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쌀밥 같은 빵 <오월의 종 대표 정웅 님>
2017.11.30   조회수 : 8,769    댓글 : 10개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제빵 학원에 등록했다기에 빵에 관한 특별한 사연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빵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돈 주고 사 먹지도 않았다니까요.

오월의 종 대표 정웅 님(50세)이 멋쩍게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계속 승진해 설령 임원이 된다 해도 지금과 똑같은 일을 하겠구나 생각하니 회의가 들었어요. 아무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잘 살고 있다 믿었던 그의 세계가 흔들렸다. 지금이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아 사표를 던졌다. 그날 회사 건너편에 있는 제빵 학원을 발견했다.

회사를 꽤 다녔는데 그런 곳이 있는 걸 처음 알았어요. 생각 없이 그저 왔다 갔다만 한 거죠.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 창문 너머로 훔쳐봤어요. 문득 ‘빵
만드는 일이면 내가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리 한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그가 빵을 만들겠다니. 가족, 친구, 회사 동료 모두가 입을 모아 반대할 때 갓 결혼한 그의 아내만 이렇게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봐요.” 그 말에 힘을 얻어 그는 빵을 굽기 시작했다. ‘얼마나 가겠어?’ 하며 빈정거리던 사람들이 무색하게 오늘까지도.


자격증을 딴 지 3년 되던 해 그는 일산에 ‘오월의 종’ 빵집을 열었다. 3년 후엔 꼬박꼬박 집에 돈을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던 거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그가 천연 발효종 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빵집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무척 생경했다. 사람들은 후식으로 먹을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빵을 선호했다.

저는 쌀밥 같은 빵을 만들고 싶었어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빵, 이런 식감이면 좋겠다 하는 빵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빵. 그래서 천연 발효종 빵을 만들기 시작했죠.

사람들이 모르는 빵을 만들다 보니 ‘오래된 빵이다’, ‘상한 것 같으니 환불해 달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결국 빵집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가게 보증금도 못 건지고 빚까지 졌다.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나요?” 그는 질문을 받자마자 대번에 답했다. 수천 번도 넘게 포기하고 싶었다고.


제빵 학원에 다닐 때 반죽의 기본인 ‘둥글리기’를 못했어요. 나이 들어 왔으면서 노력도 안 한다고 된통 혼난 날, 기가 팍 죽더라고요. 이 길이 아닌가 고민에 빠졌죠. 그 후에도 힘든 순간이 수없이 많았어요.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일인데 중간에 포기 할 수 없었어요. 누구도 찬성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나선 만큼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은 듣기 싫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그는 신입 제빵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나도 서른 넘어 시작했어.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야. 기죽지 마. 빵을 만들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돼. 시간을 갖고 열심히 하면 너도 잘 만들 수 있어.”하고 격려한다.


2005년, 이태원에 다시 빵집을 열었다. 작고 소박한 가게. 거기서 그는 혼자 일했다. 마지막 기회라 여겼기에 빵 종류도 추려서 평소 하고 싶던 딱딱한 유럽식 빵만 만들어 팔았다. 외국인이 많은 동네라 기대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3년간 묵묵히 빵을 구웠다. 신제품을 개발하다 손님이 부르면 나가서 빵을 담아 주고, 오븐을 보러 갈 땐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찾는 이가 하나둘 늘었고 사람들은 그의 빵에 길들여졌다. 그러던 어느 저녁, 빵이 전부 팔렸다. 전날까지도 반 이상 남아 이웃에게 나눠 준 터라 의아했다.


이상하다,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겼나?

그는 밖으로 나가 거리를 둘러봤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빵은 매진됐다. 그리고 어느덧 사람들이 줄 서는 빵집이 되었다. 입소문이 나자 백화점 입점 제안이나 프랜차이즈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럼 빵 맛이 변해서 안 돼요. 제 빵은 손이 많이 가고 오래 걸려요. 대량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가 만드는 빵은 대개 밀가루, 물, 소금 그리고 효모종으로만 반죽한다. 이런 저배합 빵일수록 조리법이 같아도 매번 동일하게 나오기 어렵단다. 지금껏 들은 칭찬 가운데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이 “빵 맛이 여전히 똑같네요.”라고. 오랜 단골이던 영국 손님이 한국을 떠났다가 3년 만에 다시 들러 해 준 말이다. 앞으로도 그런 빵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빵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그의 손을 거친다. 처음 제빵을 시작할 때부터 그가 바라던 바다. 오븐을 여는 순간이 매번 설레는 것도 여전하다. 어떤 맛이 날지 궁금하기에. 원하는 맛이 나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한다. 그러면서 사는 재미와 행복을 느낀다.


