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쌀밥 같은 빵 <오월의 종 대표 정웅 님>
2017.11.30   조회수 : 8,530    댓글 : 10개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제빵 학원에 등록했다기에 빵에 관한 특별한 사연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빵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돈 주고 사 먹지도 않았다니까요.

오월의 종 대표 정웅 님(50세)이 멋쩍게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계속 승진해 설령 임원이 된다 해도 지금과 똑같은 일을 하겠구나 생각하니 회의가 들었어요. 아무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잘 살고 있다 믿었던 그의 세계가 흔들렸다. 지금이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아 사표를 던졌다. 그날 회사 건너편에 있는 제빵 학원을 발견했다.

회사를 꽤 다녔는데 그런 곳이 있는 걸 처음 알았어요. 생각 없이 그저 왔다 갔다만 한 거죠.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 창문 너머로 훔쳐봤어요. 문득 ‘빵
만드는 일이면 내가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리 한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그가 빵을 만들겠다니. 가족, 친구, 회사 동료 모두가 입을 모아 반대할 때 갓 결혼한 그의 아내만 이렇게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봐요.” 그 말에 힘을 얻어 그는 빵을 굽기 시작했다. ‘얼마나 가겠어?’ 하며 빈정거리던 사람들이 무색하게 오늘까지도.


자격증을 딴 지 3년 되던 해 그는 일산에 ‘오월의 종’ 빵집을 열었다. 3년 후엔 꼬박꼬박 집에 돈을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던 거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그가 천연 발효종 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빵집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무척 생경했다. 사람들은 후식으로 먹을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빵을 선호했다.

저는 쌀밥 같은 빵을 만들고 싶었어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빵, 이런 식감이면 좋겠다 하는 빵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빵. 그래서 천연 발효종 빵을 만들기 시작했죠.

사람들이 모르는 빵을 만들다 보니 ‘오래된 빵이다’, ‘상한 것 같으니 환불해 달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결국 빵집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가게 보증금도 못 건지고 빚까지 졌다.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나요?” 그는 질문을 받자마자 대번에 답했다. 수천 번도 넘게 포기하고 싶었다고.


제빵 학원에 다닐 때 반죽의 기본인 ‘둥글리기’를 못했어요. 나이 들어 왔으면서 노력도 안 한다고 된통 혼난 날, 기가 팍 죽더라고요. 이 길이 아닌가 고민에 빠졌죠. 그 후에도 힘든 순간이 수없이 많았어요.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일인데 중간에 포기 할 수 없었어요. 누구도 찬성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나선 만큼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은 듣기 싫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그는 신입 제빵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나도 서른 넘어 시작했어.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야. 기죽지 마. 빵을 만들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돼. 시간을 갖고 열심히 하면 너도 잘 만들 수 있어.”하고 격려한다.


2005년, 이태원에 다시 빵집을 열었다. 작고 소박한 가게. 거기서 그는 혼자 일했다. 마지막 기회라 여겼기에 빵 종류도 추려서 평소 하고 싶던 딱딱한 유럽식 빵만 만들어 팔았다. 외국인이 많은 동네라 기대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3년간 묵묵히 빵을 구웠다. 신제품을 개발하다 손님이 부르면 나가서 빵을 담아 주고, 오븐을 보러 갈 땐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찾는 이가 하나둘 늘었고 사람들은 그의 빵에 길들여졌다. 그러던 어느 저녁, 빵이 전부 팔렸다. 전날까지도 반 이상 남아 이웃에게 나눠 준 터라 의아했다.


이상하다,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겼나?

그는 밖으로 나가 거리를 둘러봤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빵은 매진됐다. 그리고 어느덧 사람들이 줄 서는 빵집이 되었다. 입소문이 나자 백화점 입점 제안이나 프랜차이즈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럼 빵 맛이 변해서 안 돼요. 제 빵은 손이 많이 가고 오래 걸려요. 대량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가 만드는 빵은 대개 밀가루, 물, 소금 그리고 효모종으로만 반죽한다. 이런 저배합 빵일수록 조리법이 같아도 매번 동일하게 나오기 어렵단다. 지금껏 들은 칭찬 가운데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이 “빵 맛이 여전히 똑같네요.”라고. 오랜 단골이던 영국 손님이 한국을 떠났다가 3년 만에 다시 들러 해 준 말이다. 앞으로도 그런 빵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빵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그의 손을 거친다. 처음 제빵을 시작할 때부터 그가 바라던 바다. 오븐을 여는 순간이 매번 설레는 것도 여전하다. 어떤 맛이 날지 궁금하기에. 원하는 맛이 나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한다. 그러면서 사는 재미와 행복을 느낀다.


