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동행의 기쁨

독자적인 실행력과 통찰력으로 자신이 속한 분야의 지평을 열어 온 분들을 만납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 <EBS 극한직업 제작진>
2019.06.27   조회수 : 144    댓글 : 0개
“요새 EBS(교육 방송)에서 어떤 프로그램 봐?” 십여 년 전, 프로듀서 김봉렬 님(56세)이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교육 방송에 우리가 볼 게 있어?” “애들이 틀어 놓는 거 그냥 보는 거지.” 중년 남성인 그들에게선 방송사에 대한 기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남성 시청자가 즐겨 볼 프로그램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떠올린 게 &lt;극한 직업&gt;이었다. 그는 생산 현장에서 치열하게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시 경제 상황도 한몫했다.첫 방송이 2008년이었는데 세계 금융 위기로 다들 어려운 때였거든요. ‘전국의 아버지 어머니 힘내십시오!’ 하는 마음도 있었죠.​배우, 작가, 학생 등이 어떤 직업에 대해 알고 싶을 때 너나없이 참조한다는 프로그램 &lt;극한 직업&gt;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8년 2월 27일 조기잡이 편을 시작으로 응급실 의사, 소방관, 고속 도로 순찰대, 화약 발파 기술자 등 다양한 직업을 소개했다. 어지간한 고된 일은 이미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이 재조명되길 바라며 만든 프로그램이 십여 년간 이어지리라곤 제작진도 예상하지 못했다.​처음에는 거칠고 위험한 직업을 찾으려 했어요. 그런 일이 얼마나 될까. 잘해야 150~200회 정도 만들면 끝이겠구나 싶었죠.​공들여 직업을 찾아도 정작 섭외에 들어가면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내 직업은 극한 직업이 아니다.” “힘들고 위험한 일로 비치면 우리 애들이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다.”라며 난색을 표한 것. 뜻밖의 시청자 반응에 놀라기도 했다.다양한 노동 현장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삶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분이 자아를 실현해 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었어요. 보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의 의미까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요. 한데 기획 의도와 달리 ‘너 공부 안 하면 저 사람처럼 힘든 일 한다.’ ‘저렇게 고생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노력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기운이 빠졌죠.​하나 진심은 통했다.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하나둘 호평이 올라왔다.“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분이 있어 세상이 돌아간다.” 그에 힘입어 방송 시간도 칠십 분으로 늘어났다. 시청률은 2퍼센트대. 시사 교양 프로그램임을 감안하면 높은 편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 모습에 시청자가 감동받는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lt;극한 직업&gt;은 EBS와 외주 제작사 앤미디어, KP(케이피)커뮤니케이션이 함께 제작한다. 초창기 기획을 담당한 김봉렬 프로듀서는 올해 초부터 제작 관리를 맡았다. 제작사 두 곳에서 총 다섯 팀이 돌아가면서 만든다. 피디 두 명과 작가, 조연출이 한 팀. 그 외 제작진까지 포함하면 스무 명 넘는 인원이 이 프로그램에 매달린다. 아이템 선정 후 취재와 출연자 섭외, 이삼 주간의 촬영까지 한 달 정도 시간을 쏟는다. 물론 그 기간에도 끊임없이 다른 아이템을 준비한다. 팔 년째 연출을 맡는 KP커뮤니케이션 팀장 노윤구 님(46세)이 말했다.지금 이 시간에도 피디들은 전국을 다니며 촬영할 테고 작가들은 전화기를 붙들고 출연자 섭외하느라 정신없을 거예요. 오죽하면 출연진이 ‘제작진이 더 극한 직업 같네요.’라고 할 정도예요.한번은 갯벌에서 낙지 잡는 이를 찍으러 갔다. 한 걸음 떼기조차 어려웠다. 짧은 썰물 시간 동안 이들을 취재해야 했다. 촬영 도중 피디가 새로 온 지 석 달쯤 된 조연출이 울상 짓는 걸 보고 물었다. “괜찮아?” 조연출은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 일은 저랑 안 맞는 거 같아요. 