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새벽 햇살

교도소에서 온 희망 편지

희망 공부
2019.02.11   조회수 : 198    댓글 : 3개
나는 스무 살이 되도록 구구단을 잘 외우지 못했다. 친구들은 군대에 다녀오고 직장에서 자리를 잡았으나 나는 학력 제한으로 군대도 못 가고 변변한직업도 없이 방황했다.그러다 죄를 짓고 이곳에 왔다. 처음엔 아무 의미 없이 수형 생활을 했다. 공장에서 일하고, 정해진 시간에 밥 먹고, 잠자며 기계적으로 살았다.어느 날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키워 준 할머니가 접견을 왔다. 할머니는 부쩍 연로해 보였다.“오늘 널 만나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네가 나중에 출소해서 살 수 있는길은 그 안에서 공부하는 것뿐이다.”할머니는 유언을 남기듯 말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약속했다. 그제야 할머니 얼굴이 밝아졌다.며칠 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생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알고 내게 마지막 당부를 한 걸까.그럼에도 나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공부해서뭘 해, 졸업장 같은 건 필요 없어.’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그러다 이송을 갔다. 다시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새 보금자리에서 지내는 중 검정고시 응시생을 모집한다는공고를 보았다. 공장 작업이 고되고 무료했던 터라 너도나도 신청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예비 시험을 치렀다. 합격 여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당연히 떨어질 거라 여겼다. 한데 며칠 뒤 담당자가 시험을 통과했으니 원서를 쓰러 가자고 했다. ‘그럴 리 없는데.’ 하면서도 무척 기뻤다.하나 곧 걱정이 들었다. 국어, 영어, 수학…….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더군다나 내가 소속된 공장에서 나만 통과한터라 공장 담당자까지 잘하라며 응원하는게 아닌가. 부담이 커져 잠이 오지 않았다.주변에서 하나둘 나를 도와주고 격려해주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매일 공부에 전념했다.마침내 중학교 검정고시 전 과목에 합격했다. 이듬해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합격해졸업장을 갖게 되었다.자신감을 얻은 나는 방송 통신 대학을알아보고 예비 시험까지 치렀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포기했다. ‘그럼그렇지, 내가 무슨 대학을…….’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등록금이 없는 독학사 과정을 시행한다는것이다. 하나 금전적 부담은 여전했다. 책열일곱 권이 필요한 데다 시험 단계별로 응시료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때마침 한 직원이 자매결연을 맺은 교회목사님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덕에 교재비를 지원받아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열심히 준비해서 1단계 시험을 치렀으나다섯 과목 중 네 과목이 불합격이었다.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역시 나는 안 되나?’싶어 힘들었다.소식을 들은 목사님은 오히려 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그리고 따뜻한 말로격려해 주었다. 지금까지 잘해 왔다고 힘을실어 주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듬해 1단계 시험에서 전 과목합격했다. 이어 나머지 단계는 물론 졸업시험까지 통과했다.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던 내가 대학 졸업장까지 받았다. 결국 운명은 오래된 나의습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었다.누군가 예전의 나처럼 자신감을 잃었다면,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 친다면 용기를내면 좋겠다. 나 역시 계속 희망으로 나아가리라 다짐한다.“할머니, 저 약속 지켰습니다.”
꼬리 없는 붕어빵
2019.01.08   조회수 : 432    댓글 : 1개
우리 부모님은 어머니의 외도로 이혼했다. 군인인 아버지는 일이 바빠 나와세 살 많은 누나를 키우기 어려웠다. 새 삶을 살려던 어머니에게도 우리는 걸림돌이었다.어머니는 큰어머니를 찾아가 우리를 부탁했다. 큰어머니는 화를 내며 “이렇게 갈 거면 보육원에 보내겠다.”라고 했다. 결국 우리 남매는 어머니 그리고 새아버지와 같이 살았다.새아버지는 차가웠으나, 가끔 외식도 하고 놀이공원도 가며 추억을 쌓았다.한데 얼마 후, 새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동생이 태어났다. 그 뒤로 차별이시작됐다.처음엔 구박과 꿀밤 정도였다. 한데 “밥값을 해야 한다.”라며 고된 일을 시키더니, 날이 갈수록 때리는 정도가 심해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무렵에는 얼굴에 멍이 들어 어머니 화장품으로 가렸다. 그래도 숨겨지지 않아 학교에 못 가는 날도 있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다투는 날이 늘더니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도 맞기 시작했다. 