오늘 만든 빵이 오늘 다 팔리면 그걸로 족해요. 더 욕심내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빵을 만들고, 또 그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길 바라죠. 나도 손님도 빵으로 행복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오래오래 빵을 만들고 싶어요.

 

 인터뷰 전문은 좋은생각」 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10)

해바라기★태양
201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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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시내요.  남들은 체인을 늘려 수익을 늘리려할텐데~~그맛을 고수하기위해 노력하시는 모습보니 정말 멋지시네요. 최고예요.~~^^😊
김병수
20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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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대구에서 오월의 종 빵집이  초심을 잊지말고 계속 장사히시길 빕니다.꺽이지않코 밀어 부친 그 노력과 노고에 눈끝이 찡하네요.연말 잘보내시고 늘 건강하십시요.
정경훈
20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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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감사합니다.
마음에 울립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
201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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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대단하신것 같아요! 존경스럽네요 ! 저도 요즘 현재 제가 하는 일이 과연 맞나?  다른 길을 찾아야되나? 하는 고민중이네요 나이는 51인데 .... 
강태룡
20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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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어습니다 
신정호
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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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보기 드문 분입니다. 초심을 유지하는 모습이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좋은 생각 편집부 취재 기자님도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저런 좋은 분을 어떻게 알고 취재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좋은 생각에서 항상 앞에 나오는 코너라 주목해서 읽는 글인데
인터넷으로 보니 좀 더 새롭네요.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123
2018.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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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가면 한번 방문해볼게요 
이기도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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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빵 만드는 사람이군요 ^^
돈을 버는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는 당신같은 분을 존경합니다.
오늘여기 김순희
201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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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잔에  뚝잘라 폭찍어 ..
침샘자순극 되네요^^
이태원 어디쯤일까  기회가 닿기를 
유이슬
2018.03.09
빵을 좋아하는마니아로 꼭 한번 먹고 싶네요...
이태원가면 꼭 들럴곳이 생겼네요
쭉욱 사업번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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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의 기쁨
최선을 다하면 기회는 온다 <쇼트 트랙 선수 김아랑 님>
2018.07.09   조회수 : 2,196    댓글 : 3개