더 못하겠어요.” 노윤구 팀장은 “그랬던 친구가 얼마 전 ‘입봉’ 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라며 껄껄 웃었다.가장 보람될 때가 언제인지 물었다. 시청률이 높게 나오거나, 방송 후 화제가 되었을 때를 생각했다.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다신 이 프로그램 안 해, 딴 데 갈 거야.’ 싶다가도 자신이 나온 방송을 본 출연진에게 수고했다는 전화 한 통 받으면 정말 보람 있어요.”방송이 나가는 수요일이면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린다. 방영을 마친 밤 열두 시, “방송 잘 봤어요.”라고 연락이 오면 한숨 돌린다고 했다. 아무 반응이 없는 경우엔 며칠 내내 애가 탄다.방송 나간 다음 날 그 편을 담당한 피디에게 ‘어젯밤에 전화 왔어?’ 하고 가장 먼저 묻죠. 시청률보다 내 주인공이 어떻게 봤는지가 더 중요하거든요.​노윤구 팀장은 제작진도 시청자만큼이나 출연자를 지켜보며 감명받는다고 덧붙였다. 그분들이 단순히 생계만 꾸리려고 일하는 건 아니거든요. 힘들어도 그 안에서 보람을 찾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죠. 그런 모습을 담고 싶어요.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요.회를 거듭할수록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직업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볼거리나 재미 그리고 미처 알지 못한 직업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극한’만 다루지 않는다. 김봉렬 프로듀서가 말했다. 초창기엔 고압선 설치만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그림이었어요. 배 타고 바다 나가는 것도 드물었죠. 요새는 아주 흔해요. 채널도 다양해졌죠. 열악하고 힘든 곳은 이미 많이 소개했잖아요.‘세상에 극하지 않은 직업이 어디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시청자에게 보여 주고 싶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8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희망 에너지 <에너지 전환 활동가 김소영 님>
2019.06.03   조회수 : 2,253    댓글 : 0개
서울 동작구 상도3동과 4동에 자리 잡은 성대골. 성대 시장 입구 국사봉 골짜기 일대에 있는 마을이다. 상인과 손님으로 복작이는 시장과 고즈넉한 주택가가 어우러진 평범한 동네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곳으로 수학여행이나 견학을 오는 사람이 늘고 있단다. 시장을 거닐다 보면 ‘에너지를 아끼는 착한 가게’라고 붙은 상점이 꽤 있다. 미니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한 집도 여럿 눈에 띈다. 성대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에너지 자립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기후 변화와 에너지 위기를 연구하는 친환경 마을 공동체다. 이 중심엔 한 슈퍼가 있다.​성대 시장을 지나 오르막길에서 ‘에너지 슈퍼마켙’을 만날 수 있다. 열린 문으로 들어서니 대표 김소영(48세) 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데 여느 슈퍼와 다르다. 먹을거리나 생활용품 대신 절전형 멀티탭, 태양광 휴대 전화 충전기, 엘이디 전구 등을 진열해 놓았다. 간판에 적힌 글자도 ‘마켓’이 아닌 ‘마켙’으로 달리 적었다. 이곳의 정체가 궁금했다.여기서는 에너지 절약 제품을 판매해요. 물건을 파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마을의 에너지 운동을 홍보하고 캠페인을 기획하죠. 받침을 티읕 자로 쓴 것은 에너지의 영문 첫 글자인 E(이)를 표현한 거예요.쉽게 말해 에너지 교육을 하는 공간이다. 그녀는 이곳을 동네 사랑방으로 칭했다. 큰길가에 자리 잡아 주민들은 오다가다 들러 궁금한 것도 묻고 에너지 관련 상담도 받는다.쌍둥이 딸을 낳고 이곳에서 살게 됐어요. 근방에 아이들이 놀 만한 공간이 없는 것이 아쉬워 동네 엄마들이 모여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지요. 팔자에 없는 도서관장 일을 하며 아이들을 돌보았어요. 그때만 해도 전기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관심도 없었죠.2011년 3월 11일, 그녀는 티브이 뉴스로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접했다.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전기가 꺼진 도시에서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환경 단체에 연락해 전문가 특강을 요청했다. 