오늘 만든 빵이 오늘 다 팔리면 그걸로 족해요. 더 욕심내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빵을 만들고, 또 그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길 바라죠. 나도 손님도 빵으로 행복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오래오래 빵을 만들고 싶어요.

 

 인터뷰 전문은 좋은생각」 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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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0)

해바라기★태양
201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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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시내요.  남들은 체인을 늘려 수익을 늘리려할텐데~~그맛을 고수하기위해 노력하시는 모습보니 정말 멋지시네요. 최고예요.~~^^😊
김병수
20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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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대구에서 오월의 종 빵집이  초심을 잊지말고 계속 장사히시길 빕니다.꺽이지않코 밀어 부친 그 노력과 노고에 눈끝이 찡하네요.연말 잘보내시고 늘 건강하십시요.
정경훈
201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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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감사합니다.
마음에 울립니다.
지란지교를 꿈꾸며
2017.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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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대단하신것 같아요! 존경스럽네요 ! 저도 요즘 현재 제가 하는 일이 과연 맞나?  다른 길을 찾아야되나? 하는 고민중이네요 나이는 51인데 .... 
강태룡
201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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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어습니다 
신정호
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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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보기 드문 분입니다. 초심을 유지하는 모습이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좋은 생각 편집부 취재 기자님도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저런 좋은 분을 어떻게 알고 취재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좋은 생각에서 항상 앞에 나오는 코너라 주목해서 읽는 글인데
인터넷으로 보니 좀 더 새롭네요.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
123
2018.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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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가면 한번 방문해볼게요 
이기도
2018.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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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빵 만드는 사람이군요 ^^
돈을 버는 장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는 당신같은 분을 존경합니다.
오늘여기 김순희
201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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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잔에  뚝잘라 폭찍어 ..
침샘자순극 되네요^^
이태원 어디쯤일까  기회가 닿기를 
유이슬
2018.03.09
빵을 좋아하는마니아로 꼭 한번 먹고 싶네요...
이태원가면 꼭 들럴곳이 생겼네요
쭉욱 사업번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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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준비 <서울 성모 병원 수간호사 박명희 님>
2018.10.10   조회수 : 1,653    댓글 : 2개
