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새벽 햇살

교도소에서 온 희망 편지

조금 더 같이
2018.01.08   조회수 : 331    댓글 : 0개
재소자들도 각자 맡은 역할이 있다. 나는 취사장에서 식사를 만들었다. 그러다 추가 사건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첫눈 내리는 아침, 법원에 가려고 호송차에 오르는데 누군가 뒷마당에 서서 포승줄에 묶인 나를 지켜보았다. 취사장에서 함께 일하는 이모였다. 그날 6개월의 형을 추가로 받았다. 재판을 마치고 돌아와 따지듯 물었다.​“이모, 아침에 저 보셨죠?”“그래.”“왜 그러셨어요. 부끄럽잖아요.”“부끄럽긴. 우리처럼 매일 보는 사이에는 그런 거 없어.”​이모는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6개월이라며? 이모랑 조금만 더 같이 살자. 바쁘게 일하다 보면 금방 지나는 시간이야. 그래도 너는 이참에 바깥 구경 하고 왔잖니? 나는 한 발짝 나가 본 게 언제인지 몰라.”​포승줄에 묶인 모습이나 늘어난 형기보다 이모에게 투덜거린 게 더 부끄러웠다.​“수고했어. 힘들었을 텐데, 밥 차려 놨으니 어서 먹어.”​식탁을 보니 닭볶음탕과 따뜻한 밥, 국이 평소보다 푸짐하게 담겨 있었다. 나를 위한 밥상이었다. 지금은 직업 훈련을 받으려 다른 곳에 왔지만 여전히 이모와 편지로 안부를 주고받는다. 창밖에 내리는 눈을 보니 그날 눈 맞으며 서 있던 이모 모습이 떠오른다.
용서
2017.11.30   조회수 : 790    댓글 : 1개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반장이었던 나는 수업을 마치면 선생님과 교무실에서 반 이야기를 논의하곤 했다. 선생님은 간식을 건네며 상담도 해 주었다. 어느 늦가을, 토요일 수업을 마친 후였다. 선생님이 코스모스씨를 받아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평소 좋아하던 선생님의 부탁이라 신났다. 그래서 점심도 거르고 열심히 돌아다녔다. 한데 양이 기대에 못 미쳤다. 그날 저녁, 어머니가 말했다.“내일 내가 더 찾아볼 테니 넌 공부해.”다음 날, 어머니는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한창 공부하는데 누군가 밖에서 나를 불렀다. 나가 보니 어머니가 동네 사람에게 업혀 있었다. 도로변에서 씨를 모으다 차에 치인 것이다.사고를 낸 운전자는 도망갔다고 했다. 선생님은 그 사실을 알고 내가 졸업할 때까지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운전자는 잡혔지만, 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보상도 못하고 구속됐다. 우리 가족은 나와 어머니 둘뿐. 그의 아내가 매일 찾아와 눈물로 빌었으나 나는 끝내 용서하지 않았다.​세월이 흘러 어머니는 건강을 되찾았고, 나는 가구점에서 일했다. 한데 배달하다 교통사고를 내 이곳에 들어왔다. 그사이 집안은 엉망이 되었다. 어머니는 병으로 입원하고 아내와는 이혼했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든 무렵, 피해자와 가족들이 면회 와서 말했다.​“자책하지 말고 힘내요. 우리는 용서했으니 하루빨리 나와서 잘 살아요.”​그 말을 들으니 불현듯 예전 일이 떠올랐다. ‘난 그때 왜 어머니를 친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용서받기는 이토록 쉬운데, 용서하기는 왜 그리 어려웠을까.오늘도 나를 용서해 준 분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리고 늦었지만 그에게도 용서를 전한다.
노란 리본
2017.11.07   조회수 : 1,028    댓글 : 1개
이른 새벽, 구치소를 나섰다. 마중 나온 이는 없었다. 홀로 택시 타고 간 집에 노란 리본은 매달려 있지 않았다. 아내가 외아들을 데리고 기별도 없이 이사 간 것이다. 갈 곳이 없어진 나는 지하철역 보관함에 짐을 넣었다. 추가 사건으로 재판 중인 터라 그길로 법원에 출석했다.누구 하나 반겨 주지 않는 처지에다, 빈털터리라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었다. 간신히 일자리를 구해 생활비를 마련하고 재판을 준비하던 중 아들과 연락이 닿았다.“아빠가 외국에 일하러 간 줄 알았어요. 소식 듣고 걱정했는데,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아들은 내가 전과자여도 괜찮다며, 나를 믿는다고 했다. 그 말에 그간의 고통이 녹아내렸다. 아버지의 단칸방에 신세를 지던 어느 날이었다. 야구 중계를 보던 아버지가 패전한 마무리 투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저 사람처럼 패배자다.”아버지는 가정을 잃고 사회에서도 뒤처진 내게 적잖이 실망했다. 나는 울면서 집을 나왔다. 그때 나를 붙잡아 준 건 아들이었다. 아들은 백방으로 다니며 재판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고, 변호사 비용도 마련했다. 그런 노력에도 다시 법정 구속된 내게 이삼 일에 한 번씩 면회 온다. 마음고생이 클 테지만 내 앞에서는 늘 웃는다.“아빠 걱정 안 해요. 잘 이겨 내시리라 믿어요.”스물한 살 아들의 가슴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그 사랑으로 나는 오늘도 고단한 현실을 헤쳐 나간다.