도서관을 함께 운영하는 엄마들에게 후쿠시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부모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지금은 다른 나라 일이지만 우리 아이도 충분히 겪을 수 있거든요. 그렇다 보니 ‘내 문제’로 받아들여졌어요. 정부나 기업에 맡겨 둘 일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에너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제일 먼저 ‘절전소 운동’부터 했다. 우리가 쓰는 전기부터 아끼자는 것이다. 가전제품을 덜 쓰고 낮에는 불을 켜지 않았다. 성대골 어린이 도서관 벽에는 전기 사용량을 기록해 붙였다. 얼마나 아꼈는지가 한눈에 들어왔고 다른 주민의 시선도 사로잡았다. 덕분에 참여하는 집이 나날이 늘었다. 시장의 상점을 찾아 에너지를 절약하자고 제안했다. 등을 엘이디로 교체하고, 문을 열어둔 채 냉·난방 기구를 사용하지 않거나 영업시간이 끝나면 간판 조명을 끄는 것. 동참하는 가게엔 ‘착한 가게’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2012년 열다섯 곳을 시작으로 지금은 이백여 곳이 넘는다.에너지 슈퍼마켙을 연 것도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절약을 체험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성대골 착한 에너지 합창단’을 만들어 공연하고, 공원에 텐트를 치고 인형극을 선보였다. 또 축제를 열어 에너지와 기후 변화 문제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도록 도왔다. 원하는 집엔 진단사를 파견해 에너지가 어디에서 낭비되고 있는지, 어떻게 절약할 수 있는지 알려 주었다. 이런 노력에 화답하듯 처음엔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한 사람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반상회에 참석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 불볕더위와 폭우 등으로 날씨가 궂을 땐 그 원인을 찾아보고 나날이 심해지는 미세 먼지 대책을 고민했다. 마을 주민들은 에너지 전문가가 되어 크고 작은 모임으로 파견 나가 체득한 지식을 나누고 있다.​지금까지는 에너지를 원하는 만큼 쓰고 전기료를 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기후 변화는 우리 삶을 흔드는 문제가 되었어요. 나의 생활 방식이 지구를 살리는 쪽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면서 되도록 소비를 줄이는 게 중요해요.그녀는 몇 가지 팁을 알려 주었다. 티브이를 절전 모드로 사용한다. 조금 어두워져도 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사람의 눈은 곧 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전기 소모량이 큰 티브이 셋톱 박스 전원도 끈다. 냉장고 설정 온도를 조절하는 것도 쉬운 방법이다. 냉장고 온도를 살짝 높여도 음식은 여전히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다. 또 내·외부 온도 차가 적어져 냉기 모터의 가동 시간과 가동 시 필요한 전기량이 줄어든다. 냉동실은 영하 17~18도, 냉장실은 4~5도로 설정하면 좋다. 에어컨 온도는 28도로 유지한다. 찬 공기는 아래로,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기에 좌식 생활을 하는 우리는 그 정도 온도에도 충분히 시원하단다. 또 에어컨 실외기에 차광막을 설치하면 냉방 효과가 크다고. 잠자기 전이나 외출할 땐 쓰지 않는 가전제품의 플러그를 모두 뽑는다. 매번 꽂고 빼는 게 번거롭다면 멀티탭을 활용한다.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으면서 효과가 큰 방법이라며 권했다.성대골 한 어르신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우리가 하는 일은 나 자신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거다.’ 지구를 예전처럼 되돌릴 방법은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꿈꿉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7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행복한 대장장이 <대장장이 석노기 님>
2019.05.08   조회수 : 2,078    댓글 : 5개
