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정용철의 사랑의 인사
서로 사랑하면new
2019.01.17   조회수 : 180    댓글 : 1개
어느 곳에서든지 신을 본 사람은 없다.그러나 만약 우리가 서로사랑하면신은 우리 가슴에 머물 것이다.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서로 사랑하면…….”이 말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 줍니다.서로 사랑하면 기쁨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우리가서로 사랑하면어떤 고통이 밀려와도 이겨 낼 수 있고,어떤 슬픔이 찾아와도빨리 지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사랑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좋은 것을탄생시키는 모태입니다.사랑이 있는 곳에신이 머물기 때문입니다.내 가슴이 사랑으로 아름답다면그 순간은 신이 내 가슴에머물고 있는 때입니다.
새벽 햇살
꼬리 없는 붕어빵
2019.01.08   조회수 : 168    댓글 : 1개
우리 부모님은 어머니의 외도로 이혼했다. 군인인 아버지는 일이 바빠 나와세 살 많은 누나를 키우기 어려웠다. 새 삶을 살려던 어머니에게도 우리는 걸림돌이었다.어머니는 큰어머니를 찾아가 우리를 부탁했다. 큰어머니는 화를 내며 “이렇게 갈 거면 보육원에 보내겠다.”라고 했다. 결국 우리 남매는 어머니 그리고 새아버지와 같이 살았다.새아버지는 차가웠으나, 가끔 외식도 하고 놀이공원도 가며 추억을 쌓았다.한데 얼마 후, 새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동생이 태어났다. 그 뒤로 차별이시작됐다.처음엔 구박과 꿀밤 정도였다. 한데 “밥값을 해야 한다.”라며 고된 일을 시키더니, 날이 갈수록 때리는 정도가 심해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무렵에는 얼굴에 멍이 들어 어머니 화장품으로 가렸다. 그래도 숨겨지지 않아 학교에 못 가는 날도 있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다투는 날이 늘더니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도 맞기 시작했다. 우리 남매는 불안 속에서 살았다.어머니는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새아버지는 우리를몰아붙였다. “느그 엄마 어디 갔노? 어디 있는지 알제?” 우리는 공포에 떨었다.폭력은 더 심해졌다. 여린 누나는 무슨 용기에선지 매번 내 앞을 가로막았다.무서워하면서도 비켜나는 일이 없었다. 누나의 떨림이 뒤에 숨은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덕에 나는 조금이나마 매를 피할 수 있었다. 누나는 내게 영웅이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희망이자 웃음을 주는 친구였다. 늘 엄마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다.어느 캄캄한 새벽, 누나가 나를 깨웠다. “현관문 나가면 누나 손잡고 뛰어.”혹시 들키면 어쩌나 두려웠지만 누나를 믿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우리는 한참을 뛴 다음 정처 없이 걸었다. 놀이터나 상가 건물을 전전했다.다음 날 저녁,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는 울면서 누나를 졸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어른에 대한 적대감때문에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계단에서 졸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집에 안 가고 뭐 하니?” 누나는“신경 쓰지 마세요.” 하며 내 손을 잡고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를 했다. 아저씨는 그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나는 다시 졸기 시작했다.얼마 뒤 돌아온 아저씨가 누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붕어빵이었다. 우리는 망설이다 허겁지겁 먹었다. 살면서 가장 맛있게먹은 음식이었다.우리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외할머니 댁에 갔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군에서 전역한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갔다. 이후 누나와 나는 집 앞 붕어빵 가게를지날 적마다 아저씨의 따뜻한 손길을 떠올렸다.붕어빵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우리 형편으론 하나에 몇백원 하는 붕어빵도 사 먹기 힘들었다. 한 마리라도 살 수 있는 날엔 반씩 나누어 먹었다. 누나는 늘 내게 머리 부분을 내밀었다.나는 어린 마음에 ‘꼬리 쪽이 맛있나?’ 싶었다. “왜 맨날 누나만 꼬리 먹는데? 나도꼬리 먹고 싶다.” 내가 투덜대자 누나는 말했다. “머리를 먹어야 머리 좋아지지. 커서똑똑해지려면 머리 먹어.”그땐 멋모르고 서운했는데 이제야 알았다. 팥이 많고 부드러운 쪽을 내게 양보했다는 것을.지금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해 이곳에 왔다. 누나는 하나뿐인 동생 없이는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붕어빵을 들고 누나를 찾아갈 날을 기다리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성실히지낸다.“누나, 요즘은 꼬리에 크림 들어간 붕어빵도 있대. 실컷 먹어 보자. 사랑해.”
