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좋은생각 카테고리

쌀밥 같은 빵 <오월의 종 대표 정웅 님>
2017.11.30   조회수 : 224    댓글 : 0개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제빵 학원에 등록했다기에 빵에 관한 특별한 사연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 빵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돈 주고 사 먹지도 않았다니까요.

오월의 종 대표 정웅 님(50세)이 멋쩍게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계속 승진해 설령 임원이 된다 해도 지금과 똑같은 일을 하겠구나 생각하니 회의가 들었어요. 아무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잘 살고 있다 믿었던 그의 세계가 흔들렸다. 지금이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아 사표를 던졌다. 그날 회사 건너편에 있는 제빵 학원을 발견했다.

회사를 꽤 다녔는데 그런 곳이 있는 걸 처음 알았어요. 생각 없이 그저 왔다 갔다만 한 거죠.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 창문 너머로 훔쳐봤어요. 문득 ‘빵
만드는 일이면 내가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리 한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그가 빵을 만들겠다니. 가족, 친구, 회사 동료 모두가 입을 모아 반대할 때 갓 결혼한 그의 아내만 이렇게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봐요.” 그 말에 힘을 얻어 그는 빵을 굽기 시작했다. ‘얼마나 가겠어?’ 하며 빈정거리던 사람들이 무색하게 오늘까지도.


자격증을 딴 지 3년 되던 해 그는 일산에 ‘오월의 종’ 빵집을 열었다. 3년 후엔 꼬박꼬박 집에 돈을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던 거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그가 천연 발효종 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빵집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무척 생경했다. 사람들은 후식으로 먹을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빵을 선호했다.

저는 쌀밥 같은 빵을 만들고 싶었어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빵, 이런 식감이면 좋겠다 하는 빵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빵. 그래서 천연 발효종 빵을 만들기 시작했죠.

사람들이 모르는 빵을 만들다 보니 ‘오래된 빵이다’, ‘상한 것 같으니 환불해 달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결국 빵집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가게 보증금도 못 건지고 빚까지 졌다.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나요?” 그는 질문을 받자마자 대번에 답했다. 수천 번도 넘게 포기하고 싶었다고.


제빵 학원에 다닐 때 반죽의 기본인 ‘둥글리기’를 못했어요. 나이 들어 왔으면서 노력도 안 한다고 된통 혼난 날, 기가 팍 죽더라고요. 이 길이 아닌가 고민에 빠졌죠. 그 후에도 힘든 순간이 수없이 많았어요.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일인데 중간에 포기 할 수 없었어요. 누구도 찬성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나선 만큼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은 듣기 싫었거든요.

그래서인지 그는 신입 제빵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나도 서른 넘어 시작했어.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야. 기죽지 마. 빵을 만들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돼. 시간을 갖고 열심히 하면 너도 잘 만들 수 있어.”하고 격려한다.


2005년, 이태원에 다시 빵집을 열었다. 작고 소박한 가게. 거기서 그는 혼자 일했다. 마지막 기회라 여겼기에 빵 종류도 추려서 평소 하고 싶던 딱딱한 유럽식 빵만 만들어 팔았다. 외국인이 많은 동네라 기대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3년간 묵묵히 빵을 구웠다. 신제품을 개발하다 손님이 부르면 나가서 빵을 담아 주고, 오븐을 보러 갈 땐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찾는 이가 하나둘 늘었고 사람들은 그의 빵에 길들여졌다. 그러던 어느 저녁, 빵이 전부 팔렸다. 전날까지도 반 이상 남아 이웃에게 나눠 준 터라 의아했다.


이상하다,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겼나?

