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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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양복(제8회 생활문예대상 대상)

글 정보
이름 좋은생각사람들
작성 일시 2020년 01월 08일 19시 15분

신지윤 님

 

 

 

이상하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리도 멍했다. 뒤숭숭한 집안 분위기 때문인 듯했다. 설거지한 다음 옷장에서 안 입는 옷들을 꺼내 상자에 집어넣었다.


검은 털이 달린 모직 망토, 누군가에게 얻은 자주색 가죽 반코트, 너무 얇아 몸매가 드러나는 게 부담스러운 니트, 나이에 맞지 않는 옷, 입을 일 없을 것 같은 청바지, 식구들의 구두와 운동화도 꺼내 놓았다.


며칠 전 마트 가는 길에 보고 저장해 둔 전화번호를 눌렀다.


“네. 뭐든지 가져갑니다. 겉옷, 속옷, 이불, 신발, 카펫, 가방. 20킬로 이상 모아 놓으면 좋고요. 1킬로에 삼백 원씩 쳐 드립니다.”


어차피 누군가 가져가서 잘 쓰면 그만인데 돈까지 준다니, 게다가 직접 옮기지 않아도 되니 참 편리한 일이었다. 그동안 정리할 엄두를 내지 못한 건 5층에서 들고 내려가는 게 힘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상태가 어떻든 무조건 가져갑니다.”라는 말이 조금 미심쩍었다.


“물건들을 가져다 어떻게 쓰시는데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 수출합니다. 여기서 보내면 그분들이 다시 손봐서 파니까 상관없고요. 삼백 원은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겁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내 옷을 골라 놓고 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남편에게 상자를 현관 쪽으로 옮겨달라고 했다. 다시 보면 원래 있던 자리로 가져다 둘 것 같아서였다. '20킬로가 될까?' 갸우뚱하다 남편에게도 안 입는 옷을 골라내라고 했다. 7년 전 회사를 그만둔 뒤 양복 입을 일이 거의 없어 열 벌 넘게 자리만 차지하는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남편은 양복이 유난히 잘 어울렸다. 점퍼를 입었을 때와 십 년 이상 차이 나 보일 정도였다.


회사 중간 관리자로 있을 때는 양복과 셔츠, 넥타이를 일 년에 한 번씩 샀다. 생일 때 직원들에게 선물받은 것도 있었다.


정리 해고당한 뒤론 혼자 일하다 보니 양복이 필요 없었다. 점퍼나 티셔츠를 입고 다니면서부터 왠지 남편의 어깨가 왜소해 보였다. 일정치 않은 수입으로 살면서 카드 쓰는 일도 자제하다 보니 땡처리하는 매장에서 싼 옷만 사 주곤 했다.


'누구한테 특별히 보일 일도 없는데, 뭐.'


그런데 남편이 옷을 쉽게 골라낼 거라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남편은 아무것도 꺼내지 못한 채 옷장 속을 우두커니 바라만 보았다.


“왜 안 꺼내? 양복, 셔츠, 넥타이 다 받는다니까 이번에 정리하지.”


남편은 옷장을 도로 닫으며 말했다. “어, 마땅히 버릴 게 없네. 그냥 두지 뭐.”


그제야 남편에게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쉰네 살, 여전히 할 일 많고 팔팔한 나이였다. 아이들 교육이나 결혼까지 생각하면 해야 할 일이 청년기 못지않기도 했다. 아직 남편은 사회생활, 즉 무리 속에 들어가 출퇴근하는 꿈을 버리지 않았나 보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다시 입고 다닐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남편이 출근한 다음 양복과 셔츠를 꺼내 손보았다. 옷장에 넣어 두었어도 오랫동안 입지 않아 먼지가 더께처럼 쌓였다. 베란다 문을 열고 옷을 털었다.


잠시 뒤 남편 또래로 보이는 분이 옷을 수거해 갔다. 달아 보니 26킬로였고 팔천 원이 생겼다. 신발장을 열어 딱딱하게 굳은 구두약을 버리고 새로 사 왔다.


오랜만에 남편 구두를 닦았다. 팽팽한 돛을 단 것처럼 문밖을 나서던 신혼 시절의 남편이 떠올랐다. 잠시 좌초된 것 같은 그 배를 손보는 내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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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민*2022. 06. 27

    이제야 익어가는듯하네여,ㅎㅎㅎㅎ 그렇케  더 마이 나이 묵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할수도 잇을듯,,,ㅎㅎㅎ그래두 참 현명하고 이쁘시네여  현재에 현명한 선택,,,칭찬합니다  그러믄서  사는게 세상이더마여,,늘항상 그리 이쁘게 살기를 바램합니다 ,,홧팅

  • 두루**2020. 02. 17

    집집마다 주부들의 고민 1호 '일걸요!
    자잘한 문제를 참 잘 표현 하셨네요!
    완전 공감합니다. 뒤늦은 축하드려요!

  • 양 ***2020. 02. 16

    영원히 남편의 에너지가 되어 주세요

  • 강지*2020. 01. 21

    저도 오늘은 수고하신 부모님께 응원의 한 마디라도 드려야겠군요. 꿈은 소중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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