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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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 내 친구(제15회 생활문예대상 대상)

글 정보
이름 좋은생각사람들
작성 일시 2020년 06월 08일 09시 58분

구서영 님 




몇 달간 미국 대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강을 끼고 있는, 보스턴의 아름다운 학교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유학 가고 싶다고 노래 불렀던 나는 부푼 꿈을 안고 미국에 도착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웃고 떠들면서도 무리에 진정 속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럼, 큰딸 잘 지내지. 걱정 붙들어 매셔.” 애써 웃으며 통화를 끝낸 나는 룸메이트에게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화장실로 달려가곤 했다. 가족과 친구들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어느 날 새로 신청한 ‘말하기 연습’ 수업에서 인상적인 발표를 들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나무를 꼭 안습니다. 오늘은 나무를 잘 안아 주는 세 가지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히잡을 쓴 인도 여인은 수업에서 단연 최고령자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차분하지만 어딘가 힘이 있었다. 깊고 큰, 신비로운 눈으로 활짝 웃는 그녀는 미술관에 걸린 명화 같았다. 


다음 날 기숙사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마당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나무를 안고 있는 그녀였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러 다가갔다. 인도 전통 옷을 입은 작은 체구의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그녀가 코알라처럼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큰 나무를 감싸는 듯 보였다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친한 친구가 되었다. 엄마뻘 외국인과 친구라니, 존댓말 문화가 없는 미국에서 함께 공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를 아끼는 사람은 나뿐아니었다. 같은 수업의 교수님과 친구 모두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발표에서 부족한 점을 놀랄 만큼 예리하게 집어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말엔 따뜻함이 있었다. 우리는 노을 지는 찰스강 변에서 자전거를 타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시와 사랑에 관하여, 그녀가 듣는 연극 수업과, 그녀가 맡은 반란군 역할에 대하여. 나는 집에 온 듯한 기분에 뭉클했다.

 

시간이 흘러 미국 생활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편지와 선물을 교환하며 마지막 만찬 장소로 베트남 식당을택했다. 쌀국수를 먹으며 웃음으로 시작했지만 곧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종교 지도자 집안에서 태어난 똑똑한 소녀가 어린 나이에 정략결혼을 한 이야기였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그녀 삶의 전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집안에서 버려졌고 아이들은 남편에게 뺏겼다. 법정 다툼 끝에 매달 한 번 아이들을 면회할 기회를 얻었지만 아이들은 이미 깊이 세뇌당한 상태였다. 그녀는 유리 벽 너머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매번 사랑한다고 말했다. 언젠가 아이들을 안는 상상을 하며 매일 나무를 꼭 안아 주는 것이었다.


나는 마법에 걸린 듯 한 번도 꺼내지 못한 묵은 감정을 털어놓았다. 연약한 여자였던 엄마가 겪은, 감당하기 벅찬 누명과 세상의 배신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음이 병들어 어린 딸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원망한 내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깊이 울어 주었다. 오랜 시간을 거쳐 한 여자로서 엄마를 이해하게 된 나처럼 그녀의 딸도 언젠가 마음을 열 거라고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넬 때 나는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나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엄마에 대한 마지막 응어리가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서로를 꼭 안아 주며 나는 나보다 한 살 어리다는 그녀의 맏딸을 위해 기도했다.


우리는 지금도 종종 메일로 안부를 묻는다. 지구 반대편에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된다. 내가 그녀에게서 우리 엄마의 모습을 보았듯 그녀도 나를 보며 자신의 딸을 생각했을까. 시간에는 어떤 관계에서 기적을 일으킬 힘이 있음을 믿는다. 그날이 올 때까지 그녀가 편히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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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밀*****2022. 01. 17

    시간에는 어떤 관계에서 기적을 일으킬 힘이 있음을 믿는다. 

    굉장히 멋진 말이네요. 가슴속에 새기고 갑니다. 멋진 글을 읽고 감동을 느끼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 해운****2021. 03. 22

    제가 중국에서 어학연수할때가 생각나네요.저도 엄마였고 연수원동기들이 제 아들딸벌이었죠.
    지금은 정말 아름다운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요.특히 같은방 룸메이트였던 화정이가 생각나네요.
    조금비정상이라고 아무도 같이하지않았지만 저와는 2달내내 엄마와 딸이아닌 친구로 지냈거든요.
    외국에가니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 제주***2021. 02. 15

    참 좋은 어머니 같은 분을 만나서 항상 긍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이 인생의 개척길이라 생각합니다.
    멋지고 좋은 글에 감사드림니다.
    대전 유성 지족동에서 
    사학연금 수급자 김광진/제주몽생이 드림

  • ㅇ ***2021. 02. 04

    소수의 약자들이 세상과 어울려 웃울수 있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모두와 어울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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