그는 밖으로 나가 거리를 둘러봤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빵은 매진됐다. 그리고 어느덧 사람들이 줄 서는 빵집이 되었다. 입소문이 나자 백화점 입점 제안이나 프랜차이즈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럼 빵 맛이 변해서 안 돼요. 제 빵은 손이 많이 가고 오래 걸려요. 대량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

그가 만드는 빵은 대개 밀가루, 물, 소금 그리고 효모종으로만 반죽한다. 이런 저배합 빵일수록 조리법이 같아도 매번 동일하게 나오기 어렵단다. 지금껏 들은 칭찬 가운데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이 “빵 맛이 여전히 똑같네요.”라고. 오랜 단골이던 영국 손님이 한국을 떠났다가 3년 만에 다시 들러 해 준 말이다. 앞으로도 그런 빵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빵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그의 손을 거친다. 처음 제빵을 시작할 때부터 그가 바라던 바다. 오븐을 여는 순간이 매번 설레는 것도 여전하다. 어떤 맛이 날지 궁금하기에. 원하는 맛이 나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한다. 그러면서 사는 재미와 행복을 느낀다.


오늘 만든 빵이 오늘 다 팔리면 그걸로 족해요. 더 욕심내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빵을 만들고, 또 그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길 바라죠. 나도 손님도 빵으로 행복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오래오래 빵을 만들고 싶어요.

 