여름날에도 빙상 경기장은 몸이 움츠러들 만큼 공기가 찼다. 김아랑 선수(22세)는 익숙한 듯 얇은 패딩 점퍼 차림에 야무지게 윗옷까지 챙겨 왔다. 힐끗보더니 대뜸 옷을 건넨다. “추우시죠? 이거 걸치실래요?” 지상 훈련 중인 후배를 보자 살뜰히 안부를 묻고, “우아! 국가 대표 처음 봐요.” 하고 신기한 듯 쳐다보는 어린이에겐 손을 흔들어 준다.문득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쇼트 트랙 1,500미터 결승전이 떠올랐다. 간발의 차로 메달 획득이 무산된 김아랑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눈물을 쏟는 최민정 선수에게 다가가 다독였다. 활짝 웃는 그 장면은 사람들 뇌리에 오래 남았다.“정말 축하해 주고 싶었어요. 대견하잖아요.”그 일에 대해 묻자 그녀가 답했다. 그러곤 덧붙였다.“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후회 없는 경기여서 저 자신도칭찬해 줬어요.”후련한 마음에서 우러난 미소였다.그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친오빠와 스케이트를 시작했다.제가 스케이트를 신고도 잘 서 있어서 코치님이 한번 시켜 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대요.스케이트는 흥미로웠다. “특히 쇼트 트랙은 1등으로 앞서다가도 넘어질 수있고, 마지막까지 누가 이길지 모르는 재미가 있어요.” 또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기회가 온다는 것도.하지만 어린 시절 탄탄대로만 달린 건 아니다. 아들딸을 운동시킬 만큼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고향 전주에는 빙상 경기장이 단 한 곳뿐이라훈련 장소도 부족했다. 팀을 옮겨 서울에 올라왔으나 또래 유망주들에게 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연습에 매진했다. 굳은 심지를 다질수 있었던 건 부모님 덕분이다.단 한 번도 성적 때문에 혼난 적이 없어요. 시합 다녀오면 결과도 묻지 않고 ‘우리딸 수고했어.’ 하셨죠.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중 3 때 시합을 망친 후 펑펑 우는데어머니가 말했다.넌 잘할 수 있는 아이야.이 시합이 전부가 아니잖아. 잊어버리고 다음에 잘하면 되지.그때 알았다. 성적이 나빠도, 국가 대표가 되지 못해도 부모님은실망하지 않는 것을. 또 언제나 ‘다음’이 있다는걸. 이 일은 그녀가 위기를 겪을 적마다 스스로를 다잡고 일어서는 힘이 됐다.그녀는 소치 동계 올림픽과 평창 동계 올림픽에 연이어 출전해 각각 금메달을 목에걸었다. 결과만 보면 선수 생활이 승승장구한 듯 보이지만 부침이 많았다. 국가 대표에 선발돼 열아홉 살에 소치 올림픽에 나갔으나, 경기 당일 급성 위염으로 주 종목인1,500미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그 후 2016/17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탈락하기도 하고, 스케이트 날에 얼굴을 베이는 사고도 겪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생각했다. ‘다음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자.’ ‘열심히 해서 다음 시즌에는 국가 대표가 되자.’‘다리나 허리를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이런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소치 올림픽에서 계주 금메달을땄고, 2017/18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종합 2위를 기록해 평창 올림픽에 나갔으며, 얼굴 흉터 역시 점점 옅어졌다.다만 2016/17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탈락했을 땐 꽤나 마음고생했단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쟤는 끝났어. 다시 국가대표 되기 힘들겠지.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하나 상황을 탓하기보다 인정하자고 마음먹었다.“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더 열심히 하면 돼.” 어머니도같은 말을 해 주었다. “괜찮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지.”혹시 불안한 적은 없었어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불안감은 준비가부족할 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 온다고 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으려 철저하게 준비했단다. 평창올림픽을 겨냥해 2년 훈련 계획을 세웠다.‘국가 대표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아예 배제했다. 초반에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훈련을 거듭하자 부담감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어느순간 스케이팅이 더 즐거워졌다.4년간 준비한 올림픽을 마친 지금 좀 편안해졌느냐고 물었다. 다부진 대답이 돌아왔다.제가 운동선수이긴 한가 봐요. 계속 운동을 해야 하니까 마음놓고 쉬지 못하겠어요. 아직은 더 해야 할 때구나 싶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8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마음을 담아야 맛이 난다 <동무밥상 대표 윤종철 님>
