했어요. 열심히, 아주 열심히 했어요. 내가 뭐 하나 챙겨 주지도 못했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서 나도 한번 들어 보고 싶었어요.”

 

훈자 씨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어쩐지 목소리와 눈빛에서 처연함이 느껴져 누구도 더는 묻지 못했다.


며칠 후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자세한 사연을 들었다. 1년 8개월 전, 훈자 씨의 손주가 유학을 갔다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훈자 씨는 강의를 더 연장하지 않았다. 다만 정성 들인 후기를 남겼다.


“학생들이 다들 아주 열심히 열심히 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이따금 힘이 들면 그 후기를 꺼내 읽었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워야만 아는 게 있었다. 꼭 실리를 위해 익히는 일만이 학습은 아니라는 것을, 1949년생 선생님이 알려 주었다. 봄을 앞두고 생각한다. 가르치고 배우는 모든 행위에 겸손하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댓글 쓰기
  • 마리*2023. 04. 09

    조믄생각의 글들은 참감동을 줍니다
    손주를생각하며수업을 들었을어르신이 
    그시간 만큼은 행복 하셨을 꺼라생각도네요

  • 김순*2023. 04. 02

    평소 좋은생각은 내 인생 첫책이라 지침서처럼
     화장실에 비치해 두고 읽는다. 깨끗히 정화된걸
    느끼는순간, 책은 이런거지 무릎을 탁치게 한다.
    아직은 학생 신분이라 글쓰기에 미흡하지만 이런 좋은글
    을 만나면 역시 글쓰기를 위한 공부하길 잘했다 라고 스스로에게 머리통을 내어준다. 쓰담쓰담 어르신이 좋은 이유다 경험에서 나오는 행동은 그런것이다. 내 나이 62세
    아직도 학생(방송대3학년)인데 "글쓰기를 위한 공부 , 공부를 위한 글쓰기, 이것이 나의 학구열에 불을 당긴다.

  • 안정*2023. 02. 11

    눈물이 나네요. 마음을 울리는 깊은 글 감사합니다. 

  • 김현*2023. 02. 02

    댓글을 쓰고 싶은 만큼 감동적입니다. 할머니의 섬세하고 애틋한 마음이 눈물겹게 다가왔습니다. 

  • 김민*2022. 11. 30

    화이팅!!!!!!  조은글보고갑니다.
     

  • 임근*2022. 11. 16

    짧은 글이지만 많은 것을 느끼게 하네요. 먼저 떠나신 분도 할머님도 토익공부하는 학생분들도 다들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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