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동행의 기쁨

독자적인 실행력과 통찰력으로 자신이 속한 분야의 지평을 열어 온 분들을 만납니다.

약이 되는 음식 <한식 진흥원장 선재 스님>
2019.09.27   조회수 : 93    댓글 : 0개
“뭘 먹으면 좋을까요?” “어떻게 하면 스님처럼 나을 수 있을까요?” 선재 스님(63세)을 만나는 사람 대부분은 이렇게 묻는다. 사찰 음식을 만들고 알린 지 40여 년, 스님의 대답은 한결같다. 제철 재료를 깨끗이 조리하여 알맞게 드세요. 건강한 사람은 그렇게만 먹으면 됩니다. 아프다면 몸에 좋지 않은 음식부터 버리세요.불교에서는 병이 찾아오기 전 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다스리라고 한다. 그만큼 음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불교 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 하고 물으세요. 음식이 몸은 물론 마음에까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뭘 먹느냐는 건 결국 몸과 마음을 잘 관리하고 있느냐는 뜻이에요.​선재 스님은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득한 바 있다. 출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 절에서 ‘어린이 불교 학교’를 열어 그녀도 일을 도왔다. 학교에서 사고를 친 아이들을 맡아 며칠간 함께 지냈다. 먹성 좋은 나이인데도 음식을 번번이 남기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가게를 찾아 산 아래까지 내려가서 라면, 과자 같은 가공식품을 사다 먹었단다. 평소 그러한 음식을 달고 살기에 심심한 절 밥이 입에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절에 있는 동안만큼은 몸과 마음을 맑게 해 주는 음식을 먹길 바랐다.손이 많이 가더라도 간식 하나까지 천연 재료로 만들어 내주었다. 식재료엔 본래 생명이 깃들어 있고 이 음식을 먹기까지 많은 이가 수고했음을 나직이 일러 주었다. 며칠 뒤 아이들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음식을 남기지 않을 뿐 아니라 태도도 수굿해졌다. 좋은 마음으로 만든 음식이 먹는 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았지요. 성품이 음식과 관련 있다는 것도요.​아이들의 달라진 모습에 놀란 학교, 기관 등에서 교육 요청이 잇달았다. 선재 스님은 아이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스님들 공양 당번을 맡아 하면서도 틈을 내 불경을 찾아 읽었다. 음식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찰 음식을 연구한 이가 없다는 걸 알고 내친김에 논문도 써 내려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음식에 대해 공부하느라 시간이 부족해 끼니를 대강 때우거나 거르는 일이 잦아졌다. 몸이 점점 허약해졌다.“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며 정작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어요. 간경화 진단을 받고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죠.” 선재 스님은 음식과 습관을 바꾸기로 했다.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밤늦도록 과로하여 병을 얻었다면 그 반대로 해 보자 싶었어요. 김치와 전통 장을 사용해 스스로 만든 음식만 먹었습니다. 해가 나면 먹고 지면 먹지 않았죠. 충분히 쉬고 명상하며 마음을 다스렸어요.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다 보니 1년 만에 병의 증상이 사라졌습니다.​이후 자신을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강의했다. 어린이집, 노인 대학, 성당에까지가서 음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식에 관심 있는 해외에서 초청하거나 유명 요리사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한단다. 어떤 이야기를 해 주는지 궁금했다.​예를 들면 무는 땅에서 왔죠. 무가 자라려면 햇빛도 물도 땅도 바람도 공기도 있어야 해요. 자연계의 모든 생명이 함께하죠. 또 무를 키우고 뽑는 농부, 담는 상자를 만드는 사람, 시장까지 나른 운전사의 손을 거치고요. 그러니 돈을 주고 샀다고 온전히 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인연과 모두의 수고로움으로 무가 내게 올 수 있었죠. 