한국의 호미를 세계에 널리 알린 장인이 있다. 경북 영주의 대장간에서 매일 쇳덩이를 달구고 펴고 두드려 온갖 연장을 만드는 명장 석노기님(64세)이다. 그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마 앞에서 망치로 달군 쇠를 두드려호미 날을 다듬고 있었다. 벌써 52년째 해 온 일이다.처남, 노느니 와서 일 좀 거들어 줘. 내가 밥은 먹여 줄게.그는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터라 진학은 꿈도 못 꾸었다. 마침 대장간을 하는 매형이 잔심부름할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입도 덜 겸 그는 열네 살에 고향을 떠났다.뭘 하든 열심히 해서 친구들보다 뒤처지지만 말자고 생각했어요. 다들 중학교 가고 고등학교 졸업해 번듯하게 살 텐데 나는 그럴 수 없으니까요. 더 잘나가기는 어려울 테니 남만큼만 살아 보자 싶었죠. 이게 제 평생소원이었어요.​약속대로 매형은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었다. 누나 그늘도 포근했다. 풍족하진 않았으나 배곯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그는 성실히 일했다. 그리고 알게되었다. 내 손으로 일해 먹고사는 기쁨을. 처음엔 심부름하거나 풀무로 불 피우는 게 고작이었다. 차츰 어깨너머로 대장간 일을 배워 갔다. 2년쯤 지났을 때매형이 그에게 말했다.돈 벌러 갈래? 공주에서 사람을 구한단다. 큰물에서대장 기술을 배워 보는 게 어때.​매형은 작은 대장간을 운영하는 탓에 그가 한몫을 해내고 남는데도 월급을챙겨 주지 못하는 걸 미안해했다. 그는 매달 오백 원씩 받기로 하고 공주의 한대장간으로 옮겼다. 사실 대장 기술은 누가 찬찬히 일러 주는 게 아니었다. 기술자들이 일할 때 잔일을 하며 눈여겨보는 게 다였다.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뭐라도 배우고 싶었다. 한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당시는 기술자가 귀했어요. 기술을 다 배우면 도시로 가 버렸거든. 기술자가 떠나고 하루는 주인이 나한테 그래. ‘노기야, 네가 한번 배워 볼래.’ 단번에‘예.’ 그랬죠.​정식으로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낮에는 평소처럼 일하고, 일과를 마친후에나 배울 수 있었다. 새벽 네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면서 악착같이 익혔다.그런 그가 기특했는지 주인 역시 “이것도해 볼래? 너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라며 하나라도 더 알려 주려 애썼다. 덕분에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온갖 기술을 연마해기술자가 됐다. 당시 충남 지역의 가장 어린기술자가 기계를 제일 잘 다룬다는 소문이나기도 했다.​1973년, 그는 영주로 옮겼다. 다섯 평짜리 창고를 개조해 영주 대장간 간판을 걸었다. 집을 마련해 가정도 꾸렸다. 그날부터오늘에 이르기까지 ‘땅땅땅’ 하는 맑은 소리는 밤낮으로 끊이질 않는다.내 집 한 칸갖고 공장 차리고 싶은 소원을 이루긴 했지만 그게 다 빚이었거든요. 절단기 하나가집 한 채 값이었으니까. 어렵게 이룬 걸 잃을까 봐 죽기 살기로 일했죠.​스물셋 청년 대장장이는 어느덧 육십을 훌쩍 넘겼다. 뚝심 있게 계속하다 보니 지난해 경상북도에서 ‘최고 장인’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고비도 많았다고.이 동네에만 대장간이 서너 개 들어섰어요. 그다음엔 중국산 제품이 싸게 공급됐고요. 경쟁이 치열했지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고민이 말도 못했어요.그가 찾은 해답은 좋은 제품. 궁리 끝에 호미를 용도에 맞게 각기 제작했다.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를 주문받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농사일도 덜 힘들고, 쓰는 사람 마음에도 드니 그 역시 흡족했다. 재료도 여느 대장간과 다르게 썼다. 영주 대장간에서는 차량용 스프링, 일명 ‘판 스프링’이라 불리는 쇳덩이로 호미를 만든다. 폐차 스프링이나, 스프링을 만들고 남는 자투리를 가져와 쓴다.제작 방법도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쇠 자르기와 초벌 메질만 기계로 할 뿐 형태를 잡고 날을 세우고 손잡이 다는 것까지 전부 수작업이다. 쇳덩이를 가마 불에 집어넣었다가 꺼내 망치로 두드리고, 또다시 불에 달구어 메질한다. 쇳덩이가 호미로 탄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이삼십 분. 그렇게 하루에 육십 자루 정도 만든다. 수천 번 메질하는 게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손으로 꼼꼼히 만들어야 더 견고하고 호미 날도 정교하게 휘어진단다.기계가 발전해도 내 손 못 따라갑니다. 내가 평생 해 온 일인데요.​영주 대장간 농기구는 전국으로 팔려 나간다. 