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재미와 질문으로 자란다 <아현 산업 정보 학교 교장 방승호 님>
2020.01.30   조회수 : 435    댓글 : 1개

아현 산업 정보 학교 교장 방승호 님(58세)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재직할 때였다. 한 학생이 고충을 토로했다. “화장실에 담배 냄새가 심해서 양치를 못하겠어요.” 교육자로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무엇보다 학생에게 미안했다. 교내에서 꽁초가 수북이 발견될 만큼 학생들의 흡연 문제가 심각했다. 혼을 내도 해결되지 않았다. 고민이 깊어졌다. 아이들을 붙잡아 와 징계하는 대신, 기타와 앰프를 들고 화장실 앞에 앉았다. 그리고 김광석의〈일어나〉를 불렀다. 아이들은 “교장 선생님이 드디어 돌았다.”라고 했다.

“돌았다는 말이 ‘너무 재밌다’는 뜻이에요. 파급 효과가 커서 순식간에 전교에 소문이 퍼졌어요. 담배 피우지 말라곤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교내에서 담배가 싹 사라졌어요.” 처음엔 그가 좋아하는 곡을 불렀다. 그러다 직접 가사를 쓴 금연 노래〈 No Tobacco(노 타바코)〉까지 탄생했다. 게임 과몰입 학생들을 위한〈 Don’t Worry(돈 워리)〉, 공부에 동기 부여를 하는〈배워서 남 주나〉 등도 발표했다.


그는 여러 시도를 했다. 인형 탈을 쓰고 복도를 다니기도 하고, 학생들에게 명함을 돌리며 교장실로 초대했다. 찾아온 아이들과는 신나게 놀고,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진짜 재미’를 느낀 아이들은 줄지어 교장실로 찾아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는 게임 과몰입 학생들을 위해 교내에 피시방을 만들기도 했다. 처음엔 학교에 나오게 해서 졸업만 시키자는 목적으로 시작한 일이 그 이상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아이들은 프로 게이머가 되거나 게임 개발자를 꿈꾸며 대학에 진학했다. 진로 반경이 달라진 것이다.


“일만 시간의 법칙 있죠?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게임으로 오만 시간씩 쌓은 애들이에요. 보통은 게임을 오래 하면 죄책감만 가져요. 맨날 하지 말라는 소리만 들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는 하라고 해요. 생각을 바꿔 주는 거예요. 너에겐 하루 열 시간씩 뭔가에 몰입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려 주고, 그걸 쏟아부을 길을 찾게 돕죠. 그때부터는 인생이 바뀌어요.”


이러한 교육법의 시작은 뭘까? “삼십 대 중반에 참선을 배웠어요. 지금까지 이십 년 넘게 매일 명상해요. 내 뜻대로 아이들을 보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요.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아이들이 왜 그럴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면 아이들 사정을 헤아리게 되고,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아현 산업 정보 학교는 일반계 고등학교 재학생 중 원하는 아이들에게 직업 교육을 하는 곳이다. 디자인, 요리, 게임, 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전공이 있다. “여긴 국, 영, 수 못하는 애들, 인문계에서 수업 시간에 엎어져 자던 애들이 와요. 일선 교육은 국, 영, 수 못하면 다 못하는 건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알려 주죠.”

그가 아이들에게 “할 수 있다.”라고 독려하는 이유는 변화의 가능성을 몸소 경험해서다. “저는 잘하는 게 없었어요. 교사인 아버지의 길을 별생각 없이 따라 걸었죠. 엉겁결에 교단에 섰어요. 기술 교과를 가르쳤는데, 전구도 못 갈았어요. 기술은 안 맞았지만 교실에서 아이들을 재밌게 해 줄 수는 있었어요.”

다른 면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레크리에이션 자격증을 땄다. 그게 눈에 띄어 놀이 상담을 배우러 미국에 연수 갈 기회를 얻었다. 거기서 충격을 받았다.