누구나 살면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난다. 그를 통해 성숙해지고 어느덧인생길까지도 달라진다.서울 성모 병원 호스피스 완화 의료 센터 수간호사 박명희 님(48세)도 그랬다. 그녀는 신입 시절, 암 병동에 배치받아 일했다.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의사를 도와 치료할 수 있어 행복했다.간호사라는 직업에 자긍심이 높아질 무렵, 병동의 60대 위암 환자가 숨을거두었다. 그는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초보 간호사가 저지른 실수에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너그러이 보아 넘겼고,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자책하면“내 보기에 박 간호사는 아주 잘하고 있어.” 하고 격려했다. 그토록 고마운 이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해 줄 게 없었다. 무력하게 그를 떠나보낸 후 그녀는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다른 환자의 임종 역시 볼 자신이 없어피하고만 싶었다.그때 상담 수녀가 호스피스 병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환자가 품위 있게생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라고 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곳에서 환자들의 마지막을 함께하자.’라고 생각하며 근무를 자원했다. 당시는 병원에 호스피스 병동이 있음에도 환자들은 물론이고 의사나 간호사조차 어떤 곳인지잘 몰랐다. 그녀 역시 첫 출근을 앞두고 막막했다.립스틱을 바르고 가도 되나, 분위기가 심각할 테니 웃으면 안 되겠지 등 별별 생각을 다 했어요.한데 예상과 달리 병동 분위기는 밝았다. 한 병실에선 기타 반주에 맞춰 트로트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이 다 함께 까르르 웃었다.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들 역시 그녀처럼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생각이 든 것이다. 모범 답안 같은 얘기로 마지막을 잘 준비할 수 있게 이끌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부끄러웠다.‘내 역할은 그분들이 행복하게 사는 걸 돕는 거구나.’ 싶었어요. 마지막 여정이 편안하도록 동행하는 것임을 알았죠.그로부터 18년간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돕고 지친 가족을 보듬어 주며 종내 다가오는 마지막을배웅한다.아직도 ‘호스피스 병동은 죽으러 가는 곳이다, 아무 치료도 하지 않는다.’라고 오해해요. 물론 질병 자체에 대한 치료를 안 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여러방법으로 통증을 덜어 주어 환자가 식사도 하고 몸에 활력도 생기게 합니다.그래서 예상보다 오래 사는 분이 많아요.무수히 많은 임종을 보아 온 그녀에게 어떻게 해야 생의 마지막을 잘 준비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답했다.마지막을 인정하고, 떠나기 전에 지난삶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거죠. 쉬운 일은아니에요.그녀 역시 세상을 떠나는 건 두렵다.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생각하다 보니 대신 잘 사는 법을 고민하게 됐다.서울 성모 병원에서는 ‘소원 성취 프로그램’을 마련해 사회 복지사와 자원봉사자가임종 전 환자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녀는환자들이 외식, 가족 여행 등 일상에서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고 했다.군대에 있는 아들 면회를 간 엄마도, 아버지 산소에 가고 싶어 한 60대 남자분도계세요. 사제를 지망하던 신학생은 성지 순례를 원해서 의료진과 다녀오기도 했죠.그때 알았다. 하고 싶은 일은 미루지 않고 ‘지금’ 해야한다는걸. 누군가에게 해 주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환자가 원하는 게 있으면무조건 그날 다 해 드리려고해요. 내일, 아니 몇 시간도기약할 수 없거든요. 나에게, 남에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잘 사는 법 아닐까요.사랑하는 이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본 가족들은 말한다.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건 운 나쁜 누군가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는 일이라고.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특별한 건 없다. 그저 주변 사람을 소중히 대하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내 생의 마지막도, 가족과의 이별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이 일을 하며 살 수 있어서 제가 오히려 고마워요. 많은 환자가 부족한 저를거쳐 갔어요. 그 덕에 저는 값진 경험의 양식을 쌓았죠. 앞으로도 그럴 테고요.그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이 경험으로 다른 환자를 더 잘 돌봐 드리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번 생에는 호스피스 간호사로만 살려고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수학에 삶이 있다 <고양외고 수석 교사 박성은 님>