우리 남매는 불안 속에서 살았다.어머니는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새아버지는 우리를몰아붙였다. “느그 엄마 어디 갔노? 어디 있는지 알제?” 우리는 공포에 떨었다.폭력은 더 심해졌다. 여린 누나는 무슨 용기에선지 매번 내 앞을 가로막았다.무서워하면서도 비켜나는 일이 없었다. 누나의 떨림이 뒤에 숨은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덕에 나는 조금이나마 매를 피할 수 있었다. 누나는 내게 영웅이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희망이자 웃음을 주는 친구였다. 늘 엄마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다.어느 캄캄한 새벽, 누나가 나를 깨웠다. “현관문 나가면 누나 손잡고 뛰어.”혹시 들키면 어쩌나 두려웠지만 누나를 믿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우리는 한참을 뛴 다음 정처 없이 걸었다. 놀이터나 상가 건물을 전전했다.다음 날 저녁,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는 울면서 누나를 졸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어른에 대한 적대감때문에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계단에서 졸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집에 안 가고 뭐 하니?” 누나는“신경 쓰지 마세요.” 하며 내 손을 잡고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를 했다. 아저씨는 그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나는 다시 졸기 시작했다.얼마 뒤 돌아온 아저씨가 누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붕어빵이었다. 우리는 망설이다 허겁지겁 먹었다. 살면서 가장 맛있게먹은 음식이었다.우리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외할머니 댁에 갔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군에서 전역한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갔다. 이후 누나와 나는 집 앞 붕어빵 가게를지날 적마다 아저씨의 따뜻한 손길을 떠올렸다.붕어빵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우리 형편으론 하나에 몇백원 하는 붕어빵도 사 먹기 힘들었다. 한 마리라도 살 수 있는 날엔 반씩 나누어 먹었다. 누나는 늘 내게 머리 부분을 내밀었다.나는 어린 마음에 ‘꼬리 쪽이 맛있나?’ 싶었다. “왜 맨날 누나만 꼬리 먹는데? 나도꼬리 먹고 싶다.” 내가 투덜대자 누나는 말했다. “머리를 먹어야 머리 좋아지지. 커서똑똑해지려면 머리 먹어.”그땐 멋모르고 서운했는데 이제야 알았다. 팥이 많고 부드러운 쪽을 내게 양보했다는 것을.지금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해 이곳에 왔다. 누나는 하나뿐인 동생 없이는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붕어빵을 들고 누나를 찾아갈 날을 기다리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성실히지낸다.“누나, 요즘은 꼬리에 크림 들어간 붕어빵도 있대. 실컷 먹어 보자. 사랑해.”
나를 사랑하기
2018.12.07   조회수 : 602    댓글 : 3개
나는 축복받지 못한 채 태어났다. 갓난아이 때 부모님에게 버려졌다.어떤 분들의 도움으로 나는 한 가정에 입양됐다. 여섯 살까지는 귀여움과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하지만 행복도 잠시, 양부모님의 불화로다시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러다 여덟 살에 보육원에 맡겨졌다.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두 번 버림받은 나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초등학생 때도시락을 싸 가지 못해 물로 배를 채운 일도 잊지 못한다.서러워하며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을 간절히 기다렸다. 한 아이가 엄마와 손잡고핫도그를 먹으며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만 엉엉 운 적도 있다.열여덟 살에 보육원을 퇴소했다. 사회는냉정한 곳이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두려웠다.갈수록 성격이 거칠고 비뚤어졌다. 수차례 싸움을 하며 말썽을 일으키다 결국 이곳까지 왔다. 내게 내려진 형벌 앞에 나는무너져 내렸다.이곳에서 깨달은 게 있다. 나의 정체성과내 삶을 비관하며 보낸 사십 년의 세월이허무했다. 무엇보다 그간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자숙의 시간을 보내며 운동과 독서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중이다. 늘 부정적이던 사고방식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수감생활 중 얻은 큰 변화다.그간 수없이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며 지냈다. 출소를 앞두고 다짐한다. 자유를 되찾으면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살겠다고.