2018.06.07   조회수 : 2,886    댓글 : 4개
돈 욕심 부리면 망한다는 걸 남한 와서 배웠지요.함경북도 온성 출신인 윤종철 님(63세)은 1998년 두만강을 건너, 2000년에 남한으로 왔다.딸을 위해 돈을 벌고자 간 중국에서 남한 모습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그가본 한국은 자유롭게 일하고, 개인이 잘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다단계에 빠지기도 하고 이자를 많이 준다고 해서 투자했다가 정착금을 홀랑 날리기도 했어요. 돌아보면 전부 내 탓이에요. 쉽게 큰돈을 벌고 싶어 사기꾼들 말에 혹한 거죠. 욕심 부린 나를 반성했어요. 내가 잘하는 걸 열심히 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사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기술이 있었다. 바로 요리였다.열여덟 살에 군 입대 하니 나를 훈련소가 아닌 옥류관으로 데려가지 뭡니까.그전까지 부엌엔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한데 하루아침에 평양 최고의 식당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의 훈련은 요리였다. 옥류관에서 넉 달간 보조로 일하며 부지런히 익혔다. 그런 다음 다른 훈련병 세 명과 시험을 치렀다.기왕 칼을 잡았으니 최고로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밤잠 설쳐 가며 ‘요리 공부’를 한 끝에 일 등을 차지해 군 장성 식당에 배치됐다. 고위급 장성 열여섯 명을 위한 곳이었다. 각기 다른 지역 출신이라 입맛도,좋아하는 음식도 제각각. 맛없으면 호통치고, 먹고 싶은 음식 조리법을 알려주며 만들라고 했다. 그곳에서 십 년간 요리하며 군 복무를 마쳤다. 하지만 요리사로 살기는 싫었단다. “북한에선 요리사가 괄시받는 직업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유명 요리사였는데 평생 대접을 못 받으셨죠.” 그래서 회령 경공업 단과대학에서 발효를 배워 졸업 후 공장에서 된장, 간장 등을 만들었다.군에서 갈고닦은 요리 실력은 한국에서 뒤늦게 빛을 발했다. 북한 여러 지역의 음식을 꿰뚫는 덕분에 이호경 대표의 요리 교실 ‘호야쿡스’에서 북한 음식을가르치고 또 음식점을 차릴 발판도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 가게를 열 때만 해도 이런 후미진 골목까지 누가 찾아올까 싶었다. 그런데 입소문이 나며 사람들이 가게앞에 줄 서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자신의 기술로 정성을 다하면 통한다는걸.그는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 가게를닫는 월요일에도 아내와 김치를 담근다. 김치를 통에 담는 것까지 직접 해야 ‘딱 소리나는 맛(북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하는말)’이 난단다.영업을 일찍 마치는 일요일에는 순대를만든다. 그가 자랑하는 함경도 식 순대.돼지고기를 다져 갖은 채소와 찹쌀을 넣어 속을 만듭니다. 그걸 돼지 창자에 채워 넣죠.말로 하면 쉬운데 막상 만들면 무척 힘듭니다. 그래도 제대로 만든 북한 음식을 보여주고 싶어 계속합니다.그는 정통 북한 음식을 고집하지만 한국사람들 입맛을 고려해 요리법을 조금씩 바꾸고 메뉴도 과감히 변경한다. 그가 제일좋아하는 음식인 옥수수 국수를 손님들이즐기지 않자 메뉴판에서 지우고, 얼마 전오리탕도 돼지국밥으로 바꾸었다.평양냉면은 옥류관에서 배운 대로 만들되 여기에 맞게 변형했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먹을 때 가위로 자르지 않는다. 그래서면을 반죽할 때 목 넘김에 좋으라고 식소다를 섞는다. 하나 건강을 생각하는 남한 사람들은 화학조미료를 꺼려 뺀단다. 국물도 북한에서는 꿩고기를주로 썼지만 여기서는 구하기 쉬운닭과 꿩을 섞어 쓴다. 또 동치미 국물을 넣어 쨍한 맛을 내고, 간장으로간한다.집에서도 다 내가 해요. 가게에서든 집에서든 계속해야지, 안 그러면 요리가 늘지 않아요.그래서 외식도 꺼린다. 북한 음식은 원재료를 살려 살짝 싱거운 데 반해 남한 음식은 양념을 진하게 한단다. 북한 음식의 맛을 잊을까 겁이 난다고 했다.술집에 가서도 안주로 과자 몇 개만 집어 먹을 뿐 다른 건 일체 맛보지 않는다.우리 어머니가 해 준 옥수수 국수, 그 맛이 아직도 기억나요.그의 고향에서는 옥수수 농사를 지어 먹고살았다. 어머니가 해 준 옥수수국수는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우거짓국에 옥수수 면을 넣어 끓인 것이었다. 여덟 자식 입에 먹을 걸 넣어 주느라 부엌을 떠나지 못한 어머니. 비록 어머니에게서 요리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걸 깨우쳤다. 음식에 마음을담아야 맛이 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부엌에 선다. 그의손을 거친 음식이라야 손님상에 나간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7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정성을 들이는 일 <염색가 신상웅 님>
2018.04.27   조회수 : 2,533    댓글 : 0개