 

“저는 내성적이라 낯설면 말도 잘못했는데, 거기 온 사람들하고 몇 가지 놀이를 하니까 십 년 지기처럼 되더라고요. ‘놀이로 사람 사이가 이렇듯 쉽게 가까워지는구나.’ 싶었죠.” 돌아온 뒤 문제 학생을 모아 배워 온 놀이들을 흉내 냈다. 몇 달 지나자 결석하고 사고 치던 아이들이 빠짐없이 학교에 나왔다. 이 경험이 단초가 되어 지금은 국내 1호 놀이 상담학 박사가 됐고, 직접 개발한 모험 놀이가 삼천여 개다. “제가 전구를 잘 갈아 끼웠다면 이런 삶을 살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 못하는 게 기회일 수 있어요.”


꿈을 찾았다고 해도 모든 게 잘될 수만은 없다. 그는 이런 격려도 전한다. “백 가지 도전해서 한두 가지만 되면 성공이에요. 다들 그렇게 해요. 근데 사람들이 된 것만 갖고 얘기하니까 착각하는 거예요. 실패한 98, 99가지를 과정이자 기회로 볼 수 있는 힘이 중요해요.”


그는 자신의 교장실을 ‘분별심이 사라지는 곳’이라고 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해야 되는 게 분별심 없애는 거예요. 상대를 봤을 때 판단하거든요. 저 사람은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부자,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여기 오는 순간 그게 없어져요. 제가 어디 가서 교장 어쩌고 하면 어려워해요. 하지만 노래를 들려주면 하이 파이브도 거리낌 없이 하게 되죠.”


그는 사춘기 자녀 때문에 속상해하는 부모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애들은 그저 집에서 보고 배웠을 따름이에요. 부모는 아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물어야 해요. ‘아이가 왜 그럴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럼 아이한테 미안하다고 말할 용기가 생겨요. 강압적으로 공부시키려 하면 당장은 잘해도 경쟁에서 밀려나기 일쑤고, 성인이 된 뒤에 부모와 관계가 틀어져요. 부모가 먼저 자신을 성찰하면서 평온함을 찾아야 아이들도 좋아집니다.” 공부의 중요성 또한 역설했다. “공부는 좋은 거예요. 다만 아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고 대화를 나눠야 해요.”


그는 오늘날이 한국 교육의 과도기라고 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대단했어요. 역사 이래 우리나라가 이렇게 잘살았던 적이 있나요? 그걸 이룬 게 우리 교육의 힘이죠. 지금은 변화의 시기예요. 그간 교권 위주였다면 이제는 학생들의 인권이 대두돼요. 제가 선택한 키워드는 ‘문화’예요. 가장 방어 기제가 덜하거든요.”


앞으로의 교육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그는 두 가지를 꼽았다. “일단 학교가 재밌어야 해요. 재밌는 순간 아이들이 변해요.” 또 하나는 ‘질문’이다. “지구는 감각적으로 평평하죠. 그런데 실제로는 둥글어요. 둥근 걸 알려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공부해야 해요. 지금은 대답하는 교육이에요. 수능도 공부한 거 대답하는 거죠. 아이들이 질문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해요. 스스로 질문하고 답할 줄 알 때 세상에 없는 걸 만들 힘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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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cyaneng
2020.02.19
너무 멋진 선생님 이십니다.   여기에 다닌 아이들은 나름 행운아들인 것 같습니다. 