아들 곁으로
2018.10.10   조회수 : 776    댓글 : 3개
나는 유치원 졸업을 앞둔 일곱 살 아들과 둘이 살았다. 일찍 이혼하고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한데 아빠 될 준비가 부족해서였을까, 돌아보니 아이에게 상처만 주었다.나 또한 어린 시절 부모님이 일찍 이혼해 홀어머니 곁에서 외롭게 자랐다. 그래서 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외로움과 불안감을 아이에게 똑같이 주고 말았다.이곳에 온 날 아침, 나는 구속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여느 때처럼 일어나 아이 유치원 보낼 준비를 하고 아침밥을 차려 주었다. 등원 버스 타러 가는길에 왠지 마음이 이상했다. 긴 이별을 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게 뽀뽀하고버스에 올라 손 흔든 아이의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지금까지 아이를 안아 주지 못했다.이곳에 오자 눈앞이 캄캄했다. 머릿속엔 아이 생각뿐이었다.지금은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고 있다. 아빠가 인사도 없이 사라져 얼마나불안했을까? 내 잘못으로 인해 뒤바뀐 환경.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힘들것이다.유치원 졸업식이 열렸으나 나는 아이 곁에 있어 주지 못했다. 홀로 참석한 어머니는 손자에게 말했다.“할머니가 깜빡하고 꽃을 못 사 왔어. 미안해.”그러자 아이가 답했다.“괜찮아. 추우니까 얼른 집에 가자.”얼마나 쓸쓸했을까. 할머니 걱정까지 하는 아이 생각에 가슴이 무너졌다. 초등학교 입학식도 아이에겐 외로운 추억으로 남았다.시간이 흘러 봄이 되자 아이가 어머니와함께 접견을 왔다. 나는 면회 내내 창 너머에 있는 아이를 안아 줄 수도, 손잡아 줄수도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렸다.나는 편지를 썼다.“사랑하는 아들, 아빠가 이곳에 있어 깜짝 놀랐지? 우선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겠구나. 아빠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서 벌을 받으러 왔어. 아빠 대신 사랑하는 할머니가 옆에 있잖아. 할머니 말 잘 듣고 씩씩하게 지내면 아빠 금방 갈 거야. 아빠가 보고 싶을 때는 기도하렴. 그럼 한결괜찮아질 거야. 아빠는 늘 아들 마음속에있어. 너는 소중하다는 걸 늘 기억하렴.”아이는 면회 와서 울기만 했다. 가기 전에는 몇 번씩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나도 눈물 흘리며 자책했다.‘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나는 평생 이시간을 잊지 못하리라.’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나는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내 그릇된 행동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곳에 있는 시간이 내게 다시 주어진 기회라고 생각한다. 말투도 고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한다.한 달에 한 번씩 면회 오는 아이가 여름방학 땐 매주 찾아왔다. 한번은 아이가 물었다.“아빠, 여기서도 아이스크림 먹어요?”내 생활이 궁금해서인지 아니면 더운 날씨에 걱정되어 물은 건지는 모르겠으나, 이곳에 오면 안 된다는 것만큼은 알려 주고싶어 말했다.“여긴 슈퍼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는 힘든 곳이야. 아들은 아이스크림을 사러 슈퍼에 갈 수 있지만 여긴 그런 자유가없어. 나쁜 마음으로 살면 행복을 누리지못해. 그러니까 우리 아들도 친구들이랑싸우거나 거짓말하지 말고 바른 마음으로지내야 하는 거야.”이제는 면회 때 아이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기도 한다. 하지만 돌아서면 여전히슬프다. 아이는 매일같이 나를 생각하며기도한단다. 나도 다짐했다. 다시는 아이와이별하지 않겠노라고.아이를 위해 이 시간을 성실히 보내는 것이 내 첫 번째 목표다. 오늘도 아들 곁으로돌아가는 날을 꿈꾼다.
자연으로 돌아가
2018.09.07   조회수 : 909    댓글 : 0개
나는 농업 학교를 졸업한 뒤 수박 농사에 도전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며 농사만지은 부모님 그늘에서 자란 터였다.부모님의 만류에도 젊은 패기로 밭 이만여 평을 임대하고, 대출을 받아 농기계를구입했다. ‘난 아버지처럼 가난한 농부는안 될 거야.’덜컥 큰 규모로 일을 벌이니 예상보다 자재비, 인건비, 농약값 등이 적잖았다. 우여곡절에도 수박은 튼실하게 자랐으나, 장마로 인해 수박값이 예년의 절반 밑으로 떨어졌다. 결국 헐값에 처분했다. 손에 남은 건7천만 원의 빚뿐이었다.모든 걸 정리하고 연고 없는 서울로 갔다. 식당 설거지, 일용직 노동 등을 전전했다. 기댈 수 없는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마음을 짓눌렀다.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고향으로 갔다. 앙상해진 아버지는 내게 유언을 남겼다. “어디 갔다 왔냐. 밥은 먹었냐? 너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땀 흘리며 살아야 해. 도시는 너와 맞지 않아.” 나는대답하는 대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떠나보냈다.그럼에도 나는 다시 도시로 갔다. 돈의유혹을 이기지 못해 잘못을 저질렀고, 결국 이곳에 들어왔다.아버지 뜻대로 자연의 순리에 맞게 살지못했음을 후회한다. 이제는 안다. 돈과 성공이 삶의 전부가 아님을. 내가 돌아갈 곳은 고향뿐인 것도.자연으로 돌아가 정직한 땀방울로 땅을일구며 속죄하고 싶다. 아버지 유언에 삶으로 답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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