동행의 기쁨
친구가 되어 주세요 <이주민 센터 ‘친구’>
2019.01.08   조회수 : 636    댓글 : 0개
서울시 영등포구 대림동 거리에는 중국 식당, 중국어 이름의 직업소개소 등이 군데군데 늘어섰다. 중국 말도 간간이 들린다. 형형색색의 간판 사이 노란바탕에 흰 글씨로 자그마하게 쓴 ‘이주민 센터 친구’가 보인다. 3층 ‘친구’ 문을열고 들어서자 탁자와 의자가 곳곳에 놓여 흡사 카페 같았다. 한 외국인이 영자 신문을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임대차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찾아온 나이지리아 사람으로 상담 후 고단한 마음을 달래는 중이었다.곧이어 친구의 식구들, 사무국장 조영관 변호사(36세)와 이진혜 상근 변호사(32세), 박지현 센터장(45세), 활동가이자 통역가인 조선희 님(31세, 몽골 이름 Sondor-ErdeneTsogtbayar)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친구는 한국에 머무는 외국인에게 법률 상담 및 소송 지원을 하고, 그들이 한국 사회에 정착해 함께 살 수 있도록 여러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조영관 변호사는 생각보다 많은 이주민이 법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고말했다.법적인 용어는 한국 사람에게도 어렵잖아요. 외국인은 더 힘들겠죠.월급을 못 받거나 일하다 다쳤을 때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부분을 돕고 있습니다.지금까지 친구에서 해결한 사건은 천여 건. 한 달 평균 백 차례 정도 상담한다. 부담을 느껴 오지 못할까 봐 상담과 변론 모두 무료로 진행한다.나라에서 지원받는 부분도 더러 있어요. 대신 신청해 무료로 진행하거나,그렇지 못한 경우 저희가 소송비를 전부 부담합니다. 친구에는 자문 변호사가열여섯 명 정도 있어요. 그분들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지요.변호사뿐 아니라 노무사, 세무사, 회계사, 로스쿨 학생, 자원봉사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뜻을 함께한다. 법률적인 문제 외에도 생활 상담이나 이주민에게 필요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친구를 찾는 이들의 사연은 다양하다. 이진혜 변호사는 지난해 맡은 김치공장 사건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단다. 매년 김장철이면 많은 외국인근로자가 단기 취업 비자를 받아 김치를 담그러 온다. 그들은 3개월간 일하다돌아간다. 한데 한 공장주가 임금을 주지않고 그들을 돌려보냈다. 비자가 만료되면더는 머물지 못하는 점을 악용한 것. 몇 년째 피해자가 발생했다.몽골인 두 명이 귀국 전날 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민사 소송까지 해서 돈을 받는데 꼬박 8개월이 걸렸다. 기쁜 소식을 전하려 연락하니 그중 한 사람이 안타깝게도 며칠 전 숨을 거두었다고.그분들 입장에선 한국으로 일하러 오려면 목돈이 들어요. 그런데 한 푼도 못 받고돌아갔으니 가장으로서 면목이 없다고 무척 침울해했어요. 받은 돈은 유족에게 보냈는데 못 쓰겠다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전부내놓으셨대요. 형편이 좋은 분들도 아닌데.이진혜 변호사는 가슴 아픈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야무지게 말했다.조영관 변호사는 나이지리아에서 온 키와누카 씨를 떠올리면 절로 웃음이 난다.그녀는 일하다 허리를 다쳤으나 산재로 인정받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삶을 포기한 눈빛이라 모두 염려했다. 다행히소송을 거쳐 산재로 인정받았다. 치료를 받고 센터를 찾은 키와누카 씨는 전과 확연히달랐다. ‘저 사람이 누구지?’ 생각할 정도로밝고 기운이 넘쳤다. 몸도 마음도 회복된그녀가 본래의 흥 많은 아프리카 여인으로돌아간 것. 귀국하기 전 ‘나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와 달라’며 돈을 기부한 그녀는 한국에 대해 좋은 기억만 간직하겠다고 했다.이주민들은 세계 많은 나라 중에 한국을 택했어요. 피부색이나 언어가 다르더라도 멀리서 찾아온 친구가 좋은 기억을 갖고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몇 해 전, 조영관 변호사는 독일로 일하러 간 한국 간호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lt;국경을 넘어 경계를 넘어&gt; 전시를 관람했다. 거기서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말을 들었다.오빠나 동생 공부시키려고 간 독일에서 여성 인권과 민주주의를경험하고 새로운 눈을 떴어요.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여성으로서의 ‘나’를 돌볼 수 있었고,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을 후원하게 됐죠. 독일에서살며 자연스레 받은 교육 덕분이에요.그는 힘주어 말했다.외국에서는 한국을 ‘아시아 민주주의의 등불’이라고말해요. 사실 한국에 온 이주민은 자신의 나라에서는 해외에 나가는 걸 선택할 정도로 깨어 있고 공부도 열심히 한 경우가 많거든요. 그들이 한국에 살면서 인권과 민주주의를 배울 수 있길 희망합니다. 그래서 본국으로 돌아갔을때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살 수 있도록. 어렵지 않아요. 그저 그들을 나와 다른사람이 아닌 친구로 대해 주세요. 함께 어울려 주세요. 그러면 이주민들은 절로 경험할 거예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2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사람 덕분에