모쪼록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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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의 기쁨
기억하고 기록하다 <메모리 플랜트 공동 대표 전미정, 박소진 님>
2020.01.08   조회수 : 958    댓글 : 0개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오가는 이 적은 골목을 걷다 보면 눈에 들어오는 한 집이 있다. 유리창에는 꿈, 사랑, 가족 같은 단어가 적혔고, 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마치 도서관 같다. 촘촘히 늘어선 책장 가득 꽂힌 책과 널찍한 탁자, 푹신한 의자까지. ‘메모리 플랜트(Memory Plant)’라고 쓰인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미정(42세, 사진 오른쪽), 박소진(33세, 사진 왼쪽) 님이 맞아주었다. 메모리 플랜트에서는 사람의 기억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일을 한다. 전미정 님은 기억 수집을 통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한다고 말한다.먹고살기 바빠서 정신없이 지내다 한번쯤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싶은 분이 많아진 것 같아요. 이곳에 모여 자신의 과거를, 나아가 그 시대를 회상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기록을 해요. 저희는 그 기록을 모으고 보여 주는 작업을 합니다.​메모리 플랜트는 2011년 문을 연 이래 구 년째 이 일을 해 오고 있다. 그간 진행한 프로젝트도 백여 가지가 넘는다. 사진을 중심으로 자서전을 만드는 ‘기억의 지도’와 세상을 떠난 이를 추모하는 책 ‘기억의 정원’이 대표적. 사회 활동가의 활약을 책으로 엮거나 이야기를 모아 전시를 열기도 한다.​기억을 기록하는 방법 역시 여러 가지다. 글쓰기는 물론이고 음악, 보드 게임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억을 이끌어 낸다. 이 일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했다. 박소진 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많이 물어보세요. 젊은이들이 왜 이 일을 시작했고 어떻게 오랫동안 할 수 있느냐고요.”​전미정 님과 고(故) 육영혜 대표 그리고 이 년 뒤에 합류한 박소진 님까지 세 사람은 같은 잡지사에서 일했다. 모두 사진을 전공했다. 사진은 한순간을 포착해담아내나, 훗날 다시 봤을 때 당시를 생생히 재현시키는 힘이 있다. 잊혀 가는 추억이나 오래 남겨 두고 싶은 기억을 사진집으로 만들어 전하는 일을 해 보고 싶었다.​처음에는 ‘일 년만 해 보자.’ 그랬어요. 까짓 망해도 경험은 남겠지 싶었거든요. 하다 보니 기억이 지닌 잠재력을 알았어요. 어려울 때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었죠.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을 쌓아주자, 나쁜 일이 닥쳐도 튼튼한 뿌리를 둔 것처럼 흔들리지 않게 하자.’라고 뜻을 모았어요.다양한 사람과 삶을 만나는 만큼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박소진 님은 ‘기억의 정원’에 참여한 부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함께 산 세월이 긴 만큼 두 사람의 기억이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한데 부부는 서로의 책을 읽으며 자신과 다른 기억에 놀랐다. 남편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가슴 절절한 사랑을 떠올렸으나, 아내는 호된 시집살이의 기억에 아파한 것. 남편은 그 사실을 미처 몰랐다며 진심을 담아 아내에게 사과했다. 아내 역시 시어머니를 아들을 사랑하는 엄마로 헤아려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사람마다 이야기도, 기억을 풀어 가는 방법도 달라요. 그러니 깨달음도 다를 수밖에요. 저희는 돕는 역할만 합니다. 찬찬히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이를 정리할 수 있도록요.기억을 손쉽게 기록하는 방법을 물었다. 박소진 님은 우선 앨범 꺼내 보기를 제안했다.만약 아버지에 대한 기록물을 만든다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의 독사진 또는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꺼낸다. 그다음 아버지를 가만히 떠올려 본다. 생김새가 어땠는지, 평소 어떤 스타일을 즐겨 입었는지, 그를 생각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언제 가장 만나고 싶은지, 딱 한 시간 동안 다시 볼 수 있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생각한다. 이 다섯 가지 생각이 마무리되면 아버지와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앨범에서 사진 열 장을 고른다. 사진을 노트에 붙인 다음 자신의 생각을 짧게 적는다. 이것만으로도 아버지에 대한 책을 완성할 수 있다.​행복한 기억이 있는 반면 지우고 싶은 일도 있기 마련이다. 