2018.09.07   조회수 : 2,551    댓글 : 0개
십오 년 전 어느 날, 한 학생이 물었다.선생님, 수학은 배워서 어디다 써먹어요?아이들에게서 자주 받는 질문이라 습관처럼 답하곤 했다. “대학 가지.”“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날따라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그러려고 수학을 배우나?’ 결국 수업이 있다는 핑계로 나중에 다시 오라며 돌려보냈다. 학생의 얼굴엔 실망감이 스쳤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이 질문에 답을 찾자, 그러지 못하면 교편을 놓자고 생각했지요.‘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를 일으키고 많은 학생이 기다린다는 고양외고 수석 교사 박성은 님(54세)의 수업은 이렇게 시작됐다.이전까지 그는 수학 성적을 잘 받게 하는 교사였다. 초임 교사일 적엔 유명입시 학원 수업을 수강하며 강사들의 비법을 배웠다. 우스운 말투와 과장된몸짓으로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하나 이내 알았다. 학생들을 잠깐 집중시키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그는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길 바랐다. 수준별로 학습지를 만들었다. 복사기도 없는 시절이라 쉬는 시간마다 등사기를 밀어 제작했단다. 난이도에 따라자신 있는 문제를 풀게 한 뒤 조별 토론을 시켰다. “요즘 말로 하면 ‘자기 주도학습’이에요. 그 효과를 예전부터 깨달은 셈이죠.” 그렇게 여러 방법을 동원해수학을 가르쳤으나 결국 목표는 대학 입학이었다.성적을 잘 받게 해 대학만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돌아보니 젊은 시절겪은 일 때문이었지요.막 교단에 섰을 무렵, 그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수업을 하고 싶었다. 당시는학력고사 시대. 학생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기출문제만 풀었다. 문제도제대로 읽지 않고 기계적으로 답을 구하는 걸 보며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사회 이슈를 수학 문제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시를 낭독하며 개념을 설명하기도 했다. 지친 고 3 학생들은 그의 수업을 반겼다.일 년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가 담당한 반 학생들 성적이 다른 교사가 가르친 반보다 낮은 것.일 년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두고두고 생각했어요. 무엇이 문제였을까. 애들이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낮은 이유는 뭘까.선배교사에게 상담하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지나가다 잠깐 봤는데 수업 시간에 딴얘기가 많더라. 대학 갈 수업을 해야지.그때부터 줄곧 점수를 위한 수업을 했다.하지만 학생의 질문에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수학’을 가르쳤으나 ‘수학 교육’은 하지 못했음을. 입시 위주의 교과 내용 전달자에만 머무른 것이다. ‘그렇다면 수학 교사로서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는 고민에 빠졌다.그날 이후 그는 십육 년째 인문학을 접목한 수학 수업을 연구한다. 수학 개념에 문학, 사회 문제, 영화 등 다양한 소재를 입혀가르치는 것. 초임 교사 시절의 수업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때는 재미있게 가르치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지금은 그 교수법으로 수학에 흥미를 불러일으킨 다음 수학적 개념과 원리를 통해 ‘삶의 이야기’를서로 나눈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스스로‘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까지이끌어 준다.‘부등식’에서 남과 비교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게 하고, ‘사칙 연산’을 통해 약속과 규칙의 중요성을 되새겨 준다. 수학을 삶과 연결시키는 것이다.학생들의 변화는 놀라웠다.수업 중에 엎드려 있는 학생들이 사라지고 수학 시간을 기다리기까지 한단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학생들이 수학을 두고 ‘해도해도 모르겠어요.’ ‘늘 처음처럼낯설어요.’ 하는 건 수학이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왜 배우는지 모를 수밖에요. 그런 학생들에게 ‘수학은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학문이다.’라고 알려 주면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0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다 <미술사학자 이내옥 님>
2018.08.08   조회수 : 1,800    댓글 : 0개