좋아서요. 다른 이유가 뭐 있겠어요.많고 많은 색 가운데 왜 푸른 쪽물을 들였느냐는 질문에 염색가 신상웅 님(50세)은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십수 년 쪽물만 들인 사람의 대답이라고하기에는 어쩐지 밋밋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저는 푸른색을 가장 좋아해요. 쪽 염색으로 다채로운 푸른색을 만날 수있죠. 쪽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에요. 언뜻 보면 같은 색처럼 보이지만 모아 두면 다 달라요.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쪽 염색을 하며 살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이십오륙 년 전, 대학 다니던 무렵이었다. 인사동에 천만 걸어 선보인다는 전시회가 열려 찾아갔다. 천연 염색가 한광석이 자연의 빛깔을 끄집어내 천에 재현한 작품들이었다.색에 예민한 미술 학도라 그랬을까, 호기심이 생긴 그는 무작정 작가에게편지를 보내 방문하고 싶다고 청했다. 허락을 받아 여름 방학 내내 벌교에 머무르며 농사일을 거들고 염색 과정을 지켜보았다. 학기 땐 주말에 수시로 찾아갔다.귀한 일 같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그렇게 하기를 십 년. 그때까지도 색을 그림에 이용하려 했을 뿐 염색을 할 생각은 없었다.서른을 앞두고 그는 늘 바라던 긴 여행을 떠났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서 문득 초등학생 때 떠나온 충북 괴산의 고향 집을 떠올렸다. 청주, 서울에서 유학하며 ‘언젠가 다시 가야지.’ 하는 마음을 품은 터였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 ‘내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 보니 염색이 떠올랐다. 갖가지 색 가운데 쪽빛을 들이고 싶었다.서른 중반 봄부터 그는 쪽씨를 얻어 모판에 뿌렸다. 오월 중순쯤 10센티 정도 자란 쪽 모종을 밭에 옮겨 심으면 석 달 후엔 1미터를 웃돌 만큼 훌쩍 컸다.쪽에서 염료를 뽑는 일 또한 쉽지 않다.다 자란 쪽을 베어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은 후 물을 가득 채운다. 이삼 일 뒤 에메랄드빛 물이 우러나오면 쪽을 건져 내고 석회를 넣은 다음 힘껏 저어 앙금을 만든다. 여기까지가 염료를 모으는 일이다.미리 내려 놓은 잿물에 앙금을 섞은 다음 매일 저어야 해요. 하루에도 열 차례 이상 반복해야 발효가 잘됩니다. 한두 달은그렇게 저으며 기다리는 거지요.발효 과정까지 마치면 쪽물은 농익어 염색 준비를 마친다. 그다음엔 천을 쪽물에담가 염색한다. 긴 시간 동안 수많은 과정을 거쳐 흰 천에 푸른색이 스며드는 순간가슴이 벅차다. 주변에 푸른 천들이 켜켜이쌓이고, 그 천을 흔들면 푸른 먼지가 펄럭이고, 그의 손도 푸르게 물든다.일본엔 이런 말이 전해진답니다. 쪽 염색을 하는 사람은 결코 나쁜 일을 할 수 없다고. 손에 물든 푸른색 때문에 금세 들통나거든요.처음엔 색에 압도당해 염색물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한데 삼사 년쯤 지나자 조금단조롭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천의 두께, 물들이는 횟수, 햇볕, 공기까지 여러 요인이 결합해 새로운 푸른색이 태어난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색을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고민을 거듭하던 무렵 그는 연암 박지원의 글을 읽다가 ‘화포’를 만났다. 화포는 무늬를 넣어 쪽물을 들인 천. 연암이 화포 두루마기를 입은 기록이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전의 염색과 다른,푸른 천에 생기를 불어넣을 방법이었다.그는 화포를 ‘천에 무늬로 의견을 남기는것’이라고 정의하며 덧붙였다.저도 푸른 천에 제 생각을 담고 싶어졌어요.2005년부터 그는 염색을 쉬는 겨울마다여행을 떠났다. 시작은 쪽 염색과 화포를조사하다 책에서 본 묘족(중국 남부에 주로거주하는 소수 민족)이었다. 그들은 일상에서쪽물 들인 옷을 입었다. 또 밀랍으로 천에무늬를 만들었다. 바로 그가 찾던 화포였다. 서점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보고 몽족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중국,태국, 베트남, 라오스, 일본 등의 구석구석을 살폈다.제가 원하는 걸 찾으면 좋지만, 본다고해서 달라질 건 없었어요. 한국에는 이제 남아 있지 않은, 제가 하는 일의 ‘현재’를 보고 싶었어요.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요.그가 찾은 마을 몇몇에서도 전통이 빠르게 쇠퇴했다. 품과 비용이 많이 드니 어찌 보면 지금 시대에는 경제적이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이런전통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여성이 손수 물들여 무늬를 넣은천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모습을 보았고, 상해의 도심에서 푸른 화포로 치파오를 만들어 파는 가게도 만났기에. 그리고 스스로가 정성을 들여 십수 년간 이 일을 하고 있기에.전통적인 방식을 좋아할 단 1퍼센트 사람을 위해서라도 저는 계속하고 싶어요. 누가 찾을 때 남아 있도록.*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6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사랑으로 지켜봐 주세요 <정신 건강 의학과 교수 조선미 님>