이렇듯 자연의 생명이 나와 연결되어 있음을 음식에서 느껴 보는 겁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다른 이도 그래야 한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죠.​선재 스님에게 11월, 몸과 마음을 보해 줄 제철 음식을 소개해 달라고 청했다. 스님은 주저 없이 무를 택했다.무는 10월 중순 이후에 맛이 납니다. ‘가을무는 인삼보다 좋다.’라는 말이 있지요. 이때 무는 아삭아삭하고, 특유의 단맛도 좋습니다. 해독 작용을 하고 소화를 돕는 역할도 해 주죠. 가을무로 깍두기를 버무리거나 전을 부쳐 먹어도 좋습니다.​선재 스님은 음식을 만드는 것 역시 수행과 같다고 말한다. 나를 위한 요리를 해 보세요. 서툴러도 무언가를 직접 만들어 먹으면 삶의 작은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밥 한 그릇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자연과 사람의 손길을 생각하며 소중히 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그 음식을 먹은 사람에게 약이 될 것입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문 앞에 서서 <호텔 도어맨 권문현 님>
2019.08.29   조회수 : 411    댓글 : 0개
사십삼 년간 호텔 정문을 지킨 이가 있다. 도어맨으로 정년퇴직한 뒤에도 다른 호텔로 옮겨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한다. 콘래드 서울 호텔 도어맨 권문현(66세) 님이다.전 그저 한 가지 일을 계속했을 뿐입니다. 다른 재주가 없어서 그랬지요.그의 일은 손님 응대. 매일 아홉 시간씩 서서 보낸다. 미소 지은 채 정중하게 인사한 후 오가는 손님을 위해 신속히 문을 열어 준다. 가지런히 빗은 머리, 깔끔한 정복 차림은 퇴근 때까지 흐트러짐이 없다. 호텔 방문객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대개 오전 여섯 시 반에 일을 시작합니다. 그 전에 출근해 근무 준비도 하고 오늘은 호텔 어느 곳에서 어떤 행사가 있는지 알아본 뒤 달달 외웁니다. 그래야 손님이 물을 때 바로 답할 수 있지요.신문도 여러 종을 구독해 꼼꼼히 읽는다. 세상 돌아가는 일도 파악하고 특히 단골의 근황을 알아 두면 방문 시 반영할 수 있다고. 차량 번호도 200여 개 기억한다. 차가 호텔로 들어서면 곧바로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손님이 방문할 곳에 채비를 부탁한다.이 일을 오래 해 얻은 노하우랄까요. 제가 기억하는 손님이 많지 않습니까. 각자 좋아하는 인사 방식이 있어요. 알아보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분에게는 목례만 합니다.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분이 오면 저도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안내하죠. 손님이 편하게 느끼도록 하는 제 나름의 환영입니다.그는 손님이 원하는 바를 한 발 앞서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요청하기 전에 돕는 게 최선이라는 것. 오랜 기간 한 우물을 판 덕에 다른 직원보다 그런 점이 잘 보인다고.많은 사람을 위해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눈치가 빨라졌죠. 집에서도 아내가 기분 상했을 때 왜 화났는지 살피고 바로 사과합니다. 애초부터 그럴 일을 만들지 않으면 좋은데 아직 그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나 봅니다.서러움이 차오를 때에도 밝은 얼굴로 손님을 맞아야 하는 게 도어맨의 숙명. 마음을 달래는 법을 물었다. 요즘은 쉽게 화가 나질 않아요. 꽁해 있다가도 삼십 분 안에 풀어지죠. 원만히 해결된 걸 보는 게 기쁨이에요. 저도 일하며 많이 변했네요.그에게도 성격이 울뚝불뚝한 시절이 있었단다. 생계를 위해 무작정 상경해 호텔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주물공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공사장을 전전하며 막일로 먹고살았다. 성남의 터널 뚫는 현장에서는 위험천만한 일을 겪기도 했다. 그런 시간을 거친 뒤 호텔에 들어오자 마치 별세상 같았다. 으리으리한 호텔에서 유명 인사를 안내하는 일도 즐겁기만 했다. 하지만 몇 년 흐르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갑갑해졌다.