한 걸음 가까이
2017.10.10   조회수 : 1,215    댓글 : 2개
어릴 적, 부모님은 자주 싸웠다. 그런날이면 아버지 손에 남아나는 살림살이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아버지가 미웠다. 어머니가 “나중에 결혼해도 엄마 아빠랑 같이 살 거지?” 하고 물으면 “엄마랑만 살 거야. 아빠랑은 안 살거야.” 했다. 친구들과 길 가다 아버지를마주치면 모른 척하기도 했다.대학생 때 어머니가 아파 입원했다. 담당 의사는 예전에 어머니가 담석 질환으로 고생할 때 치료해 준 분이었다. 그때의 질환과 관련 있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했으나, 몇 달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큰 병원으로 옮기고서야 암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치료 시기를 놓친뒤였다. 어머니는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은 시간은 석달. 누나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려고 서둘렀으나, 어머니는 그마저 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어머니 가슴에 못질한 일만 생각나 눈물이 흘렀다.아버지는 어머니 묘 앞에서 흐느껴 울었다.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날생각했다.‘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한 걸까?’아버지는 새벽부터 일어나 건설 현장으로 출근해 여름에는 땡볕 아래서, 겨울에는 추위 속에서 일했다. 일이 없으면 농사를 지었다. 그렇게 소처럼 일만했고, 자신을 위해 돈 쓰는 데는 인색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과 거북이 등처럼 두꺼워진 손. 그게 아버지의 모습이었다.그제야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를 미워하며 그 사실을 외면했을 뿐이었다.무뚝뚝하고 표현이 서툴렀지만 아버지에게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있었다.나는 이제부터라도 자식 노릇을 하며 어머니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우리라 다짐했다. 열심히 공부해 장학금을 받고, 아르바이트도 해 살림에 보탰다.한데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 고시를준비하던 중, 예기치 못한 사고를 저질렀다.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이 캄캄했다. 모든 게 끝난 듯했다.유치장에 찾아온 아버지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제야 아버지 마음을 알았는데, 효도는커녕 죄인의아버지라는 멍에를 씌운 것이다.아버지는 사고에 관해 어떤 추궁도하지 않았다. “걱정 말고 맘 편히 먹어라.” 그날부터 아버지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재판을 준비했다. 피해자의가족을 찾아 용서를 구했지만 소용없었다.형을 받은 나는 모든 걸 포기했다.될 대로 되라는 듯 툭하면 싸움을 벌였다.그렇게 세월만 보내던 어느 날, 누나가 면회 와 비보를 전했다. “아버지교통사고 나서 혼수상태야.” 심장이내려앉는 듯했다.이렇게 아버지를 보낼 순 없었다.매일 밤마다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간절히 기도했다. 하늘이 내 소원을들어준 것일까, 아버지는 다행히 깨어났다. 하지만 평생 불편한 몸으로 살아야 했다.늦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할수 있을까?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는날을 그리며 이곳에서 봉제 기술을배우고 독학사를 공부하고 있다. 지칠 때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힘을낸다.그리고 아버지에게 조금씩 내 마음을 표현하려 한다. 오늘도 정성껏 편지를 쓴다. “아버지, 지켜봐 주세요.사랑합니다.”