 인터뷰 전문은 좋은생각」 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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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의 기쁨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 <청소 직업 전문 학원 원장 정재현 님>
2017.11.07   조회수 : 2,369    댓글 : 0개
청소를 누가 돈 주고 해? 누구나 할 수 있는데.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해야지.어떤 이에게 청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막상 하자니 귀찮은 일로다가온다. 하지만 청소 직업 전문 학원 정재현 원장(52세)은 주위를 깨끗이 정리해야만 정신 역시 맑아진다고 믿는다. 청소는 사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것이다. 카피라이터, 옥외 광고 전문가, 농부, 여행사 대표 등 그동안 거친 이력은 화려하지만 지금의 일에 가장 만족한다고 말한다.카피라이터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한번은 전자수첩 홍보를 맡았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꽤 많은 돈을 벌자 자신감이 생겨 옥외 광고 분야까지진출했죠.그런데 갑자기 아이엠에프의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잘될 줄 알았던 일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늘 위기에 가로막혔다.3개월 동안 집에 틀어박혀 망연자실했죠. 이제 남은 건 몸뚱이뿐이구나하면서요. 그러다 예전에 일본으로 어학연수 갔을 때가 떠올랐죠. 거기서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청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었어요. 청소부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대단했죠. 내겐 아직 건강한 몸이 있으니 그 분야에 도전하면 어떨까 싶었어요.“저기……. 청소를 배우고 싶습니다.” 청소 업체에 연락하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을 받지 않아도 좋으니 시켜만 달라고 매달리길 수차례,고맙게도 한 청소 대행업체 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지저분한 곳을 쓸고 문지르는 게 전부였지만 청소에 매력을 느끼기 충분한 기회였다. 무엇보다 일의 순서를 익힐 수 있었다.여러 번의 사업 실패 후 배운 게 있어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만 신경쓰면 절대 잘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마 어린 나이였다면 청소를 초라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몸을 쓰는 일만의 특별함을 깨달았어요. 땀 흘릴수록 정신이 맑아진다는 거죠. 공간이 말끔해진 만큼 머릿속 잡념이 싹 사라졌어요. ‘아, 누구나 깨끗한 공간에서 살 필요가 있구나!’ 이 분야에서 점점 비전을 찾았죠.그는 본격적으로 청소 대행업체를 차렸다. 일이 들어오면 도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아내와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부끄러워고개 숙인 적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제법 단골도 생겼다. 어느집은 너무 지저분해 처음엔 치우는 데만 여덟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기간을 두고 몇번씩 방문하자 시간이 짧아졌다.고객은 몰라보게 달라진 표정으로 자랑했다. “이제야 깨끗한 곳에서 지내는 기쁨을 알겠어요. 날마다 조금씩 치우다 보니성격도 밝아졌고요. 고맙습니다!”이 분야의 전문성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2013년, 청소 전문 학원을 열었다. 주위에선 누가 청소를 돈 주고 배우느냐며 타박했지만 ‘나처럼 알고 싶은 사람이 있을것이다.’라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 역시 청소를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묻고 또 물었다. 어떤 세제를 써야할지 몰라 공부하고, 제조사에 연락하다 밤을 샌 적도 있었다.