모든 존재에는 아름다움이 들었죠.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국립 박물관에서 34년간 큐레이터로 일한 미술사학자 이내옥 님(63세). 그는 박물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를 고민했단다. 관람객이 몰려오고, 선배들도 “참 잘생겼구먼.” 하고 감탄하는 유물이 그의 눈에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그 유물이 얼마나 가치 있고 빼어난 미를 지녔는지 책에서 배워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으로 느끼질 못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이런 미적 안목이나 감수성은 어릴 적부터 보고 느끼고 맛보며 자연스럽게 체득하기 마련이다. 하나그러기 어려웠다. 문화의 싹을 키우기엔 먹고살기가 고달팠다. 그만이 아니라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박물관에서 유물을 살피고, 번호를 매기고, 사진 찍어 대장을 작성하기를수없이 반복했다. 하루는 어느 도자기를 보다 문득 알았다. 진품과 가품의 차이를.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많이 보고, 계속 공부하면 눈이 열린다는걸.그러고도 꽤 오랜 시간 유물을 보고 절절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공부가 진척되고 견문을 쌓은 뒤에야 남의 지식이 아니라 내 관점으로 하나하나 보게됐다. 이른바 안목이 생긴 것. 여기엔 유물만이 아닌 모든 사물의 아름다움을보는 것까지 포함되었다.박물관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 덕분이지요.부여 박물관 백제 도록을 만들 때 만난사진 작가 준초이 선생. 최고의 상업 작가인 그는 어떤 것도 좋아 보이게 찍었다. 그러니 백제 유물이 지닌 아름다움은 오죽잘 전달해 주랴 싶어 사진을 부탁했다. 그역시 자신만만했다.하지만 준초이 선생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 사유상을 찍으며 별 감흥을 느끼지못했다고 고백했다. 하루 내내 촬영했으나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찍겠다는 것. 어렵게 허가를 얻어 재촬영 일정을 잡았다.촬영 날, 그는 3톤짜리 대형 받침대를 제작해 가져왔다. 그 위에 불상을 올려놓고천천히 돌려 가며 보고 또 보았다. 어느 순간 반가 사유상의 콧날부터 이마까지 이어지는 날렵한 선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그런 후에야 겨우 만족할 만한 작품을 얻었다. 만약 준초이 선생이 금동 반가 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한 채 사진을 찍었다면 좋은 작품이 탄생했을까.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인 그가 힘을 빼고 겸허하게 다가가 마침내 그만의 방식대로 유물사진을 찍은 것이다.얼마 전 작고한 최영도 선생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변호사로 일하며 평생 토기를수집했다. 토기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암 수술 후 입원 중에도 좋은 물건이 있다는 말에 병실을 빠져나가 지방까지 달려가 사 왔단다. 그런 선생이 수집한 토기 1,700여 점을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했다. 변호사답게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토기를 어떻게 다루고 보관할지도 썼다.그는 최 선생을 포함해 많은 수집가를 만났다. 그들은 처음엔 한 점, 두 점모으는 데 재미를 붙이다 점점 수집품의 장래를 고민한다. 그러다 결국 그 물건들을 공공 박물관에 기증한다. 자신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그 아름다움을 살리지 못할 바에는 대접받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소유가 아닌존재로 두는 것. 그는 수집가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요즘은 젊은이들에게 배웁니다. 음식의 맛을 찾는 것도 하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겁니다. ‘미니멀리즘(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방식)’에서부터 ‘소확행(작고 확실한 행복)’까지, 우리 시대와 달리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삶의 방식에 격려를 보냅니다. 또한 책을 많이 읽고, 여행을 자주 하면서 이류나 삼류가 아닌 최고의 것을 보면 안목이 열릴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쪽으로 나아가고 있고, 또 그렇게 되리라 낙관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삶은 훨씬 풍성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9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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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면 기회는 온다 <쇼트 트랙 선수 김아랑 님>
2018.07.09   조회수 : 3,293    댓글 : 3개