2018.04.06   조회수 : 3,119    댓글 : 0개
“인터뷰 약속 때문에 따님과 통화할 때 마무리 인사만 5분 넘게 했어요.”​이 말에 아주대 정신 건강 의학과 조선미 교수(56세)가 활짝 웃었다. 그야말로 ‘엄마 미소’였다.​큰아이는 참 다정해요. 아침저녁으로 만날 때마다 ‘엄마, 보고 싶었어.’ 그래요. 저는 열흘 넘게 학회에 다녀와도 ‘엄마 다녀왔어.’ 하고 마는데.지금은 ‘이 아이는 다정한 기질을 지녔구나.’ 하고 받아들였지만 예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단다. 그래서 화내고 소리치는 일을 반복했다. 아이를 보살피며 어려움을 겪는 부모에게 ‘속 시원한’ 조언을 들려주는 그녀 역시 한때는 초보 엄마였다.​처음엔 이론적으로 설명했어요. ‘부모와의 애착은 아이가 평생 맺는 대인 관계의 기본 틀이 된다’처럼요. 그런데 교육 후에 받는 질문이 늘 비슷하더라고요. ‘애가 조르는데 휴대 전화는 언제 사 줄까요?’ ‘학교 다녀와서 숙제부터하고 놀면 되는데 왜 안 할까요?’ 그러다 보니 제 경험담을 말할 때 공감대 형성이 훨씬 잘되는 걸 알았죠. 거창한 이론보다 현실적인 대처법을 알려 주는게 효과적이더라고요.그녀는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몇 년이 가장 힘들었단다. 정신 바짝 차리고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다그치듯 물었다. “숙제는? 준비물은? 일기는 썼어?” 아이가 아니라, 그 애가 해야 할 일만 보였다.몇 년이 흘러 학교생활에 익숙해지자 다른 엄마 노릇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잘해야 명문대를 간다.” “중학교성적이 수능 점수다.” 주변의 말이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모든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바랄 거예요. 그런데 명문대를 가서 대기업에 취직하면 정말 행복할까요? 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죠.대신 아이들을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우고자 했다. 어려운 일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힘들 때 울지 않는 게 아니라, 적당히 울다 스스로 그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이가 처음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면 주저앉아 운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툭 털고 일어나 다시 페달을 밟는다. 이렇듯 아이가 실패와 좌절을 맛본 뒤 다시 기운을 차리는 ‘맷집’을 늘려야 영혼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의대생들 가운데 고된 의대 생활을 마치고도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에서 그만두는 경우가 늘었다고 했다. 환자나 보호자, 병원 사람들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이다.물론 적성에 맞지 않거나 정말 힘들면 그만두는 게 맞아요.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나 조직에서 갈등이 생겨 고통스럽다고 무조건 피하는 건 문제가 됩니다. 그런 일은 다른 곳에서도 벌어질 수 있거든요. 결국은 세상에서 도망치게 돼요.물론 그녀도 안다. 자식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자신도 두 아이를 키운 엄마이기에. 하나 그게 사랑이 아니라 불안 때문임을 알았단다. 넘어진 아이는 기다려 주면 스스로 일어나는데, 그걸 알면서도 부모가 일으켜 주는 건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느끼는 마음의 고통 때문이다.​대개 아이가 실패하는 게 싫어 엄마가 해 주거나,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아빠가 대신 결정을 내려 준다고 해요. 그거 아세요? 부모가 적극적으로 키운 아이가 도리어 소극적으로 자라요. 자기 의지가 안 생기거든요. 이미 할 게 결정돼 있으니 호기심도 일어나지 않죠. 아이가 생각할 기회가 없는 거예요. 부모 뜻대로 하면 되니까.이렇게 해서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아 오면 부모는 뿌듯해한다. 하지만 아이는 그 성적을 전적으로 자신의 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 판단은 믿을 만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르는 게 낫다고 여긴다. 그러다 보면 삶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스스로 내린 결정을 미숙하다고 생각하며 중요한 순간엔 우유부단해진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하며 차라리 누군가 정해 주길 바란다.그녀는 당부했다. 부모의 마음속‘불안’을 들키지 않으면서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주면 좋겠다고, 부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갈지라도 말이다. 새로운 시도를 격려하고, 실패한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 주면 한 뼘씩 자랄 거라고.*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5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나무처럼 살 수 있다면 <나무 의사 강전유 님>