떠올리기 싫은 기억도 마주할 필요가 있을까? 전미정 님은 말했다.물론 개개인의 심리 상태에 따라 달라요. 감당할 수 없는데 무리하면 오히려 상처가 되거든요. 이 일을 하다 보니 누구에게나 한 번은 괴로운 기억과 직면하는 때가 온다는 걸 알았어요. 주변 사람이 아프거나, 나이 들어 인생을 돌아보고 싶을 때 결국 외면해 온 기억을 마주하게 되죠. 성찰하면서 풀어 나가다 보면 잘했다 싶을 거예요. 말하고 기록할 수 있어야 개인과 사회가 보다 건강해진다고 생각해요.​“기억한다는 것은 곧 사는 것이다.” 메모리 플랜트의 슬로건이다. 기억하는 대상을 다시 불러내 살게 하고, 또 그 힘으로 지금을 살아간다는 의미다. ‘내가 기억하고, 기록하고 싶은 순간은 언제일까?’ 어쩌면 그 기억에서 살아갈 힘을 찾을지도 모른다.​※ 인터뷰 전문은 「좋은생각」 2월 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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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정신 <정신과 정문의 이근후 님>
2019.12.06   조회수 : 560    댓글 : 0개
오십 년 넘게 정신과 의사로 환자를 진료하고 학생들을 가르친 이근후 님(85세)에게 물었다.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무엇이었나요?”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평생 후회는 안 했습니다. 후회한들 되돌릴 수 없지요. 그런 건 생각하지 않으니 후회도 없는 셈입니다. 대신 반성하는 일은 있어요.평탄한 인생길을 걸어온 건 아니었다.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를 살며 풍파를 겪었다. 그는 4·19 혁명 시위 주동자로 지목돼 뒤늦은 수감 생활을 했다. 대학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할 때였다. 갓 결혼해, 전문의가 되면 개원하리라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참에 난데없이 옥살이라니.분하고 억울했죠. 심문 과정에서 겪은 고초가 마음에 앙금으로 굳어 오래갔어요.출소 후 앞길이 막연했다. 취직도 어렵고, 유학길도 막혔다. 고민 끝에 국립 정신 병원장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원장은 선뜻 그를 받아 주었고 덕분에 국립 정신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몇 년 후 그는 돌연 사면받았다. 이때에야 깨달았다. 인생에 나쁜 일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좋은 일도 불쑥 찾아온다는걸. 위기가 닥쳤을 적에 기회를 기다리며 준비해야 하는 것도 알았다.자유의 몸으로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게 되자 아차 싶은 거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으니까. 저는 비딱하게 꼬여 무슨 일에든 저항했어요. 앞장서지도 못하고 소극적으로.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할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공부를 해 놨다면 얼마나 좋았겠어요.그는 반성과 후회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생각에 빠져 두고두고 후회하는 대신 다음번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반성하자는 것. 이는 그가 평생 만난 환자와 제자를 통해서도 깨달은 바다.사람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크게 두 가지,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물론 둘 다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에게 온 기회를 놓칠 정도로, 현재 내 삶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느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더 안 좋은 점은 이 두 가지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누려야 할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그는 걱정, 슬픔, 두려움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일을 찾아 야금야금해 보라고 제안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해야 즐거움이 커지고 꾸준함으로 이어진단다. 하루를 충실히 보내다 발견하는 소소한 기쁨과 예기치 못한 즐거움은 삶의 고단함을 달래 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쁨을 찾을까? 그는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언제든지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저는 ‘어디에 갔던 게 참 좋았지.’ 하고 꺼내 볼 추억을 기록하자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죠.” 추억을 쌓아 놓자고 생각하면 누릴 수 있는 기쁨이 잘 보인다는 것. 예전엔 능숙하게 다루는 컴퓨터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온라인 강의도 듣고, 동호회 활동도 하고, 에스엔에스로 사귄 친구들과 안부도 주고받았다. 