2019.01.08   조회수 : 394    댓글 : 1개
벌써 스무 해 전 일이다. 악기점 전속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던 나는 일거리가 없을 때 종종 악기 파는 일을 맡곤 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영업이라니…….말주변이 없어 어떻게 손님과 마주하지?’ 걱정과 달리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가끔 사람 때문에 힘들면 세상 어딜 가나 마찬가지라 여겼다.혼자 여유롭게 구경하길 원하는 사람과 말 붙여 주길 바라는 사람을 재빠르게 구별해야 했다. 말 잘하는 능력이 없으니 오직 진정성으로 다가갔다. 결과가 나쁘지 않았기에 ‘그래, 내가 사람 파악은 좀 잘하지.’라며 슬며시 자만하기도 했다.지금 나는 다시 사람 만나는 일을 직업으로 한다. 마을에 공간을 하나 얻어집에 쌓아 둔 책으로 ‘서재 도서관’을 만든 지 햇수로 오 년. 그동안 참 많은 사람을 만났다. 첫인상이 좋다, 나쁘다, 무뚝뚝하다, 친절하다, 따뜻하다, 차갑다……. 얼굴을 아는 이와 모르는 이가 무심코 던지는 말에 마음이 흔들리고때론 부서지기도 했다. 그럴 적마다 ‘첫인상이 별로야.’라며 잘 알지도 못하는누군가를 쉽게 판단한 나를 되돌아보았다.일부러 찾아와야 하는 곳이라 발걸음 해 주는 사람을 그저 반갑게 맞을 수밖에 없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숨은 매력, 좋은 면, 내가배워야 할 모습을 차츰 알아 갔다. 해를 거듭할수록 ‘사람에 대해 함부로 얘기할 수 없구나.’ 하고 느꼈다. 사람 보는 눈만은 정확하다고 자신한 지난날의 내모습이 부끄러웠다.서가에 꽂힌 다양한 책처럼 나이와 생김새, 성격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들에게서 “할 줄 아는 건 별로 없지만 손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해요.뭐든 보태고 싶어요.”라는 말을 수없이 듣는다. 곰곰이 보지 않아 알아채지 못했을 뿐 누구에게나 이런 선의가 있는 걸까? 수고로운 일과 서로의 고된 일상을 기꺼이 나누려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누군가에게도움이 되고 싶어 하고, 그럴 때 기쁨을 느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이곳에서는 사람 ‘덕분에’ 울고 웃는 일이 많다. 이곳을 떠올리면 마음이 절로 따듯해지는 이유다.박소영 님 | 서재 도서관 책 읽는 베짱이 대표
이달의 좋은생각
[좋은님 에세이] 연필로 쓴 일기
2019.01.08   조회수 : 402    댓글 : 5개
할아버지 서재에서 오래된 서류철을 발견했다. 어린 내가 건넨 천 원짜리 지폐부터 장난스럽게 쓴 낙서까지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가림이가 처음으로 할아버지 아껴 쓰시라고 용돈 줌.” “가림이가 할아버지에게 처음 쓴 편지.”“가림이가 자기는 가수 god(지오디) 오빠들과 결혼하겠다고 그림을 그려서 줌.”할아버지는 자신이 세상에 없어도 그걸 간직해 달라고 당부했다.“이건 너만이아니라 내 것이기도 해. 그러니 버리지 말아라.”할아버지는 그 서류철을 얼마나 펼쳐 봤을까. 우리의 시간들을 몇 번이나떠올렸을까.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억은 연필로 쓴 일기 같아서 종종 꺼내 덧칠하지 않으면 옅어지는걸.유치원 시절, 나는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할아버지와 등원 준비를 했다.덕분에 우리는 많은 것을 함께했다. 나는 집에서 유치원까지 혼자 걸어가기도했는데,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나는 걸어가다가도 몇 번이고 뒤돌아 할아버지가 나를 잘 보는지 확인했다. 가끔은 우스꽝스럽게 엉덩이춤을 추면서 걸어갔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크게 웃으며 빨리 가라고 손을 내저었다.대학생이 된 나는 더 이상 뒤돌아보지도, 할아버지를 웃기려 춤추지도 않는다. 할아버지는 앞만 보고 가는 내가 야속할까? 아니면 다 컸다고 기특해할까?할아버지가 내 세상의 전부인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세상엔 점점새로운 게 생겨났고, 나는 지나간 것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흐릿해진 연필 자국을 외면할 때도 할아버지는 우리의 일기를 덧칠했다. 오래된서류철 사이로, 우리가 살던 아파트 창문 위로.내가 할 수 있는 건 가끔 그 일기를 들추어 보는 것, 희미해진 글자들을 조금씩 덧쓰는 것.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한 할아버지 마음도 눌러 담아.전가림 님 | 경기도 성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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