남의 문 열고 짐 받아 주는 일이 자존심 상하기도 했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굽실거려야 하나,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죠.태권도 3단인 그는 보안 요원 제안을 받기도 하고, 해외 이민을 꿈꾸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를 잡아 준 것은 어머니였다. 투덜거리는 그를 달래며 한 직장에서 끝을 보라고 했다.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 마라. 인사도 열심히 하면 너에게 자양분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 어쨌든 돌아온다.혈기 왕성한 당시엔 흘려보낸 말이 지금은 구구절절 들어맞는 걸 안다. 그만두고싶다는 직원에게 술 한잔 사 주며 달랠 정도다. “여기가 힘들다고 피하면 더 어려워질 수 있어. 서 있느라 다리 아프고 자존심 구겨지는 것도 알아. 그래도 여기서 인사의 달인이 되어 봐. 그때 더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어.”나의 노력과 정성으로 손님이 기뻐하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여전히 일을 더 잘하고 싶다. 손님이 보다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낄수록 그에게 더 큰 만족감이 돌아오기에.혹 기억에 남는 손님이 있는지 물었다.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웃는 인상인 손님이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외국 손님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활짝 웃으며 인사합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점점 그런 모습이 좋아 보여요. 저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호텔에서든 다른 곳에서든.그도 처음엔 썩 좋은 인상이 아니었단다. 하지만 사십삼 년간 밝은 모습을 유지하면서 그의 삶도 성격도 변했다.손님에게 공손히 대하다 보니 결국 제가 그런 사람이 되었어요. 호텔 문 앞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며 제 마음도 열렸고요. 오랫동안 일하기 잘했다 싶습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0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목수의 고민 <목수 유진경 님>
2019.07.30   조회수 : 476    댓글 : 0개
언뜻 농원처럼 보이는 김포의 비닐하우스. 안팎으로 목재가 켜켜이 쌓여 있다. 목공 기계도 여러 대 눈에 띈다. 그 너머에서 이달의 주인공이 나무를 손질하고 있었다. 국가 무형 문화재 제55호 소목장 이수자 유진경 님(57세)이다.​여기가 제 작업장이에요. 나무를 보관하고 가구를 제작하죠. 지금은 갤러리가 따로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작품 진열까지 했어요.그녀는 한 교육 회사에서 퇴직자 재교육 프로그램을 짰다. 아이엠에프 여파로 회사를 그만둔 수많은 가장을 보노라니 가슴이 시렸다. 퇴근 후 산란한 마음을 달래려 동네를 걷는 중이었다. 늦은 시각인데 아파트 상가에 불 켜진 가게가 하나 있었다. 호기심이 일어 다가가 보니 나무 향이 은은하게 나는 게 아닌가. 향기를 따라간 곳에서는 서너 명이 톱질을 하고 있었다. 사람이 들여다 보는 줄도 모르고 열중한 모습이 인상 깊었다.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이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렇게 그녀는 목공과 맞닥뜨렸다.큰애를 낳고 견딜 수 없이 힘들었어요.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했죠. 천을 떼다가 쿠션이나 식탁보를 손바느질하고, 등공예책을 보며 등나무를 엮기도 했어요. 둘째를 출산하곤 도자기를 만들었죠. 무언가를 배우며 시름을 덜었어요.목공 역시 마음을 달래는 취미로 지나가겠거니 했다. 하나 알아 갈수록 재미있었다. 그녀는 주말이면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강사가 주는 재료로 연필꽂이, 의자 등을 만들었다. 삼 년간 하다 보니 손수 나무를 가공해 다양한 물건을 만들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직장을 그만두고 목수 공부를 시작했다. 나무를 만지는 일에 눈뜨며 이 일을 업으로 삼고 싶은 마음을 품은 것.먹고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힘들어도 즐거운 일을 하는 게 낫겠다 싶었죠.