눈이 침침해져 오랜 시간 컴퓨터를 하지 못하는 요즘은 손주들의 도움을 받는다.이때 ‘그럼에도’ 정신이 필요하죠. 눈이 나빠진 건 아쉽지만 대신 손자, 손녀와 정기적으로 대화하며 젊은 세대를 부쩍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죠. 영상을 보는 대신 듣는 것도 나름의 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그럼에도 즐거움을 찾자는 것이지요.그는 자신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진취적으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휴대 전화를 쓰지 않는 판단 착오를 했다며 아쉬워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사회 변화가 빨라 그 문화를 향유하지 않았더니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단다. 나이가 들더라도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일에 소홀해서는 안 됩니다. 앞장서서 동참하기 어려우면 꼬리라도 붙잡고 가야 해요.이번엔 잘한 일을 물었다. 그는 서슴지 않고 대답했다. “제가 잘 살았다기보다는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일엔 상대가 누구든 바로잡으려 싸웠다. 원칙에 어긋나는 꼴은 보지 못했다. “나이 들고 경험이 쌓이니 스스로가 우습더군요. 이런 나를 수용해 준 사람들이 대단하게 보였습니다. 고맙게 생각합니다.”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밀고 나가다 군에서는 지휘관과 마찰을 빚었고, 해외 봉사 활동을 반대한 이에게 모진 소리를 퍼붓기도 했다.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미움받기 일쑤였다. 어느 날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나는 주변 사람과 왜 대립각을 세우는가. 그러다 깨달은 건 나만 내 가치대로 살면 되지 다른 사람까지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들을 변화시키려 하니 갈등이 생겼죠. 그 사실을 인정한 뒤 관계가 나아졌습니다.젊은 세대와 소통할 때도 이를 유념한다. 한때는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자녀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손주에게도 그의 유년 시절을 이메일로 적어 보내곤 했다. 하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곰곰 생각해 보니 전혀 다른 세상에 살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거였다. 대화를 나누려면 공통 화제가 필요한데 그러려면 오래 산 이가 젊은이의 경험을 이해해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무엇이 다른지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조용히 들어 주고 공감해 주면 그들도 마음을 열고 대화하려 하지 않을까.그는 “나이가 들어 무엇이 즐겁습니까?”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단다. 그때마다 이렇게 대꾸한다고. “저는 즐겁게 살고 싶습니다.” 전제는 ‘즐겁지않다.’란다. 사람에게는 ‘생을 마쳐야 한다.’라는 불안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에 삶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이 나이쯤 되면 하루살이입니다. 하루가 온전하면 이틀이 있고, 이틀이 온전하면 한 달이 생기죠. 즐거운 하루를 꿰어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인터뷰 전문은 「좋은생각」1월 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나의 노래 <가수 주현미 님>
2019.10.30   조회수 : 687    댓글 : 0개
가요계가 변했어요. 공중파 티브이에서 트로트 가수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어요. 행사장에 가도 현장 분위기를 살릴 노래만 요청해요. 물론 그것도 즐거워요. 하지만 제가 정말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기는 어렵죠.​의아했다. 35년 차 가수 주현미 님(58세)이 노래와 무대에 갈증을 느낀다는 것이. 여전히 현역 가수로 방송, 콘서트를 하고 디너쇼, 각종 행사에 출연하지 않는가.​그녀는 1984년 &lt;쌍쌍파티&gt;라는 메들리 음반 발매를 시작으로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올랐다. &lt;비 내리는 영동교&gt;, &lt;신사동 그 사람&gt;, &lt;짝사랑&gt; 등 수많은 히트곡이 있으며 지금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한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노래 대신 1920~1960년대 대중가요를 불러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대가 아니라 집이나 거리에서 자유롭게 노래 부르는 영상을 보곤 놀랐어요. ‘이게 뭐지?’ 싶었죠.