그중 호미는 미국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 판매 순위 10위권에 들어 화제를 모았다. 물건을 구매한 사람들의 호평도 이어졌다. “그간 사용한 정원 관리 도구 중 최고다.” “날이 구부러져 힘이 덜 든다.” 등등. 미국뿐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호주 등 전 세계로 수출한다. 그는 얼떨떨한 눈치다.어떤 외국인이 내 호미를 가지고 정원을 가꾸는 걸 비디오로 찍어 올렸대요. 그 영상이 해외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면서 주문이 더 많아졌어요.​아쉬운 건 주문은 밀려오는데 물량이 부족한 것. 영주 대장간에서 매일 일하는 사람은 그 혼자다. 대장장이로 이끌어 준 매형과 장인들이 주 2~3회 나와 일손을 돕지만 모두 칠십 대 중반이 넘었다. 젊은 일꾼이 들어와 그가 50여년간 쌓은 기술을 전수받기만을 학수고대한다.​그에게 앞으로의 바람을 물었다.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난 다 이뤘어요. 나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누군가는 대장간 일 하며 고생만 실컷 한 사람이 뭐가 그리 좋으냐고 할 수도 있어요. 열네 살에 고향 떠날 때, 내집과 공장 하나 갖는 게 꿈이었거든요. 다 이뤘잖아요. 대장장이 하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망치질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일할 거예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6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하는 길 <회복적 생활교육 연구소장 정진 님>
2019.04.08   조회수 : 2,113    댓글 : 0개
은빈이가 갑자기 지민이 볼을 할퀴어 상처를 냈다. 지민이는 어안이 벙벙해있다가 이내 은빈이에게 달려들었다. 두 아이의 싸움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상황에서 보통 부모나 교사는 어떻게 할까? 먼저 둘을 떼어 놓고 시시비비를가릴 것이다.은빈이가 지민이 볼을 할퀸 건 잘못이니까 미안하다고 해. 반성문 쓰고. 지민이도 사과받으면 은빈이 용서해 줘.잘못한 아이에게 사과를 지시하고 훈계하고 때론 벌을 내린다. 상대 아이에게는 괜찮다고 말하게 한 뒤상황을 마무리한다.회복적 생활교육 연구소장 정진 님(45세)은 되묻는다.정말 문제가 해결됐을까요? 은빈이는 반성문을 쓰며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지민이는 ‘이제 괜찮아졌어.’라고 느낄까요?그는 통제나 벌에 중점을 둔 ‘응보적 정의’ 대신 ‘회복적 정의’를 강조한다. 은빈이가 지민이를 할퀸 것보다 둘의 관계가 벌어진 게 더 큰 문제라는 것. 이때은빈이를 나무라는 데 초점을 두는 게 아닌 두 아이의 피해, 관계, 공동체의 회복을 우선해야 한다. 이 회복적 정의에 바탕을 둔 것이 ‘회복적 생활교육’이다.위 상황의 경우 은빈이와 지민이를 데리고 대화 모임을 진행할 수 있다. 두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물었다. 지민이는 은빈이가 왜 자기를 때렸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은빈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지민이가 자꾸 자신을 툭 치고 도망가는 장난을 쳤단다. 지민이에게 다시 물었다.“이 이야기를 듣고 무슨 생각이 들었어?”“당황스러워요. 저는 같이 놀고 싶어 그런 거예요. 은빈이도 늘 같이 장난을 쳐서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은빈이가 얘기했다. “화가 났어요. 오늘은 장난이 심해서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계속했어요.”이렇게 서로의 생각이 오간 뒤, 지민이는 은빈이에게 사과했다. “나는 네가장난치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어. 다음부터 안 그럴게.” 은빈이 역시 “할퀴어서 미안해. 나도 내 기분을 더 확실하게 말할게.” 하고 마음을 전했다.그는 부모나 교사가 잘잘못을 가리는 대신 다툰 아이들이 서로 속내를 나눌 수 있도록 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 각자에게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충분히 말할 기회를 주고, 그를 통해 상대방의 입장과 기분을 알게 하는 것.자신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했는지 직접 듣고 진심으로 사과해야 상처받은 아이 역시 참다운 이해와 용서를 할 수 있다.이전엔 역사 철학을 공부했죠. 책을 읽다 회복적 정의에 대해 알게 됐어요.