타일만 해도 목재, 도기, 유리 등 종류가 여러 가지예요. 어떤 도구에 무슨 세제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죠. 또 원인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주된 고민 중 하나가 부엌 정리거든요. 부엌에서 제일 중요한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마루와 싱크대 사이 공간이에요. 먹을 게 있고 어두운 곳이라 바퀴벌레가 생기기 쉽거든요. 먼지를 닦고 환기를 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해충을 막을 수 있죠. 이렇듯 파고들수록 공부할 것이 많다 보니 수강생들이 입을 쩍 벌린다니까요. 무엇보다 청소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깨닫는 과정이 보람있어요.스물셋의 청년부터 일흔넷의 어르신까지, 나이와 사연은 천차만별이지만 누구 하나 청소를 쉽게 여기지 않는다. 단순 기술뿐 아니라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운 그들은 자신을 ‘삶을 변화시키는 전문가’라 말한다.청소를 통해 배운 게 많기에 갈수록 자부심이 커져요. 예를 들어 정리를 위해선 버릴 걸 정해야 하죠. 고객을 만나 보면 냉장고엔 작년 추석 음식, 옷장엔 3년 전 입었던 옷이 수두룩해요. 그때마다 질문하죠. ‘이게 꼭 필요합니까?’ 그럼 대부분 고개를 저어요. 당사자로선 큰 결심이죠. 버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얻기 위해선 먼저 버려야 한다는 걸 직접 경험해 보니 제 인생도 단순하고 명확해졌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2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시간이 지나간 자리 <가구 수리 전문점 양호방 대표 오양호 님>
2017.10.10   조회수 : 4,418    댓글 : 0개
이거 진짜 소중한 거예요.오래되긴 했는데 아직 쓸 만해요.가구 수리 전문점 양호방에 전화한 사람 대부분은 비슷하게 말한다. 일한지 42년, 오양호 님(60세)은 갖가지 사연이 담긴 가구를 매일 어루만졌다.타고난 손재주로 어린 시절부터 지게나 쟁기를 곧잘 만들던 그였다. 고향을떠나 서울로 올라와야 했지만 자신 있었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설계할 때 단 몇 밀리만 실수해도 조립할 수 없었다. 가장 어려운 건 가구 칠이었다. 물감 배합이 너무 뻑뻑해도, 묽어도 안 됐다. 조금 잘못 칠해도 가구가쭈글쭈글하거나 물감이 마르지 않았다. 오로지 손의 감각으로 가장 적당한 배합을 찾아야 했다.10년 동안 가구 제작, 수리, 칠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자 실력이 탄탄해졌다. 미처 몰랐던 나무의 매력을 발견한 것도 그 무렵이다. 예컨대 오동나무는손으로 못을 꾹 누르면 들어갈 만큼 가볍고 무른 재료였으나 벌레가 먹지 않고, 잘 닳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가구는 습도나 온도에 따라 계속 늘었다 줄었다 해요. 그런 것을 하나씩 알수록 애착이 생겨 나중엔 향기만 맡아도 행복했어요. ‘넌 결이 어쩜 이리 근사하니.’ ‘고놈, 참 잘생겼다.’ 하며 서로 교감했죠.이후 그는 수리만 전문적으로 했다. 의뢰품에 따라 매번 다른 기술이 필요해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1994년, 그는 아예 자신의 가게 ‘양호방’을 차렸다.하루는 노부부가 낡은 자개장을 보여 주기에 ‘할머니, 차라리 하나 사는게 어떠세요?’라고 물었더니 냅다 화내는 거예요. ‘희로애락을 같이한 복(福)있는 물건인데 어찌 함부로 버리라 하느냐, 당신은 직업 정신도 없느냐’면서요.숨은 사연을 몰랐던 거예요. 사정을 알았다면 절대 못했을 말이죠.제아무리 장인이 만들었고, 귀한 재료가 쓰였을지라도 애정이 담긴 물건이 최고예요. 물건에 추억이 담기면 더 이상 물건이아닌 보물이거든요. 저 역시 아버지의 2단장을 잃어버린 걸 두고두고 후회하죠. 아버지 몰래 서랍에 박힌 못을 빼서 토끼 사육장을 만들다 혼난 일, 아버지가 고장 난 장을 고치던 모습 등 아직도 옛일이 생생합니다. 만약 그걸 간직했다면 아버지의 흔적을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을 텐데…….물론 모든 손님이 결과에 만족한 건 아니었다. 옛것 그대로의 멋을 살렸더니 오히려 어디가 달라졌느냐고 따지는 손님도 있었다. 종이만큼 얇게 대패질해 벌어진 틈을메우는 게 복원 작업이다. 그만큼 과정이까다롭다.그리 치열하게 했는데 왜 속상하지 않겠어요. 그럴 땐 우선 설득해요. ‘이 가구만의멋이 있어요. 