누구든 콘텐츠를 만들어 온라인 채널로 세상에 내보낼 수 있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 이런 방법도 있구나.’ 하고 신선하게 여겼던 생각은 이내 ‘나도 내가 원하는 노래를불러 올리고 싶다.’로 발전했다. 그런 열망을 가슴에 품은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설 수 있는 무대는 점점 줄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은 바람은 커져 갔다. 그 동안은 방송사 제작진의 요청에 따라 움직였다면 이제는 주체적으로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맘껏 불러 보자 싶었다. 유튜브 채널 ‘주현미 TV(티브이)’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팬이나 정통 가요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매주 두 편씩 올라오는 노래 영상이 큰 즐거움이다.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도 공연장에 오지 못하는 이가 더 많기에. 그녀는 밤마다 사람들이 남긴 댓글을 읽으며 행복하게 잠든다.​매주 두 곡을 준비해 부르는 일이 쉽진 않거든요. 좋아하고 격려해 주는 글을 보면서 힘을 얻죠.​선곡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옛 대중가요의 경우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음질이 나빠 가사를 알아듣기 어렵고, 반주 역시 투박하다. 35년 차 가수인 그녀도 모르는 노래가 많아 선배와 작곡가에게 자문을 구한다.​한국 가요사가 백 년쯤 돼요. 좋은 노래가 얼마나 많겠어요. 뽑아 놓은 노래가 천 곡이 넘어요. 선배들이 남긴 주옥같은 노래가 점점 잊히는 게 서글퍼요. 저는 오래 활동해서 익숙하니 기억을 떠올려 하나씩 불러 보자 마음먹었죠. 연대별로 남겨서 훗날 후배들이 부르고 싶을 때 찾아 들을 수 있도록요. 제가 그 중간 역할을 하고 싶어요.영상에는 아코디언과 기타 연주자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그녀 이렇게 세 사람만 등장한다. 무대에서는 노래 한 곡을 하더라도 관현악단이 총출동한다. 그런 무거움을 벗고자 원곡의 멜로디를 최대한 살려 기본 반주만 한다. 그녀는 마이크 앞에 앉아 담담하게 노래를 불러 나간다. 그래야 기록하는 의미가 있단다.​세월이 흐르다 보니 우리 귀에 익숙한 대로 변형된 경우도 있더라고요. 그런 노래도 다시 고쳐서 부를 만큼 ‘원곡 보존’에 힘쓰고 있어요.​그녀는 내년도에 가수 데뷔 35주년을 맞는다. 소감을 물었다. 덤덤해요. 숫자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어요. 노래가 좋아 불렀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다만 들어 주는 분이 계시니 계속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 팬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점점 커집니다.​중년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가수로서 영광을 누리며 살았다. 노력했으며, 운도 따랐다. 팬들의 사랑도 받았다. 하나 생활인으로서 그녀는 늘 결핍을 느꼈다. 노래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그 갈증을 채우고자 인문학을 공부하며 내면을 가꾼다고.​제가 가진 재능이 누군가에게 기쁨과 위로가 된다면 기꺼이 나누고 싶어요. 그러려면 저 자신부터 온전해야겠지요. 내가 좋아하는 것, 진정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 나에게 집중하고 내면을 채우며 살고 싶어요. 더 많은 이에게 제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서라도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2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약이 되는 음식 <한식 진흥원장 선재 스님>
2019.09.27   조회수 : 614    댓글 : 0개
“뭘 먹으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스님처럼 나을 수 있을까요?” 선재 스님(63세)을 만나는 사람 대부분은 이렇게 묻는다. 사찰 음식을 만들고 알린 지 40여 년, 스님의 대답은 한결같다. 제철 재료를 깨끗이 조리하여 알맞게 드세요. 건강한 사람은 그렇게만 먹으면 됩니다. 아프다면 몸에 좋지 않은 음식부터 버리세요.불교에서는 병이 찾아오기 전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라고 한다. 그만큼 음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불교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하고 물으세요. 음식이 몸은 물론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뭘 먹느냐는 건 결국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고 있느냐는 뜻이에요.​선재 스님은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득한 바 있다. 출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 절에서 ‘어린이 불교 학교’를 열어 그녀도 일을 도왔다. 