2018.03.08   조회수 : 3,406    댓글 : 7개
오는 6월 28일부터 ‘나무 의사’와 ‘수목 치료 기술자’ 국가 자격이 신설된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나무 종합 병원 강전유 원장(81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주름 잡힌 얼굴엔 웃음이 흘렀다.​정말 기쁩니다. 그동안에는 아무나 나무에 약을 뿌리고 수술했는데 이젠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할 수 있게 됐어요. 나무뿐 아니라 사람 역시 살리는 일이에요. 나무가 병들었다고 독한 약을 막 뿌리면 나무도 상하지만 사람도 다칠 수 있거든요.1976년 4월, 그는 국내 최초로 ‘나무 종합 병원’을 열었다. 나이 마흔한 살에 십사 년간 다닌 산림청 임업 연구직을 그만두면서까지 선택한 결정. 동료들은 “누가 나무 치료한다고 의사까지 부르겠느냐. 그러다 굶어 죽기 딱 좋다.”라며 만류했다. 하나 그는 확고했다. 그간 임업 연구원에서 나무의 병충해를 연구해 온 터다. 나무가 왜 병드는지, 해로운 벌레는 무엇인지, 아픈 나무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연구실에서 병든 나뭇가지와 해충과 씨름하며 살았다. 하지만 기껏 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법을 알아내도 직접 찾아가 고쳐 줄 수 없었다. 공무원 신분이라 국가 기관이나 공공 기관의 요청이 아니면 갈 수 없기 때문. 그저 간혹 오는 전화 문의에 성심성의껏 답해 줄 밖에.당시엔 시들시들한 나무는 베어 땔감으로 쓰면 그만이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나무를 치료하는 민간 전문가가 있을 리 만무했다.‘누군가는 나무를 치료해야 해. 내가 해 보면 어떨까? 원인만 분석하는 게 아니라 나무 한 그루라도 찾아가 살리는 거야.’ 이 생각이 그를 나무 의사의 길로 이끌었다. “혹시 잘 안되면 어쩌나 걱정하진 않으셨어요?” 조심스레 던진 질문에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퇴직금이 오십삼만 원 나왔는데 딱 그 돈 들여서 나무 종합 병원을 차렸어요.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지금 망해도 아쉬울 거 없다’고요.나무가 점점 많아지니 나무 의사가 꼭 필요할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러나이 일로 큰돈을 벌거나 성공하리란 기대는 없었다. 그저 나무처럼 살면 된다고 여겼다.​나무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삽니다. 키가 큰 나무, 작은 나무, 뾰족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뭉툭한 나무도 있죠. 사람도 나무처럼 저마다 자기 생긴 대로 살면 되는 거 아닐까요. 모두 부자거나 명망 있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세끼 밥 먹고 누워 잘 데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처음엔 찾는 이가 아예 없었다. 개원 후 일 년간 수입이 없자 세무서에서 찾아와 이럴 바에는 폐업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까지 했다.그날 이후 그는 손수레에 나무 치료 약을 싣고 거리로 나갔다. 정원수가 많은 동네를 다니며 담 너머 아픈 나무가 보이면 초인종을 눌렀다. 집주인은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자기 집 나무를 치료하겠다고 하니 벌컥 화내기 일쑤였다.​“귀댁의 나무는 건강합니까?”라는 전단을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반응은 신통치않았다. 사람들은 대학 나와 공무원 하던 사람이 나무에 약이나 뿌리고 다닌다며 혀를 끌끌 찼다.하지만 그 일이 하찮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름시름 앓는 나무를 보면 안쓰러웠고 그의 손길로 생생하게 살아나면 기쁘기만 했다.1978년 여름, 문화재청에서 의뢰가 왔다. 천연기념물 115호로 지정된 중국 쥐엄나무를 치료해 달라는 것이다. 가 보니 원줄기는 부러져 없어졌고 지면에서 올라온 가지 두개만 살았을 뿐. 뿌리까지 썩은 터라 자칫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전전긍긍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비가 몰아치는 밤, 그는 나무가 쓰러질까 옆에 앉아 함께 지새웠다. 다행히 나무는 무사히 버텨 주었고 수술도 잘 마쳐 지금껏 건강하게 자란다.​나무가 나보다 오래 살길 바랍니다. 그럴 거예요.이후 나무 수술의 효과를 본 문화재청에서 의뢰가 오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날까지 나무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으면 왕진 가방을 들고 어디든 간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4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아침밥 먹는 아이들 <전문 상담 교사 손혜진 님>