무조건 새것처럼 고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돈은 받지 않을게요. 대신절대 다른 수리점에 맡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이대로 사용하는 편이 훨씬 좋아요.’손님의 요구에 맞추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 그는 양심을 지키려 애썼다. 노력할수록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붙이고 채우는 것, 큰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때론 너무 화가 나 작업대를벗어난 적도 많았다. 기껏 잘하다가 칠만 조금 어긋나도 전체 모습이 엉망이되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멍청한 것, 알면서도 그런 실수를 해!’라며 자책도 했다. 하지만 뚝심 있게 매달리는 것 말고는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숱하게 좌절하는 사이 가구는 그에게 참을성을길러 준 셈이다.참 고마운 존재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좀 더 아껴 주면 좋겠어요. 일반 가정에 많이 두는 원목 가구에서 제일 중요한 건 습도 조절이죠. 날씨가 건조할때는 방바닥을 청소하듯 물걸레로 닦아 주면 좋아요. 온도에 예민하니 절대가습기나 난방 기구를 올리면 안 되고요. 의자나 서랍처럼 매일 쓰는 것은3~5년 뒤에 수리하세요. 중간에 한 번만 손봐도 평생 쓸 수 있으니까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마음을 새기는 일 <현인당 대표 최병훈 님>
2017.09.07   조회수 : 7,386    댓글 : 1개
동대문 역 근처 인장 거리는 갖가지 풍경으로 가득하다. 물건 사는 손님, 엄마 찾는 어린아이, 나물 파는 할머니 등 하루도 조용할 날 없다. 현인당 대표최병훈 님(59세)은 그런 소리를 모두 잊은 채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한다.여기 창문 좀 봐요. 밖이 안 보이게 죄다 종이로 붙여 놨지. 눈이 오나 비가오나, 밖에서 싸움을 하나 노래를 부르나 내 일에만 집중해야 하거든요.40년 가까이 도장만 팠다는 그는 학창 시절, 체조 선수가 되길 원했다. 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 운동은 사치였다. 매일 동생과 돈 벌 궁리를 하다 21살때 서울로 상경했다. 손에 든 건 쌀 두 가마니가 전부였다.제가 넉살이 얼마나 좋게요. 냉면 가게가 보이면 ‘아주머니, 힘드시쥬?’ 하면서 종일 일을 도왔어요. 그럼 수고했다며 공짜로 끼니를 대접했죠. 버스 안내양을 누나라고 부르며 버스도 곧잘 얻어 탔고요. 그러다 운명처럼 한 스승을 만났어요. 저를 거둬 준 조중선 선생이죠.그는 조중선 선생 밑에서 9년을 공부했다. 처음엔 사포로 도장 가는 법부터배웠다. 도장 재료를 까칠한 사포로 문질러야 비로소 표면이 평평해져 글자를새길 수 있었다. 반듯하게 가는 게 쉽지 않아 온종일 사포와 씨름하는 날도 많았다. 그러다 머리가 아닌 손의 감각으로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중엔 눈을 감고도 할 정도였다.보통 하루 30~40개를 팠으니 지금까지완성한 작품만 한 트럭이 넘는다. 밤낮으로기술을 연마한 덕에 이제 나무는 물론 물소 뿔, 상아, 옥 등 못 다루는 재료가 없다.필체에도 힘이 담겨 주변에서 글자가 살아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손님들이 만족할 때 가장 행복해요. 사연 없는 사람이 없거든요. 어느 날은 한 남자가 상아 도장을 가져와서 말했어요. ‘갑자기 세상을 떠난 아버지 거예요. 제 이름을 이 뒤에 새기고 싶습니다. 다른 건 다 버려도 이건 도저히 놓을 수가 없어요.’ 그런사정을 들을 땐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다해일하죠.손님이 오면 우선 이름의 총 획수를 따져 본 뒤 성명학책을 펼치죠. 만약 풀이한뜻이 좋지 않으면 점을 찍거나 믿을 신(信)을 넣는 식으로 글자를 추가해 새겨요. 이름 획수를 좋은 쪽으로 맞추는 거죠. 다들복 받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거예요.그렇게 선한 맘으로 일할수록 그에게도변화가 찾아왔다. 한때 운동선수를 꿈꿀만큼 혈기 왕성했던 그는 세상 무서울 게없었다. 웬만해선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았다. 다혈질인 성격도 한몫했다.그런데 도장을 만난 뒤로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 상태가 그대로글자에 드러나니 변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느낀 탓이다.