이어 훈련도 받기 시작했는데 그 안에 ‘서클’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소통하며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에요. 본래 북미 인디언들의 오래된 전통이죠. ‘토킹 스틱’이라는 도구를옆 사람에게 차례로 건네고, 그걸 받은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관계를새롭게 만드는 과정이 신기했어요.갈등 전환에 관한 공부로 평화와 회복적정의를 깊이 알게 됐다. 그는 학교, 법원, 지역 사회 등에서 갈등 조정 전문가로 일했다. 시간이 갈수록 교육 현장에서는 구체적인 실천 과정이 만들어졌다. 자녀 셋을 키우다 보니 스스로가 첫 대상이었다. 교사들과 워크숍을 하고 문제가 생긴 학급이나 가정, 공동체에 파견돼 서클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무엇보다 회복적 생활교육으로 그 자신에게 변화가 나타났다. 예전엔 가장으로서 가족을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 의무감을 내려놓고 대화로 풀어 가려 한다. 특히 아내와 가슴속 응어리를 토해 내는 시간을 가졌다.어릴 적 형편이 어려워서 부모님이 저를 시골 할아버지 댁에 맡기셨어요.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언덕에 올라가 지나다니는 버스를 보며 엄마 아빠가 데리러 오기만을 기다렸지요. 한번은 저를 보러 왔다가 돌아가는 아빠에게 울면서 매달렸어요. 동네 사람들이 저를 번쩍 안아 아빠에게서 떼어 놨죠. 발버둥치면서 아빠를 따라가겠다고 한 기억이 선명해요.부모에게 돌봄을 받지 못한 상처는 오래 남았다. 이 일을 솔직하게 꺼내 놓자 아내는 그를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나누며 새로운 대화 방식을 만들어 갔다. 아내와의 관계가 달라지니 세 자녀 역시 다르게대할 수 있었다. 훈육이 아닌 서로 존중하는 것.부모와 자녀가 ‘존중의 약속’을 같이 정해 지켜 보세요. 가족 구성원이 이를 어겨 문제가 생길 땐 질문을하며 어떤 상황인지 살피세요.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집안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질 거예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5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을 불러 주는 일 <역사 만화가 박시백 님>
2019.03.11   조회수 : 1,446    댓글 : 3개
그게 마침 제 눈에 들어왔거든요.《조선왕조실록》을 어떻게 만화로 그릴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역사 만화가박시백 님(55세)이 예사롭게 말했다. 덧붙인 답변은 예상 밖이었다.실록을 한장도 들춰 보지 않은 때였어요.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조선사를 제대로 알려 주고 싶다는 신념을 키워 왔을줄 알았다고 하니 껄껄 웃었다.사실 그 반대예요. 현대사면 몰라도 조선사는제 관심 밖이었어요. 그래도 만화는 참 좋아했죠.그는 제주도 시골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야 전기가 들어올 정도로 변두리였다. 동네엔 만홧가게 하나 없어 책이나 어린이 잡지, 만화책 등이귀했다. 친구들은 그림 쪼가리라도 눈에 띄면 죄다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그가만화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기도 했고, 그림을 비슷하게 따라 그리는 게 신기해서였다. 형이 공부하려고 사다 둔 갱지에 습작을 하기도 했다. 못으로 종이에 구멍을 뚫은 다음 실로 동여매 그럴듯하게 제본도 했다. 1년간 200쪽짜리세 권을 그려 낼 만큼 만화가 좋았다. 하지만 미술 공부에는 돈이 들었고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서울로 올라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전혀 다른 공부를 하면서도 가슴속엔 ‘언젠가는 만화를 그리며 살 거야.’라는 다짐이있었다.《한겨레》 만평 작가로 활동하게 된 것도 뜻하지 않은 기회였다. 극화(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엮는 일)를 하고 싶어 여러 번 공모에 참여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그때 《한겨레》에서 만평(만화를 그려 인물이나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판함) 작가를 모집한다는 게 아닌가.만평은 대학 시절에 몇 번 그려 본 게 다였어요. 그런데도 무조건 하고 싶었지요. 만화를 그리고 싶었으니까. 연거푸 낙방하고 다른 공부를 준비할 무렵이었거든요. 그래서 시도라도 해 봤죠.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때부터 4년간 시사만화를 그렸다. 