여름날에도 빙상 경기장은 몸이 움츠러들 만큼 공기가 찼다. 김아랑 선수(22세)는 익숙한 듯 얇은 패딩 점퍼 차림에 야무지게 윗옷까지 챙겨 왔다. 힐끗보더니 대뜸 옷을 건넨다. “추우시죠? 이거 걸치실래요?” 지상 훈련 중인 후배를 보자 살뜰히 안부를 묻고, “우아! 국가 대표 처음 봐요.” 하고 신기한 듯 쳐다보는 어린이에겐 손을 흔들어 준다.문득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쇼트 트랙 1,500미터 결승전이 떠올랐다. 간발의 차로 메달 획득이 무산된 김아랑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눈물을 쏟는 최민정 선수에게 다가가 다독였다. 활짝 웃는 그 장면은 사람들 뇌리에 오래 남았다.“정말 축하해 주고 싶었어요. 대견하잖아요.”그 일에 대해 묻자 그녀가 답했다. 그러곤 덧붙였다.“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후회 없는 경기여서 저 자신도칭찬해 줬어요.”후련한 마음에서 우러난 미소였다.그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친오빠와 스케이트를 시작했다.제가 스케이트를 신고도 잘 서 있어서 코치님이 한번 시켜 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대요.스케이트는 흥미로웠다. “특히 쇼트 트랙은 1등으로 앞서다가도 넘어질 수있고, 마지막까지 누가 이길지 모르는 재미가 있어요.” 또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기회가 온다는 것도.하지만 어린 시절 탄탄대로만 달린 건 아니다. 아들딸을 운동시킬 만큼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고향 전주에는 빙상 경기장이 단 한 곳뿐이라훈련 장소도 부족했다. 팀을 옮겨 서울에 올라왔으나 또래 유망주들에게 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연습에 매진했다. 굳은 심지를 다질수 있었던 건 부모님 덕분이다.단 한 번도 성적 때문에 혼난 적이 없어요. 시합 다녀오면 결과도 묻지 않고 ‘우리딸 수고했어.’ 하셨죠.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중 3 때 시합을 망친 후 펑펑 우는데어머니가 말했다.넌 잘할 수 있는 아이야.이 시합이 전부가 아니잖아. 잊어버리고 다음에 잘하면 되지.그때 알았다. 성적이 나빠도, 국가 대표가 되지 못해도 부모님은실망하지 않는 것을. 또 언제나 ‘다음’이 있다는걸. 이 일은 그녀가 위기를 겪을 적마다 스스로를 다잡고 일어서는 힘이 됐다.그녀는 소치 동계 올림픽과 평창 동계 올림픽에 연이어 출전해 각각 금메달을 목에걸었다. 결과만 보면 선수 생활이 승승장구한 듯 보이지만 부침이 많았다. 국가 대표에 선발돼 열아홉 살에 소치 올림픽에 나갔으나, 경기 당일 급성 위염으로 주 종목인1,500미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그 후 2016/17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탈락하기도 하고, 스케이트 날에 얼굴을 베이는 사고도 겪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생각했다. ‘다음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자.’ ‘열심히 해서 다음 시즌에는 국가 대표가 되자.’‘다리나 허리를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이런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소치 올림픽에서 계주 금메달을땄고, 2017/18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종합 2위를 기록해 평창 올림픽에 나갔으며, 얼굴 흉터 역시 점점 옅어졌다.다만 2016/17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탈락했을 땐 꽤나 마음고생했단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쟤는 끝났어. 다시 국가대표 되기 힘들겠지.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하나 상황을 탓하기보다 인정하자고 마음먹었다.“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더 열심히 하면 돼.” 어머니도같은 말을 해 주었다. “괜찮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지.”혹시 불안한 적은 없었어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불안감은 준비가부족할 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 온다고 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으려 철저하게 준비했단다. 평창올림픽을 겨냥해 2년 훈련 계획을 세웠다.‘국가 대표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아예 배제했다. 초반에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훈련을 거듭하자 부담감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어느순간 스케이팅이 더 즐거워졌다.4년간 준비한 올림픽을 마친 지금 좀 편안해졌느냐고 물었다. 다부진 대답이 돌아왔다.제가 운동선수이긴 한가 봐요. 계속 운동을 해야 하니까 마음놓고 쉬지 못하겠어요. 아직은 더 해야 할 때구나 싶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8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마음을 담아야 맛이 난다 <동무밥상 대표 윤종철 님>