그녀는 한국 전통 공예 건축 학교 소목반에 들어가 박명배(중요 무형 문화재)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다. 목수는 건물을 짓는 대목장과 가구와 소품을 제작하는 소목장으로 나뉜다. 그녀는 장롱, 궤, 경대 등 전통 목가구 만들기를 택했다. 이전부터 고가구에 흥미가 있었고, 무엇보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원목 통판을 짜 맞추는 게 신기했다. 나무를 고르고, 말리고, 다듬는 과정부터 공간과 쓰임을 고심해 도면을 그리는 것까지 모두 목수가 하는 일. 그녀는 부족함을 채워 가는 데에서 희열을 느꼈다.도면을 배울 때 제일 먼저 본을 그리거든요. 열 번을 그려도 기억이 안 나지 뭐예요. 공방에 틀어박혀 이해될 때까지 반복하곤 했어요. 공방 근처로 이사까지 갔죠.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어서. 매일 출근해 작업하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2010년부터 삼 년간 그녀를 포함한 도합 다섯 명은 박명배 스승에게 소목장 이수자 교육을 받았다. 첫해는 꼬박 일 년간 끌, 대패 등을 제작했다. 끌을 만들 땐 화로에 불을 지핀 뒤 모루에 판스프링을 올려 망치로 두드린다. 이건 어금니를 악물어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자 이수자들이 두드리게끔 불집게로 잡아 주는 일을 했다. 그것조차 힘에 부쳤다.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지냈어요. 시간을 똑같이 쓰는데, 아니 더 사용하는데도 그들처럼 할 수 없다는 걸 가슴에 새겼죠.한계에 부딪혀 속을 끓일 무렵 문득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결이 아름다운 물푸레나무와 오동나무, 단단한 소나무와 잣나무, 자연적으로 먹이 들어 독특한 나이테를 가진 먹감나무. 나무마다 특성과 장점이 있듯 자신에게도 특화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저는 목수이며 아내, 엄마예요. 살림한 경험을 작품에 반영할 수 있죠. 수건 수납장을 집 어디에 놓고, 높이와 깊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고, 무슨 나무로 만들면 좋을지 굳이 배우지 않아도 알아요. 생활에 필요한 기물을 만드는 목수가 되자고 마음먹었죠.이십 년간 목수로 살며 언제 가장 힘들었는지 물었다.“지금이 위기예요.” 나무는 원목 상태로 2년, 판재 형태로 실외에서 3년, 실내에서 2년 정도 말린 후에야 가구로 만들 수 있다. 세월을 견딘 흔적은 가구의 무늬가 된다. 나무를 켜고 말려 봐야 어떤 가구가 탄생할지 알 수 있어 똑같은 작품을 찍어 낼 수 없다. 그만큼 가구 하나 짜는 데는 품이 많이 든다. 합판으로 대중의 취향과 유행에 따라 만드는 공산품과 비교하면 가격 경쟁에서 밀리는 건 당연하다.주말이면 손님이 백 명 넘게 다녀가요. 가격만 묻곤 ‘비싸네요.’ 하고 돌아서죠. 저는 가격을 무척 신중히 책정하거든요. 나뭇값과 제 일당만 계산해요. 하루 일곱 시간 일하면 십만 원이에요. 총 제작 시간을 토대로 가격을 매겨요. 이런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다 보면 스스로가 초라해지더라고요. 가격의 문제만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하자 슬퍼졌죠. 정성껏 만든 가구를 창고에 보관만 하고 있으니 앞으로가 걱정스러워요. 나무 살 돈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최근엔 공공건물에서 쓰는 가구를 만들 기회가 늘었다. 그녀도 반기는 일이다. 전통 목가구가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곳에 놓여 쓰임을 다한다면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후배 목수들과 다양한 전시를 열고 출품하는 것도 청년들이 목가구의 아름다움을 봐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전통 목가구는 현재 박물관에 남아 있어요. 조선 시대 사람들이 주로 쓴 것이죠. 훗날 박물관에 요즘 우리가 쓰는 가구를 전시한다면 수입 제품이 대부분 아닐까요? 선조의 지혜가 담긴 기법을 살리되 디자인은 현대와 어우러지는 가구를 만들어 후대에 전하고 싶어요. 어려워도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죠.*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9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 사는 이야기 <EBS 극한직업 제작진>
2019.06.27   조회수 : 1,117    댓글 : 0개