처음엔 성격이 급해 사람들이 재촉하거나 부당한 일을 당하면 손이 달달 떨렸어요. 그렇게 떨리는 손으로 도장을 파니 정갈한 글씨가 나오겠어요. 만약 가게 앞에누가 떡하니 주차를 했다 쳐 봐요. ‘이거 누구야. 당장 차 안 빼!’라고 씩씩댄 뒤 책상앞에 앉으면 글자를 삐뚤빼뚤 쓰겠죠. 화낸들 그게 누구한테 돌아오겠어요. 다 나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거죠. 일은 마음속에 내공을 쌓는 시간이에요.그는 자신과 가족을 지켜 준 일을 오랫동안 붙잡고 싶다. 날마다 다섯 시에일어나 배드민턴을 치고 철봉 운동을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남들은 수작업이 머지않아 기계에 밀려날 거라 예상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주위를 둘러보세요. 명품은 다 사람 손에서 나온 거예요. 기계식 도장은한 번에 여러 개를 만들 수 있어 효율적일지 몰라도 레이저로 제작해 모양이다 같아요. 반면 수제 도장은 달라요. 아무리 한 사람이 만들었어도 완벽히 똑같은 건 세상에 없죠.그에겐 두 명의 수제자가 있었다. 그가 제자들에게 강조한 건 처음과 끝이일치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그의 좌우명이기도 하다.마지막까지 글자에 정성을 다해야만 명품이 나와요. 사람을 대하거나 일할때도 마찬가지죠. 인생의 변함없는 진리예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0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나는 다시 그곳으로 간다 <소방관 백균흠 님>
2017.08.10   조회수 : 2,006    댓글 : 2개
그는 매일 이 기도를 떠올린다.반드시 두 사람을 구하게 해 주소서. 내 등에 업힌 한 사람, 그리고 나 자신. 언젠가 신의 뜻에 따라 목숨을 잃게 되면 신의 은총으로 저의 가족을 돌보아 주소서.27년째 소방관으로 살아가는 광진 소방서 백균흠 님(51세)은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제일 늦게 나오는 사람이다. 처음 화재 현장을 봤을 땐 그도 사람인지라 선뜻 위험을 무릅쓰기 망설여졌다.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두려움을 이겨 내길 수차례, 자신이 아니면 그들을 구할 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 았다.늘 두려움과의 싸움이었죠. 그중에서도 제일 겁나는 건 생명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이었어요.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택가에 화재가 났어요. 도착해 보니 집 밖에서 아이 엄마가 제발 자식들을 구해 달라며 울부짖었죠. 손발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 둘이 손을 꼭 잡고 쓰러져 있었어요.아이를 업은 순간 그는 직감했다. 이미 숨이 멎었다는 것을. 한 계단씩 내려가는 발걸음이 그리 무거울 수 없었다. 아이들을 보자마자 세상이 무너진 듯오열하는 그녀 앞에서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마스크 안으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내가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1분만 빨리 왔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는 자꾸 지난 일을 되짚으며 자신을 탓했다.사고 현장을 접한 뒤엔 악몽에 시달리기도 해요. 그런데 ‘이 감정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하고 가만히 앉아 고민할 겨를이 없어요. 또 출동해야 하니까요. 몸으로 부딪히며 정신없이 경험을 쌓다 보니 조금씩 단단해지더라고요. 무엇보다 수고했다며 커피 한 잔 건네는 사람들, 밤새 일한 소방관들을 위해 라면을 끓여 준 마을 주민이 있어 힘을 냈죠. 소방서 앞에 몰래 먹을 것을 두고 가는 족발집 사장님, 때마다 문자 메시지로 안부를 묻는 이들까지 고마운 인연을 잊지 못해요.갈수록 그의 눈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다들 누군가의 자식이자 나의 이웃이었다. 그럴 수록 일에 더 매달려 위험한 상황에도 여러 번 처했다. 의류 공장에 불이 났을 땐 옷감을 들다 허리를 크게 다쳤다. 디스크로 입원해 장기간 치료받았지만 후유증이 남아오래 앉아 있지 못한다.제가 다치는 것보다 가족들이 속상한 게 더 힘들어요. 