학교에서 사고를 친 아이들을 맡아 며칠간 함께 지냈다. 먹성 좋은 나이인데도 음식을 번번이 남기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가게를 찾아 산 아래까지 내려가서 라면, 과자 같은 가공식품을 사다 먹었단다. 평소 그러한 음식을 달고 살기에 심심한 절 밥이 입에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절에 있는 동안만큼은 몸과 마음을 맑게 해 주는 음식을 먹길 바랐다.손이 많이 가더라도 간식 하나까지 천연 재료로 만들어 내주었다. 식재료엔 본래 생명이 깃들어 있고 이 음식을 먹기까지 많은 이가 수고했음을 나직이 일러 주었다. 며칠 뒤 아이들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음식을 남기지 않을 뿐 아니라 태도도 수굿해졌다. 좋은 마음으로 만든 음식이 먹는 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았지요. 성품이 음식과 관련 있다는 것도요.​아이들의 달라진 모습에 놀란 학교, 기관 등에서 교육 요청이 잇달았다. 선재 스님은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스님들 공양 당번을 맡아 하면서도 틈을 내 불경을 찾아 읽었다. 음식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찰 음식을 연구한 이가 없다는 걸 알고 내친김에 논문도 써 내려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음식에 대해 공부하느라 시간이 부족해 끼니를 대강 때우거나 거르는 일이 잦아졌다. 몸이 점점 허약해졌다.“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며 정작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어요. 간경화 진단을 받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죠.” 선재 스님은 음식과 습관을 바꾸기로 했다.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밤늦도록 과로하여 병을 얻었다면 그 반대로 해 보자 싶었어요. 김치와 전통 장을 사용해 스스로 만든 음식만 먹었습니다. 해가 나면 먹고 지면 먹지 않았죠. 충분히 쉬고 명상하며 마음을 다스렸어요.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다 보니 1년 만에 병의 증상이 사라졌습니다.​이후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강의했다. 어린이집, 노인 대학, 성당에까지가서 음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식에 관심 있는 해외에서 초청하거나 유명 요리사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한단다. 어떤 이야기를 해 주는지 궁금했다.​예를 들면 무는 땅에서 왔죠. 무가 자라려면 햇빛도 물도 땅도 바람도 공기도 있어야 해요. 자연계의 모든 생명이 함께하죠. 또 무를 키우고 뽑는 농부, 담는 상자를 만드는 사람, 시장까지 나른 운전사의 손을 거치고요. 그러니 돈을 주고 샀다고 온전히 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인연과 모두의 수고로움으로 무가 내게 올 수 있었죠. 이렇듯 자연의 생명이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음식에서 느껴 보는 겁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다른 이도 그래야 한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죠.​선재 스님에게 11월, 몸과 마음을 보해 줄 제철 음식을 소개해 달라고 청했다. 스님은 주저 없이 무를 택했다.무는 10월 중순 이후에 맛이 납니다. ‘가을무는 인삼보다 좋다.’라는 말이 있지요. 이때 무는 아삭아삭하고, 특유의 단맛도 좋습니다. 해독 작용을 하고 소화를 돕는 역할도 해 주죠. 가을무로 깍두기를 버무리거나 전을 부쳐 먹어도 좋습니다.​선재 스님은 음식을 만드는 것 역시 수행과 같다고 말한다. 나를 위한 요리를 해 보세요. 서툴러도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먹으면 삶의 작은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밥 한 그릇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자연과 사람의 손길을 생각하며 소중히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 음식을 먹은 사람에게 약이 될 것입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문 앞에 서서 <호텔 도어맨 권문현 님>
2019.08.29   조회수 : 884    댓글 : 1개