“요새 EBS(교육 방송)에서 어떤 프로그램 봐?” 십여 년 전, 프로듀서 김봉렬 님(56세)이 주변 사람들에게 물었다. “교육 방송에 우리가 볼 게 있어?” “애들이 틀어 놓는 거 그냥 보는 거지.” 중년 남성인 그들에게선 방송사에 대한 기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런 남성 시청자가 즐겨 볼 프로그램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떠올린 게 &lt;극한 직업&gt;이었다. 그는 생산 현장에서 치열하게 땀 흘려 일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시 경제 상황도 한몫했다.첫 방송이 2008년이었는데 세계 금융 위기로 다들 어려운 때였거든요. ‘전국의 아버지 어머니 힘내십시오!’ 하는 마음도 있었죠.​배우, 작가, 학생 등이 어떤 직업에 대해 알고 싶을 때 너나없이 참조한다는 프로그램 &lt;극한 직업&gt;은 이렇게 시작됐다. 2008년 2월 27일 조기잡이 편을 시작으로 응급실 의사, 소방관, 고속 도로 순찰대, 화약 발파 기술자 등 다양한 직업을 소개했다. 어지간한 고된 일은 이미 다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이 재조명되길 바라며 만든 프로그램이 십여 년간 이어지리라곤 제작진도 예상하지 못했다.​처음에는 거칠고 위험한 직업을 찾으려 했어요. 그런 일이 얼마나 될까. 잘해야 150~200회 정도 만들면 끝이겠구나 싶었죠.​공들여 직업을 찾아도 정작 섭외에 들어가면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내 직업은 극한 직업이 아니다.” “힘들고 위험한 일로 비치면 우리 애들이 학교에서 놀림을 받는다.”라며 난색을 표한 것. 뜻밖의 시청자 반응에 놀라기도 했다.다양한 노동 현장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삶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분이 자아를 실현해 가는 모습을 전하고 싶었어요. 보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의 의미까지 생각해 볼 수 있도록요. 한데 기획 의도와 달리 ‘너 공부 안 하면 저 사람처럼 힘든 일 한다.’ ‘저렇게 고생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노력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더라고요. 기운이 빠졌죠.​하나 진심은 통했다.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하나둘 호평이 올라왔다.“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렇게 열심히 사는 분이 있어 세상이 돌아간다.” 그에 힘입어 방송 시간도 칠십 분으로 늘어났다. 시청률은 2퍼센트대. 시사 교양 프로그램임을 감안하면 높은 편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 모습에 시청자가 감동받는 것 같다며 미소 지었다.&lt;극한 직업&gt;은 EBS와 외주 제작사 앤미디어, KP(케이피)커뮤니케이션이 함께 제작한다. 초창기 기획을 담당한 김봉렬 프로듀서는 올해 초부터 제작 관리를 맡았다. 제작사 두 곳에서 총 다섯 팀이 돌아가면서 만든다. 피디 두 명과 작가, 조연출이 한 팀. 그 외 제작진까지 포함하면 스무 명 넘는 인원이 이 프로그램에 매달린다. 아이템 선정 후 취재와 출연자 섭외, 이삼 주간의 촬영까지 한 달 정도 시간을 쏟는다. 물론 그 기간에도 끊임없이 다른 아이템을 준비한다. 팔 년째 연출을 맡는 KP커뮤니케이션 팀장 노윤구 님(46세)이 말했다.지금 이 시간에도 피디들은 전국을 다니며 촬영할 테고 작가들은 전화기를 붙들고 출연자 섭외하느라 정신없을 거예요. 오죽하면 출연진이 ‘제작진이 더 극한 직업 같네요.’라고 할 정도예요.한번은 갯벌에서 낙지 잡는 이를 찍으러 갔다. 한 걸음 떼기조차 어려웠다. 짧은 썰물 시간 동안 이들을 취재해야 했다. 촬영 도중 피디가 새로 온 지 석 달쯤 된 조연출이 울상 짓는 걸 보고 물었다. “괜찮아?” 조연출은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 일은 저랑 안 맞는 거 같아요. 더 못하겠어요.” 노윤구 팀장은 “그랬던 친구가 얼마 전 ‘입봉’ 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라며 껄껄 웃었다.가장 보람될 때가 언제인지 물었다. 시청률이 높게 나오거나, 방송 후 화제가 되었을 때를 생각했다. 예상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다신 이 프로그램 안 해, 딴 데 갈 거야.’ 싶다가도 자신이 나온 방송을 본 출연진에게 수고했다는 전화 한 통 받으면 정말 보람 있어요.”