딸이 어릴 때 휴대 전화 케이스에 늘 밴드를 넣어 줬어요. ‘아빠, 오늘도 다치지 말아요.’ 하면서요. 밴드가 떨어질 날이 없었죠. 11월 9일, 소방의 날에 태어난 큰아들 역시 애틋해요. 지적 장애가 있어 남보다 모든 게 서툴지만 제겐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죠. 얼마 전엔 결혼 2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가족과 해외여행을 갔어요. 오사카에 있는 4박 5일 동안 새삼 서로 간의 사랑을 느꼈죠.한참 이야기를 풀어놓던 그가 문득 물었다.그거 아세요? 인생은 짧고 세상엔 아름다운 게 참 많잖아요. 그런 것만 보기에도 부족한데 저희는 매일 안 좋은 것만 찾아다녀요. 그래도 주저 않고 달려갑니다. 그곳엔 제가 반드시 구해야 할 생명이 있으니까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9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커피 한 잔의 가치 <미네르바 대표 현인선 님>
2017.07.07   조회수 : 2,133    댓글 : 2개
신촌에서 가장 오래된 원두커피 전문점, 조금은 촌스럽지만 사랑과 낭만이 넘쳐흐르는 곳. 미네르바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가게 한쪽에 걸린 액자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세월의 변화를 온몸으로 맞으며 자리를 지킨 지 올해로 43년, 하숙촌이 원룸 거리로 바뀌고, 신촌 명소들이 자취를 감추는 동안 날마다 문을 열고 커피 향을 냈다.미네르바 대표 현인선 님(55세)은 영업 비결이 담긴 공책 하나를 꺼냈다. 빛바랜 종이엔 커피 내리는 법, 선곡 목록, 거래처 연락처 등이 빼곡하게 적혔다. 이곳을 인수할 때 전 주인에게 받은 것이다.1990년대 초반부터 쓰인 공책이에요. 주인이 바뀌는 사이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어요.그는 여러 사람의 애정이 깃든 곳을 자신만의 색깔로 채우는 중이다. 미네르바는 1970년대부터 ‘사이펀 방식’으로 커피를 만들었다. 기계 하단 유리병엔 물을 담고, 상단엔 커피 가루를 넣은 뒤 불을 붙이면 압력이 생겨 물이 빨려 올라가 가루를 적신다. 대부분의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그는 지금까지 이 방법을 고수했다. 대기업 상권이 골목을 채우고 유행이 빠르게 변했지만 그럴수록 중심을 잡으려고 했다.일할 때 중심 잡기가 참 어렵죠. 자꾸 주변과 비교하고 손익을 따지니까요. 예를 들어 저 역시 손님이 오래 자리를 차지하면 초조할 때가 있었어요. 그러다 ‘나한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뭘까?’ 따져 봤죠.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 편안한 분위기를 제공하는 것’ 그게 제가 원하는 바이자 카페 운영의 기본이었어요.손님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바꾸자 모든 일에 체계가 잡혔다. 커피가 맛있어야 좋은 서비스를 할 수 있으니 우선 재료에 신경 썼고, 만드는 법을 철저히 연구했고, 청결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혹여 손님이 커피를 남기면 부족한 점은 없었는지 되짚어 봤다.스트레스도 줄었어요. 예전엔 까다로운 손님을 만나면 감정적으로 대했는데 그 안에서 배울 점을 발견하니 이해심이 생겼죠. ‘아, 저 사람은 혹시 다른 곳에서 언짢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며 내면을 살피려고 노력했어요. 손님의 불만에 반감을 갖지않고 최대한 맞추려 노력하면서 응대 기술을 익혔죠.그가 지금껏 가게를 유지한 데는 건물주의 배려도 한몫했다. 그동안 건물을 팔거나 헐지 않았고, 임대료도 무턱대고 올린 적 없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속 썩이지 않고 매달 월세를 보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사람이다.손님들이 행복하게 카페 문을 나설 적에 보람을 느껴요. 오랫동안 여기 서 있으면 다 보이거든요. ‘아, 저분들은 오늘 소개팅하나 봐.’ ‘연인끼리 대화하더니 훨씬 사이가 가까워졌구나.’ 그러면서 속으로 기도해요. 여기서 좋은 에너지를 얻고 돌아가 자기 일을 더 활기차게 하시라고. 그런 생각을 하니까 더욱 책임감이 생겼어요.커피 맛은 천차만별이다. 신선한 재료와 적절한 양도 필수지만 무엇보다 천천히, 정성껏 내리는 게 중요하다. 신기한 건 애정을 쏟은 커피는 확실히 부드럽고 목 넘김 또한 좋다는 사실이다. 사소한 차이가 맛에 그대로 전달되니 작은 일도 허투루 할 수 없다.