경력도 쌓이고 인기도 높아졌다. 당시 조정래 작가의 소설 《한강》과 그의 만화가 나란히 연재됐는데 조 작가에게서 “만화 잘 보고 있다.”라는 편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고민 역시 깊어졌다고.우리나라 정치 환경이 아쉽게도 반복돼요. 예를 들면국회에서 여야가 대립하는 장면이 1년에 몇 차례씩 있어요. 또 설, 추석, 기념일 등도 매년 돌아오고요. 비슷한 소재를 새롭게 표현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았어요. 저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걸 알면서도 계속하는 건 독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또 만화가로 오래 먹고살아야 하는데 그러려면빨리 다른 길을 찾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그 무렵 티브이에서 역사 드라마 &lt;왕과비&gt;를 방영했다. 그는 무척 흥미롭게 보다가 문득 자신의 역사 지식이 부족한 걸 알았다. 그래서 신문사 도서관에서 드라마 배경인 조선에 관련된 책을 찾아 읽었다. 조선의정치사는 파란만장했다. ‘이런 극적인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는 곧바로 신문사에 사의를 표했다. 동료, 친구, 가족 모두가 만류했다. 출판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니고, 실록을 읽지도 않은터였다. 그저 머릿속에 구상만 있을 뿐. 이대책 없는 결정에 동의해 준 유일한 사람이아내였다. “오래 버텼어요. 원하는 대로 해요.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그러곤 아내는 공부에 매달렸다. 임용 고시에 덜컥 합격하더니 교사가 돼 생계를 꾸렸다. 대신 그는 집안일을 도맡았다.여전히제가 우리 집 주부입니다. 밥을 차리고 아내가 학교에 가면 청소를 하죠. 작업도 집에서합니다.실록을 공부한 후 콘티를 짰다. 저녁거리를 사러 가며 머릿속으로는 인물들의 대화를 상상했다. 수십 장을 그렸다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리기를 서너 번, 정신을 차려 보니 벌써 1년이 흘러 있었다. 이 과정을 지켜본 친구가 출판사를 소개해 줬고 다행히 바로 출간이 결정됐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2003년 7월, 제1권 &lt;개국&gt;을시작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딱 10년만에 제20권을 끝으로 완결 지었다. 이 시리즈는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으며 조선사를 널리 알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데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고.10권이 나올 때까지는 반응이 시원찮았어요. 출판사에서 선인세로 매달 200만 원씩 줬어요. 그런데 판매가 그 금액을 따라가질 못할 정도였죠.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실록은 다 그려야지. 그렇게 버텼더니끝낼 수 있었네요.가야 할 길을 알기에 그는 서두르지 않고자신이 세운 계획대로 작업했다. 처음 무모하게 회사를 그만둘 때나반응이 시원찮을 적이나인기가 높아진 무렵이나그의 생각은 같았다. 《조선왕조실록》 덕에 만화가로서 먹고살 수 있어서 좋고, 또 조선사를 정사(정확한 사실의 역사) 중심으로 정리한 데에 보람을 느꼈다.사명감은 작업을 하다가생겼단다. 만화를 통해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야겠다는것. 그래서 2015년에는 오류를 수정·보완한 개정판도 냈다. 또 《조선왕조실록》을 공부하며 직접 만든 연표와 주요 인물 700여 명을 정리한 노트도 책으로펴내며 이 지난한 작업을 마쳤다.잠시 휴식기를 가진 그는 다시 대장정에 들어갔다. 일제 강점기를 다룬 만화역사책 《35년》을 그린다. 지난해 1~3권을 출간했고, 올해 나머지 4~7권이 나온다. 또다시 자료를 공부하며 씨름 중이다. 고증을 위해 독립운동 현장을 찾아중국을 비롯한 전국을 답사했다.훌륭한 분이 얼마나 많았는지. 미래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모든 걸 헌신해 독립을 위해 싸웠어요. 하지만 우린 이름조차 기억하지못하죠. 그분들 이름을 불러 드려 오래 기억하고 싶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4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는 기 와 이리 재밌노! <영화감독 김재환 님>
2019.02.11   조회수 : 2,078    댓글 : 1개