방송이 나가는 수요일이면 초조하게 전화를 기다린다. 방영을 마친 밤 열두 시, “방송 잘 봤어요.”라고 연락이 오면 한숨 돌린다고 했다. 아무 반응이 없는 경우엔 며칠 내내 애가 탄다.방송 나간 다음 날 그 편을 담당한 피디에게 ‘어젯밤에 전화 왔어?’ 하고 가장 먼저 묻죠. 시청률보다 내 주인공이 어떻게 봤는지가 더 중요하거든요.​노윤구 팀장은 제작진도 시청자만큼이나 출연자를 지켜보며 감명받는다고 덧붙였다. 그분들이 단순히 생계만 꾸리려고 일하는 건 아니거든요. 힘들어도 그 안에서 보람을 찾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죠. 그런 모습을 담고 싶어요.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요.회를 거듭할수록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직업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볼거리나 재미 그리고 미처 알지 못한 직업을 소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극한’만 다루지 않는다. 김봉렬 프로듀서가 말했다. 초창기엔 고압선 설치만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그림이었어요. 배 타고 바다 나가는 것도 드물었죠. 요새는 아주 흔해요. 채널도 다양해졌죠. 열악하고 힘든 곳은 이미 많이 소개했잖아요.‘세상에 극하지 않은 직업이 어디 있으랴.’ 하는 생각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을 시청자에게 보여 주고 싶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8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희망 에너지 <에너지 전환 활동가 김소영 님>
2019.06.03   조회수 : 2,678    댓글 : 0개
서울 동작구 상도3동과 4동에 자리 잡은 성대골. 성대 시장 입구 국사봉 골짜기 일대에 있는 마을이다. 상인과 손님으로 복작이는 시장과 고즈넉한 주택가가 어우러진 평범한 동네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곳으로 수학여행이나 견학을 오는 사람이 늘고 있단다. 시장을 거닐다 보면 ‘에너지를 아끼는 착한 가게’라고 붙은 상점이 꽤 있다. 미니 태양광 발전기를 설치한 집도 여럿 눈에 띈다. 성대골은 서울시에서 지정한 에너지 자립 마을. 주민들이 나서서 기후 변화와 에너지 위기를 연구하는 친환경 마을 공동체다. 이 중심엔 한 슈퍼가 있다.​성대 시장을 지나 오르막길에서 ‘에너지 슈퍼마켙’을 만날 수 있다. 열린 문으로 들어서니 대표 김소영(48세) 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한데 여느 슈퍼와 다르다. 먹을거리나 생활용품 대신 절전형 멀티탭, 태양광 휴대 전화 충전기, 엘이디 전구 등을 진열해 놓았다. 간판에 적힌 글자도 ‘마켓’이 아닌 ‘마켙’으로 달리 적었다. 이곳의 정체가 궁금했다.여기서는 에너지 절약 제품을 판매해요. 물건을 파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마을의 에너지 운동을 홍보하고 캠페인을 기획하죠. 받침을 티읕 자로 쓴 것은 에너지의 영문 첫 글자인 E(이)를 표현한 거예요.쉽게 말해 에너지 교육을 하는 공간이다. 그녀는 이곳을 동네 사랑방으로 칭했다. 큰길가에 자리 잡아 주민들은 오다가다 들러 궁금한 것도 묻고 에너지 관련 상담도 받는다.쌍둥이 딸을 낳고 이곳에서 살게 됐어요. 근방에 아이들이 놀 만한 공간이 없는 것이 아쉬워 동네 엄마들이 모여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지요. 팔자에 없는 도서관장 일을 하며 아이들을 돌보았어요. 그때만 해도 전기가 어디서 어떻게 오는지 관심도 없었죠.2011년 3월 11일, 그녀는 티브이 뉴스로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접했다. 이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아찔했다. ‘전기가 꺼진 도시에서 아이들을 지킬 수 있을까?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녀는 환경 단체에 연락해 전문가 특강을 요청했다. 도서관을 함께 운영하는 엄마들에게 후쿠시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부모라서 그런 게 아닐까요. 지금은 다른 나라 일이지만 우리 아이도 충분히 겪을 수 있거든요. 그렇다 보니 ‘내 문제’로 받아들여졌어요. 정부나 기업에 맡겨 둘 일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에너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제일 먼저 ‘절전소 운동’부터 했다. 