2018.06.07   조회수 : 3,715    댓글 : 4개
돈 욕심 부리면 망한다는 걸 남한 와서 배웠지요.함경북도 온성 출신인 윤종철 님(63세)은 1998년 두만강을 건너, 2000년에 남한으로 왔다.딸을 위해 돈을 벌고자 간 중국에서 남한 모습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그가본 한국은 자유롭게 일하고, 개인이 잘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다단계에 빠지기도 하고 이자를 많이 준다고 해서 투자했다가 정착금을 홀랑 날리기도 했어요. 돌아보면 전부 내 탓이에요. 쉽게 큰돈을 벌고 싶어 사기꾼들 말에 혹한 거죠. 욕심 부린 나를 반성했어요. 내가 잘하는 걸 열심히 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사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기술이 있었다. 바로 요리였다.열여덟 살에 군 입대 하니 나를 훈련소가 아닌 옥류관으로 데려가지 뭡니까.그전까지 부엌엔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한데 하루아침에 평양 최고의 식당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의 훈련은 요리였다. 옥류관에서 넉 달간 보조로 일하며 부지런히 익혔다. 그런 다음 다른 훈련병 세 명과 시험을 치렀다.기왕 칼을 잡았으니 최고로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밤잠 설쳐 가며 ‘요리 공부’를 한 끝에 일 등을 차지해 군 장성 식당에 배치됐다. 고위급 장성 열여섯 명을 위한 곳이었다. 각기 다른 지역 출신이라 입맛도,좋아하는 음식도 제각각. 맛없으면 호통치고, 먹고 싶은 음식 조리법을 알려주며 만들라고 했다. 그곳에서 십 년간 요리하며 군 복무를 마쳤다. 하지만 요리사로 살기는 싫었단다. “북한에선 요리사가 괄시받는 직업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유명 요리사였는데 평생 대접을 못 받으셨죠.” 그래서 회령 경공업 단과대학에서 발효를 배워 졸업 후 공장에서 된장, 간장 등을 만들었다.군에서 갈고닦은 요리 실력은 한국에서 뒤늦게 빛을 발했다. 북한 여러 지역의 음식을 꿰뚫는 덕분에 이호경 대표의 요리 교실 ‘호야쿡스’에서 북한 음식을가르치고 또 음식점을 차릴 발판도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 가게를 열 때만 해도 이런 후미진 골목까지 누가 찾아올까 싶었다. 그런데 입소문이 나며 사람들이 가게앞에 줄 서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자신의 기술로 정성을 다하면 통한다는걸.그는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 가게를닫는 월요일에도 아내와 김치를 담근다. 김치를 통에 담는 것까지 직접 해야 ‘딱 소리나는 맛(북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하는말)’이 난단다.영업을 일찍 마치는 일요일에는 순대를만든다. 그가 자랑하는 함경도 식 순대.돼지고기를 다져 갖은 채소와 찹쌀을 넣어 속을 만듭니다. 그걸 돼지 창자에 채워 넣죠.말로 하면 쉬운데 막상 만들면 무척 힘듭니다. 그래도 제대로 만든 북한 음식을 보여주고 싶어 계속합니다.그는 정통 북한 음식을 고집하지만 한국사람들 입맛을 고려해 요리법을 조금씩 바꾸고 메뉴도 과감히 변경한다. 그가 제일좋아하는 음식인 옥수수 국수를 손님들이즐기지 않자 메뉴판에서 지우고, 얼마 전오리탕도 돼지국밥으로 바꾸었다.평양냉면은 옥류관에서 배운 대로 만들되 여기에 맞게 변형했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먹을 때 가위로 자르지 않는다. 그래서면을 반죽할 때 목 넘김에 좋으라고 식소다를 섞는다. 하나 건강을 생각하는 남한 사람들은 화학조미료를 꺼려 뺀단다. 국물도 북한에서는 꿩고기를주로 썼지만 여기서는 구하기 쉬운닭과 꿩을 섞어 쓴다. 또 동치미 국물을 넣어 쨍한 맛을 내고, 간장으로간한다.집에서도 다 내가 해요. 가게에서든 집에서든 계속해야지, 안 그러면 요리가 늘지 않아요.그래서 외식도 꺼린다. 북한 음식은 원재료를 살려 살짝 싱거운 데 반해 남한 음식은 양념을 진하게 한단다. 북한 음식의 맛을 잊을까 겁이 난다고 했다.술집에 가서도 안주로 과자 몇 개만 집어 먹을 뿐 다른 건 일체 맛보지 않는다.우리 어머니가 해 준 옥수수 국수, 그 맛이 아직도 기억나요.그의 고향에서는 옥수수 농사를 지어 먹고살았다. 어머니가 해 준 옥수수국수는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우거짓국에 옥수수 면을 넣어 끓인 것이었다. 여덟 자식 입에 먹을 걸 넣어 주느라 부엌을 떠나지 못한 어머니. 비록 어머니에게서 요리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걸 깨우쳤다. 음식에 마음을담아야 맛이 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부엌에 선다. 그의손을 거친 음식이라야 손님상에 나간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7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정성을 들이는 일 <염색가 신상웅 님>
2018.04.27   조회수 : 3,278    댓글 : 0개