2018.02.08   조회수 : 5,241    댓글 : 26개
아침밥을 먹으려고 한 시간 일찍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백여 명이란다. “음식 솜씨가 남달리 뛰어나신가요?” 사뭇 진지하게 묻자 손혜진 전문 상담 교사(37세)가 까르르 웃는다. 안 그래도 내내 결석하던 아이가 아침밥 때문에 학교에 오니까 어느 학부모에게 ‘선생님 밥에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요?’ 하는 말까지 들었다니까요.​지난해 서울 휘경 공업 고등학교 입학식 날 신입생 40명이 참석하지 않았다.물론 이후로도 결석했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가 면담하기로 했다. 그녀 역시 몇 명을 맡아 집으로 찾아갔다.그때 처음 우진이(가명)를 만났다. 비쩍 마른 아이가 추운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은 지방에 일하러 가고 누나 역시 아르바이트로 바빠 혼자 지낸단다. 아이는 방바닥을 응시한 채 묻는 말에 대답만 했다.얼른 끝내고 다시 게임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근데 너 잘생겼다. 그런 말 많이 듣지.아닌데.진짜야. 선생님이 뭐하러 거짓말해. 너 보자마자 근사하다고 생각했어.순간 아이가 그녀와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게임은 곧잘 한다며 그 속에선 인기도 꽤 많다고 자랑했다. 눈에 반짝 불이 들어온 것도 잠시 이내 푸시시 꺼졌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걸어 내려오며 그녀는 입술만 깨물었다. 해 줄 수있는 게 없어 맥 빠진 채 삼 일을 보냈다. 하지만 우진이가 자꾸 떠올랐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는 못 살 것 같았다. 매일 저녁 아이에게 문자 메시지를보냈다. 밤새 게임하고 일어나 활동할 시간에 맞춘 거다. “우진아, 밥 먹었니?” “오늘 너무 춥지 않니?” 답장은 안 해도 꼬박꼬박 확인은 하는 눈치였다. “선생님은 학교 상담실에서 아침밥을 혼자 먹는데 외롭네. 우진이가 같이 먹어 주면 좋을 텐데.” 이 말에 처음으로 답이 왔다. “거기 잼 있어요?” “그럼, 있고 말고.” 다음 날 아침 우진이가 상담실에 나타났다. 그녀는 지금도 그 벅찬 순간을 잊을 수 없다.교복을 입은 아이가 들어서는데 번쩍번쩍 빛이 났어요.​그날 이후 우진이는 매일 학교에 왔다. 토스트에 잼을 발라 주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상담실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 아무 때건 와. 친구들 데려와도 좋고.학교에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는 건 처음이에요.선생님, 사실은 음식 냄새 나는 집이 늘 부러웠어요.하나둘 아침을 먹으러 오는 아이들이 늘었다. 처음 물꼬를 튼 우진이가 게임 중에 아침 같이 먹자며 오라고 했단다.기왕 아침 일찍 학교에 왔는데 밥만 먹고 가진 않잖아요.​아이들이 속속 수업에 복귀하자 이번엔 담임 선생님들이 상담실을 찾았다. 아침 준비를 돕는다는 핑계로 와서 밥 먹는 아이 앞에 앉았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아이들도 점점 말수가 늘었다. 교내에는 상담실에서 아침밥 먹는 바람이 일었다. 아이들 수가 늘자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거들어 주었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에서 비용을 보태겠다며 말했다. 처음엔 혹시나 애들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려했는데 생각을 바꿨어요. 결석하던 애들이 학교에 오는 거니까 해 봅시다.​6월, 갑자기 방송사에서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교육청에서도 우수 사례로 널리 알리자고 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상처 받을까 걱정했다. 우리 애들 밥 먹는 거 찍지 마세요.그녀는 촬영 중에 목소리를 높이고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 선생님들이 “손 선생 목소리가 이렇게 큰지 처음 알았네.”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한데 기우였다. 기사가 알려지자 아이들은 창피해하기는커녕 자랑스러워했다. ‘사랑으로 아침밥을 해 주는 선생님들이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기사에 누가 악성 댓글이라도 달면 재학생, 졸업생이 반박해 주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3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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