아르바이트생이 처음 오면 꼭 하는 말이 있죠. 시급에만 신경 쓰면 돈 버는 것 이상의 경험을 배울 수 없다고요. 초기엔 저도 매출에만 관심을 뒀어요. 그럭저럭 장사는 되었는데 갈수록 시야가 좁아졌죠. 지금까지 돈 버는 일에만 집중했다면 아마 다른 부분을 놓쳤을 거예요. 맛보다 홍보에 신경 쓰고 유행을 따라 메뉴를 바꿨을지도 모르죠. 이것저것 시도하느라 가게의 색깔을 잃지 않았을까요. 이익만 따지면 절대 깊이가 생기지 않아요. 내가 맡은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게 필요하죠.”*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8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바다가 나를 부를 때 <수중 사진가 장남원 님>
2017.06.12   조회수 : 4,776    댓글 : 5개
파도는 단 하루도 쉬는 법이 없다. 바다로부터 왔다가 다시 먼 바다로 물러가는 일을 지치지 않고 매일 한다. 수중 사진가 장남원 님(67세) 역시 오랜 시간 바다 곁에 머물렀다. 1979년부터 했으니 벌써 40년에 가깝다. 한때는 사진이 지겨워 장비를 모조리 팔았지만 머지않아 바다로 돌아갔다. 물속에서 사진 찍는 것만이 유일한 기쁨이었다.참 치열하게 지냈어요. 그런데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훌륭한 동료가 주위에 수두룩한 거예요. 잘나가는 기자를 만나면 ‘한번 이겨 보고 싶은데…….’ 하는 목마름이 가득했어요. 그런 갈증을 느끼던 차에 수중 사진을 접했죠. 선배들이 찍은 걸 보니 눈이 확 뜨이더라고요. 이 분야에 집중하면 인정받을 것 같았어요.당시 대다수의 사진가는 땅 위의 것을 찍는 데 열을 올렸다. 물속에 관심을 두는 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어릴 때부터 물을 좋아했던 그는 밤낮없이 수중 사진에 매달렸다. 스킨 스쿠버는 물론 빛 조절이나 각종 장비를 다루는 일에도 능해야 하기에 배울 것이 배로 늘었다. 퇴근 후 자료실을 찾아 우수한 해외 작품들을 살피며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홀로 고민했다. 주말에도 어김없이 찬 바다에 몸을 담그며 한 컷이라도 더 담으려 애썼다.사진에서 제일 중요한 건 목표를 뚜렷하게 세우는 거예요. 막상 들어가 보면 이것저것 신기한 게 많거든요. 괜히 여러 가지에 눈길 주다 보면 처음 목표를 이룰 수 없어요. 고래를 찍기로 했으면 오직 그것만 생각해야 해요.모두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수중 사진에는 제약이 많다. 잠수 시간, 깊이, 수온 등을 고려하지 않고 덤볐다간 위험에 빠진다. 처음엔 좋은 그림을 포기하고 올라오기가 무척 어려웠다고.깊은 바다에 몸을 담그면 전율할 정도의 고요함이 몸을 휘감는다. 때로는 그 고독함이 두려울 정도다. 그 속에서 그는 가만히 기다린다. 예전에는 기다리던 대상이 나타나면 우왕좌왕하다 망치기 일쑤였지만 이내 깨달았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참고 기다리면 기회는 또 온다는 사실을. ‘목표를 분명히 할 것, 조급하지 말 것, 욕심부리지 말 것.’ 바다는 그를 키워 낸 스승이었다.배운 것만큼 잃은 것도 있어요. 최근엔 패혈증을 앓아 전신 마취를 일곱 번이나 했죠. 멕시코 수중 동굴에 갔다가 물을 잘못 마셔 바이러스에 감염됐거든요. 심장, 대장, 혈관, 간 등 여러 군데를 수술하다 보니 삶의 의지가 사라지더라고요. 그런데 바닥을 치고서야 서서히 희망이 생겼어요. 문득 창밖을 보는데 비 내리는 광경 하나도 눈물 나게 아름다운 거예요. 반드시 여기에서 나가 저토록 눈부신 인생을 다시 살아 보리라 다짐했죠.큰 고비를 겪었으니 두려울 법도 한데 그는 내년 전시회 준비에 한창이다. 목숨이 위험했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왜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바다로 향할까. 몇 년 전 그가 남긴 글에서 그 이유가 어렴풋이 느껴졌다.오늘도 평화의 바다로부터 멀리 떠나 집채만 한 파도 속을 누빈다. 나는 인생 열락과 슬픔의 순간들을 바다에서 겪었다. 바다에 있으면 항상 바다의 하인처럼 행동했다. 바다의 뜻을 거스르지도, 바다를 이기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언젠가 바다가 잘했다며 이름을 불러 줄 때 나는 바다를 떠날 것이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7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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