사십삼 년간 호텔 정문을 지킨 이가 있다. 도어맨으로 정년퇴직한 뒤에도 다른 호텔로 옮겨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한다. 콘래드 서울 호텔 도어맨 권문현(66세) 님이다.전 그저 한 가지 일을 계속했을 뿐입니다. 다른 재주가 없어서 그랬지요.그의 일은 손님 응대. 매일 아홉 시간씩 서서 보낸다. 미소 지은 채 정중하게 인사한 후 오가는 손님을 위해 신속히 문을 열어 준다. 가지런히 빗은 머리, 깔끔한 정복 차림은 퇴근 때까지 흐트러짐이 없다. 호텔 방문객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대개 오전 여섯 시 반에 일을 시작합니다. 그 전에 출근해 근무 준비도 하고 오늘은 호텔 어느 곳에서 어떤 행사가 있는지 알아본 뒤 달달 외웁니다. 그래야 손님이 물을 때 바로 답할 수 있지요.신문도 여러 종을 구독해 꼼꼼히 읽는다. 세상 돌아가는 일도 파악하고 특히 단골의 근황을 알아 두면 방문 시 반영할 수 있다고. 차량 번호도 200여 개 기억한다. 차가 호텔로 들어서면 곧바로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손님이 방문할 곳에 채비를 부탁한다.이 일을 오래 해 얻은 노하우랄까요. 제가 기억하는 손님이 많지 않습니까. 각자 좋아하는 인사 방식이 있어요. 알아보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분에게는 목례만 합니다.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분이 오면 저도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안내하죠. 손님이 편하게 느끼도록 하는 제 나름의 환영입니다.그는 손님이 원하는 바를 한 발 앞서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요청하기 전에 돕는 게 최선이라는 것. 오랜 기간 한 우물을 판 덕에 다른 직원보다 그런 점이 잘 보인다고.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눈치가 빨라졌죠. 집에서도 아내가 기분 상했을 때 왜 화났는지 살피고 바로 사과합니다. 애초부터 그럴 일을 만들지 않으면 좋은데 아직 그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나 봅니다.서러움이 차오를 때에도 밝은 얼굴로 손님을 맞아야 하는 게 도어맨의 숙명. 마음을 달래는 법을 물었다. 요즘은 쉽게 화가 나질 않아요. 꽁해 있다가도 삼십 분 안에 풀어지죠. 원만히 해결된 걸 보는 게 기쁨이에요. 저도 일하며 많이 변했네요.그에게도 성격이 울뚝불뚝한 시절이 있었단다. 생계를 위해 무작정 상경해 호텔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주물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일로 먹고살았다. 성남의 터널 뚫는 현장에서는 위험천만한 일을 겪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거친 뒤 호텔에 들어오자 마치 별세상 같았다.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유명 인사를 안내하는 일도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몇 년 흐르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갑갑해졌다.남의 문 열고 짐 받아 주는 일이 자존심 상하기도 했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굽실거려야 하나,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죠.태권도 3단인 그는 보안 요원 제안을 받기도 하고, 해외 이민을 꿈꾸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를 잡아 준 것은 어머니였다. 투덜거리는 그를 달래며 한 직장에서 끝을 보라고 했다.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 마라. 인사도 열심히 하면 너에게 자양분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 어쨌든 돌아온다.혈기 왕성한 당시엔 흘려보낸 말이 지금은 구구절절 들어맞는 걸 안다. 그만두고싶다는 직원에게 술 한잔 사 주며 달랠 정도다. “여기가 힘들다고 피하면 더 어려워질 수 있어. 서 있느라 다리 아프고 자존심 구겨지는 것도 알아. 그래도 여기서 인사의 달인이 되어 봐. 그때 더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어.”나의 노력과 정성으로 손님이 기뻐하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여전히 일을 더 잘하고 싶다. 손님이 보다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낄수록 그에게 더 큰 만족감이 돌아오기에.혹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는지 물었다.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웃는 인상인 손님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외국 손님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활짝 웃으며 인사합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점점 그런 모습이 좋아 보여요. 저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호텔에서든 다른 곳에서든.그도 처음엔 썩 좋은 인상이 아니었단다. 하지만 사십삼 년간 밝은 모습을 유지하면서 그의 삶도 성격도 변했다.손님에게 공손히 대하다 보니 결국 제가 그런 사람이 되었어요. 호텔 문 앞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제 마음도 열렸고요. 오랫동안 일하기 잘했다 싶습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0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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