좋아서요. 다른 이유가 뭐 있겠어요.많고 많은 색 가운데 왜 푸른 쪽물을 들였느냐는 질문에 염색가 신상웅 님(50세)은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십수 년 쪽물만 들인 사람의 대답이라고하기에는 어쩐지 밋밋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저는 푸른색을 가장 좋아해요. 쪽 염색으로 다채로운 푸른색을 만날 수있죠. 쪽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에요. 언뜻 보면 같은 색처럼 보이지만 모아 두면 다 달라요.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쪽 염색을 하며 살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이십오륙 년 전, 대학 다니던 무렵이었다. 인사동에 천만 걸어 선보인다는 전시회가 열려 찾아갔다. 천연 염색가 한광석이 자연의 빛깔을 끄집어내 천에 재현한 작품들이었다.색에 예민한 미술 학도라 그랬을까, 호기심이 생긴 그는 무작정 작가에게편지를 보내 방문하고 싶다고 청했다. 허락을 받아 여름 방학 내내 벌교에 머무르며 농사일을 거들고 염색 과정을 지켜보았다. 학기 땐 주말에 수시로 찾아갔다.귀한 일 같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그렇게 하기를 십 년. 그때까지도 색을 그림에 이용하려 했을 뿐 염색을 할 생각은 없었다.서른을 앞두고 그는 늘 바라던 긴 여행을 떠났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서 문득 초등학생 때 떠나온 충북 괴산의 고향 집을 떠올렸다. 청주, 서울에서 유학하며 ‘언젠가 다시 가야지.’ 하는 마음을 품은 터였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 ‘내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 보니 염색이 떠올랐다. 갖가지 색 가운데 쪽빛을 들이고 싶었다.서른 중반 봄부터 그는 쪽씨를 얻어 모판에 뿌렸다. 오월 중순쯤 10센티 정도 자란 쪽 모종을 밭에 옮겨 심으면 석 달 후엔 1미터를 웃돌 만큼 훌쩍 컸다.쪽에서 염료를 뽑는 일 또한 쉽지 않다.다 자란 쪽을 베어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은 후 물을 가득 채운다. 이삼 일 뒤 에메랄드빛 물이 우러나오면 쪽을 건져 내고 석회를 넣은 다음 힘껏 저어 앙금을 만든다. 여기까지가 염료를 모으는 일이다.미리 내려 놓은 잿물에 앙금을 섞은 다음 매일 저어야 해요. 하루에도 열 차례 이상 반복해야 발효가 잘됩니다. 한두 달은그렇게 저으며 기다리는 거지요.발효 과정까지 마치면 쪽물은 농익어 염색 준비를 마친다. 그다음엔 천을 쪽물에담가 염색한다. 긴 시간 동안 수많은 과정을 거쳐 흰 천에 푸른색이 스며드는 순간가슴이 벅차다. 주변에 푸른 천들이 켜켜이쌓이고, 그 천을 흔들면 푸른 먼지가 펄럭이고, 그의 손도 푸르게 물든다.일본엔 이런 말이 전해진답니다. 쪽 염색을 하는 사람은 결코 나쁜 일을 할 수 없다고. 손에 물든 푸른색 때문에 금세 들통나거든요.처음엔 색에 압도당해 염색물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한데 삼사 년쯤 지나자 조금단조롭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천의 두께, 물들이는 횟수, 햇볕, 공기까지 여러 요인이 결합해 새로운 푸른색이 태어난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색을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고민을 거듭하던 무렵 그는 연암 박지원의 글을 읽다가 ‘화포’를 만났다. 화포는 무늬를 넣어 쪽물을 들인 천. 연암이 화포 두루마기를 입은 기록이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전의 염색과 다른,푸른 천에 생기를 불어넣을 방법이었다.그는 화포를 ‘천에 무늬로 의견을 남기는것’이라고 정의하며 덧붙였다.저도 푸른 천에 제 생각을 담고 싶어졌어요.2005년부터 그는 염색을 쉬는 겨울마다여행을 떠났다. 시작은 쪽 염색과 화포를조사하다 책에서 본 묘족(중국 남부에 주로거주하는 소수 민족)이었다. 그들은 일상에서쪽물 들인 옷을 입었다. 또 밀랍으로 천에무늬를 만들었다. 바로 그가 찾던 화포였다. 서점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보고 몽족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중국,태국, 베트남, 라오스, 일본 등의 구석구석을 살폈다.제가 원하는 걸 찾으면 좋지만, 본다고해서 달라질 건 없었어요. 한국에는 이제 남아 있지 않은, 제가 하는 일의 ‘현재’를 보고 싶었어요.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요.그가 찾은 마을 몇몇에서도 전통이 빠르게 쇠퇴했다. 품과 비용이 많이 드니 어찌 보면 지금 시대에는 경제적이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이런전통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여성이 손수 물들여 무늬를 넣은천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모습을 보았고, 상해의 도심에서 푸른 화포로 치파오를 만들어 파는 가게도 만났기에. 그리고 스스로가 정성을 들여 십수 년간 이 일을 하고 있기에.전통적인 방식을 좋아할 단 1퍼센트 사람을 위해서라도 저는 계속하고 싶어요. 누가 찾을 때 남아 있도록.*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6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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