우리 할머니들이 행복하기로는 또래 분들 중에 으뜸일걸요.경북 칠곡의 아흔을 앞둔 할머니들을 주인공으로 세운 이유를 묻자 영화감독 김재환 님(49세)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는 다큐멘터리 영화 &lt;칠곡 가시나들&gt;에 여덟 할머니가 한글을 배우는 과정을 담았다. 3년간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하며 영화를 찍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할머니들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빛이 환해졌다.우리 할머니들은 그저 하루하루 건강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 목표예요.칠곡에 가서 같이 한바탕 웃다 오면 저도 삶의 활력을 되찾는 것 같았죠.아닌 게 아니라 스크린 속 할머니들은 발랄했다. 간판을 더듬거리며 읽는스스로를 뿌듯해하고, 받아쓰기 오답을 베껴 함께 틀려도 까르르 웃었다. 빨래터에서 빨랫감을 주무르다 말고 서로에게 물을 튕기며 장난치는 모습이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그야말로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노년의 모습. 할머니들에게 어떤 비법이라도 있는 걸까?여덟 할머니는 모두 1930년대에 태어났다. 그 무렵은 일제 강점기, 한글을배우지도 쓰지도 못했다. 혼기가 차기도 전에 시집가 평생 농사짓고 소 키우며가족을 먹여 살렸다. 허리 한 번 펼 새 없이 살아온 할머니들은 다리가 말을듣지 않고, 들은 걸 자꾸 까먹을 즈음에야 일에서 벗어났다.자식들이야 고생만 한 어머니가 안쓰러우니까 ‘나이도 있으니 이제 쉬세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히 계세요.’ 한다지만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그게 더고달프죠.때마침 동네에 배움 학교가 생겼다. 칠곡군에서 관내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문해 교육. 그는 할머니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했다. 무언가에 빠지면인생이 변하듯이.글을 깨치자 거리에 내걸린 현수막도 달리 보였다. 어딜 가서든 이름 석 자쓸 수 있어 어깨도 쭉 펴고 다녔다. 할머니들은 한글을 배우며 삶의 주인공 자리를 되찾았다.박금분 할머니(89세)는 대구의 딸 집에 갔다가도 수업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돌아온다. 아침 일찍 마을 회관으로 달려가 학교 문을 연다. 반장으로서 맡은 역할이다.한글을 배우니 사는 기 더 재밌다. 나는 박금분 할매면서 학생이다.주먹까지 쥐고 까랑까랑하게 말하는할머니 얼굴에는 배움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났다.강금연 할머니(83세)는 처음으로 우체국에 갔다. 그간 남편이나 자식이 대신해 준일이다. 주소를 한 자 한 자 눌러쓰고, 침을발라 우표도 야무지게 붙였다. 수신자는 바로 아들이었다. 말이 아닌 글로 마음을 전했다.아들아/ 내 아들 나가 시끈(낳아서 씻은)물도/ 안 내빼릴라 캐다(안 버리려 했다)/ 그아들 노코 올머너 조안는데(그 아들 낳고 얼마나 좋았는데) 이제 그 아들하태 미아하다(아들한테 미안하다)/ 내 몸띠가 성하지를 모타이(몸이 성하지 못하니)/ 아들 미느리 욕빈다(아들 며느리 고생한다)/ 자나 깨나 걱정해주는/ 아들이 참 고맙다/ 밥 잘 무라(먹어라)/ 어미 시다(엄마 ‘시’다).할머니들에겐 그동안 다른 표현 수단이없었어요. 말로 하지 못하는 얘기도 많잖아요. 또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 대신 자식을잘 키워 내야 한다는 책임감에 억눌려 살았죠. 이젠 글로 적으며 표현하는 기쁨을 알게 된 거예요.그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통해 관객에게말한다. 자신 안에 있는 걸 표현하기 전과후는 전혀 다른 인생이라고.꼭 글쓰기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거나춤을 추면서도 표현할 수 있어요. 그러면평생 설레며 살 수 있죠.그 변화에 놀라고 또 기뻐하는 건 할머니들의 자녀들이다. 육칠십 대에 접어든 그들은 어떻게 노년을 보내야 하는지 곁에서 보고 배웠단다. 김재환 감독 역시 함께한 3년내내 자신이 아흔이 되었을 때를 생각해 보았다고. 전에는 ‘나이 듦’이 두려웠다.무기력하게 하루가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노인이 되면 어쩌나 걱정했죠. 그러다 우리 할머니들을 만났어요. 배움이 주는 설렘, 그걸 같이하는 친구들이 있어 세상 누구보다 근사하게 사는 할머니들을 보며 많이 배웠습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3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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