다시 용기를
2017.09.07   조회수 : 1,549    댓글 : 5개
십여 년 전, 아내를 만난 지 한 달만에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무작정 혼자 처가에 찾아갔다. 넙죽 인사드리자 장모님은 이야기 들었다며 주민 등록증을 보자고 했다. 아내와 나는 무려 열아홉 살 차이가 났다. 내 나이를 확인한 장모님은 아내의 보따리를 내주며 말했다.“살아 보고 결정하게.”결혼한 뒤, 행복하게 해 주겠다던약속과 달리 어려운 생활이 계속됐다. 몇 차례 사업을 벌였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실망은 커져 갔다. 그래도십 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그러던 중 딸이 태어났다. 빠듯한 형편에도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다. 딸이유치원 다닐 무렵엔 하던 일들을 정리하고 세차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다. 한눈팔지 않고 성실히 일한 덕에 몇 년뒤 승진도 했다.삶에 안정을 찾은 무렵, 둘째를 가졌다. 그때부터 가족에게 더 넉넉한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던 예전의 욕심도 되살아났다.손에 쥔 돈은커녕 투자할 사람조차 없는 처지에도 머릿속은 늘 사업 구상으로 꽉 차 있었다.때마침 친구가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기회를 얻은 나는 여러 차례 사전조사를 하며 철저히 준비했다. 그동안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되새기며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재기를꿈꾸었다.그렇게 세차 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일한 경험이 있기에 더욱 자신 있었다.처음엔 기대만큼 순조로웠다. 장밋빛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설렘과 기대로 밤잠을 설칠 만큼 즐거운 나날이었다.한데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기계와 집기를 주문받았던 회사 담당자가 계약금과 물건 대금을 들고 잠적한 것이다. 며칠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엎친 데 덮친 격으로 투자했던 친구마저 나를 사기죄로 고소했다. 벼랑에 내몰린 심정이었다.아이들을 데리고 작은 월세 방으로옮겼다. 돌려받은 전세금이라도 주겠다고 했으나 친구는 터무니없는 금액이라며 더욱 화냈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담당자를 찾아다니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밤낮으로 거리를 헤매다 경찰과 마주쳤고,그길로 아이들과 헤어졌다.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곳에서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다. 바깥에 두고온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비록 형편은 넉넉하지 않아도 근검절약하는 아내 덕에 어려움은 없었다. 다시 사업에 도전하겠다고 했을때 아내는 말했다.“그냥 가늘고 길게 살자.”그때 왜 그 말을 듣지 않았을까. 큰빚에 가족의 생계까지 생각하면 막막할 뿐이다.하늘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 준다고 한다. 한데 나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감당 못할 짐을 지운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그런데도 아내는 두 아이를 학교와어린이집에 보낸 뒤 짬을 내 이곳까지면회 온다. 그 모습을 보면 이대로 희망을 저버릴 수 없다.못난 남편의 곁을 지켜 주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다시금 살아갈 용기를 내 본다.
어머니는 그리움이다
2017.08.09   조회수 : 1,368    댓글 : 3개
나와 동생은 어릴 적 어머니 없이 자랐다. 부모님의 불화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홀로 우리 형제를 키우는 게 힘들었는지 강원도에 살던 할머니를 모시고 왔다.당시 우리가 있던 시골엔 일거리가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도시로 떠났고, 매달 아버지가 보내 주는 생활비로 생계를 꾸렸다.나는 남들과 다른 가정 환경이 창피했다. 무엇보다 자식을 두고 간 어머니가 미웠다. 어머니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세월이 흘러 나와 동생은 어른이 되었다. 바쁘게 살다 보니 어느덧 어머니의 존재는 기억에서 잊혔다. 한데 뒤늦게 뜻밖의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와 동생이 어머니와 이따금씩 연락하고 지냈다는 것이다. 나를 감쪽같이 속였다는 사실에 상처 받았다.가족들은 내가 어머니를 용서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히려 가족들의 기대에 더 어긋나게 살았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큼 실망도 컸기 때문이었다.결국 아버지, 동생과도 사이가 점차 멀어졌다. 연락이 오면 피했고, 명절에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았다. 이참에 인연을 끊고 살까 고민하기도 했다.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사는 동생과 늘 비교당하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았다.어느 날, 동생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생은 장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지만 나는 외면했다.그때 왜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후회했다. 그래서 어머니 묘소를 찾아가기로 했다.어머니에게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오랫동안 못 본 어머니를 이런 식으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결국 어머니에게 가지 못하고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돌아왔다. 못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방황하며 살던 나는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 이곳에 왔다. 차마 가족들에겐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사회에 있을 때도 사고를 많이 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초라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갈수록 가족들이 그리워졌다. 내 걱정하며 기다릴 아버지를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소식을 전하고 싶지만 연로한 아버지에게 불효하는 것 같아 용기가 나지 않는다.나는 이곳에서 종이봉투 접는 일을 한다. 일당은 적어도 그만큼 돈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며 출소하는 날까지 깊이 반성하리라 다짐한다.어머니와 살갑게 정을 나눈 기억조차 없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애틋함이 짙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살아계실 때 잘하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어머니에게도 우리를 두고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어머니가 한 번이라도 꿈에 나타나면 말없이 안아 주고 싶다.그동안 내 이기심 때문에 소중한 이들에게 상처 준 듯해 마음이 무겁다. 사회에 나가면 아버지에게 못다한 효도를 하고 싶다. 그리고 어머니 앞에 떳떳하게 설 것이다.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일이 내겐 간절할 때가 많았다. 이제라도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련다.“어머니, 아버지,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김성현 님(가명) | 교도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