우리가 쓰는 전기부터 아끼자는 것이다. 가전제품을 덜 쓰고 낮에는 불을 켜지 않았다. 성대골 어린이 도서관 벽에는 전기 사용량을 기록해 붙였다. 얼마나 아꼈는지가 한눈에 들어왔고 다른 주민의 시선도 사로잡았다. 덕분에 참여하는 집이 나날이 늘었다. 시장의 상점을 찾아 에너지를 절약하자고 제안했다. 등을 엘이디로 교체하고, 문을 열어둔 채 냉·난방 기구를 사용하지 않거나 영업시간이 끝나면 간판 조명을 끄는 것. 동참하는 가게엔 ‘착한 가게’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2012년 열다섯 곳을 시작으로 지금은 이백여 곳이 넘는다.에너지 슈퍼마켙을 연 것도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절약을 체험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성대골 착한 에너지 합창단’을 만들어 공연하고, 공원에 텐트를 치고 인형극을 선보였다. 또 축제를 열어 에너지와 기후 변화 문제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도록 도왔다. 원하는 집엔 진단사를 파견해 에너지가 어디에서 낭비되고 있는지, 어떻게 절약할 수 있는지 알려 주었다. 이런 노력에 화답하듯 처음엔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한 사람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반상회에 참석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 불볕더위와 폭우 등으로 날씨가 궂을 땐 그 원인을 찾아보고 나날이 심해지는 미세 먼지 대책을 고민했다. 마을 주민들은 에너지 전문가가 되어 크고 작은 모임으로 파견 나가 체득한 지식을 나누고 있다.​지금까지는 에너지를 원하는 만큼 쓰고 전기료를 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기후 변화는 우리 삶을 흔드는 문제가 되었어요. 나의 생활 방식이 지구를 살리는 쪽인지 아닌지 생각해 보면서 되도록 소비를 줄이는 게 중요해요.그녀는 몇 가지 팁을 알려 주었다. 티브이를 절전 모드로 사용한다. 조금 어두워져도 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사람의 눈은 곧 적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용하지 않을 때는 전기 소모량이 큰 티브이 셋톱 박스 전원도 끈다. 냉장고 설정 온도를 조절하는 것도 쉬운 방법이다. 냉장고 온도를 살짝 높여도 음식은 여전히 시원하게 보관할 수 있다. 또 내·외부 온도 차가 적어져 냉기 모터의 가동 시간과 가동 시 필요한 전기량이 줄어든다. 냉동실은 영하 17~18도, 냉장실은 4~5도로 설정하면 좋다. 에어컨 온도는 28도로 유지한다. 찬 공기는 아래로, 더운 공기는 위로 올라가는 성질이 있기에 좌식 생활을 하는 우리는 그 정도 온도에도 충분히 시원하단다. 또 에어컨 실외기에 차광막을 설치하면 냉방 효과가 크다고. 잠자기 전이나 외출할 땐 쓰지 않는 가전제품의 플러그를 모두 뽑는다. 매번 꽂고 빼는 게 번거롭다면 멀티탭을 활용한다. 가정에서 쉽게 할 수 있으면서 효과가 큰 방법이라며 권했다.성대골 한 어르신이 이런 말을 하셨어요. ‘우리가 하는 일은 나 자신이 아니라 미래 세대를 위한 거다.’ 지구를 예전처럼 되돌릴 방법은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꿈꿉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7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행복한 대장장이 <대장장이 석노기 님>
2019.05.08   조회수 : 2,358    댓글 : 5개
한국의 호미를 세계에 널리 알린 장인이 있다. 경북 영주의 대장간에서 매일 쇳덩이를 달구고 펴고 두드려 온갖 연장을 만드는 명장 석노기님(64세)이다. 그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마 앞에서 망치로 달군 쇠를 두드려호미 날을 다듬고 있었다. 벌써 52년째 해 온 일이다.처남, 노느니 와서 일 좀 거들어 줘. 내가 밥은 먹여 줄게.그는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초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한 터라 진학은 꿈도 못 꾸었다. 마침 대장간을 하는 매형이 잔심부름할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입도 덜 겸 그는 열네 살에 고향을 떠났다.뭘 하든 열심히 해서 친구들보다 뒤처지지만 말자고 생각했어요. 다들 중학교 가고 고등학교 졸업해 번듯하게 살 텐데 나는 그럴 수 없으니까요. 더 잘나가기는 어려울 테니 남만큼만 살아 보자 싶었죠. 이게 제 평생소원이었어요.​약속대로 매형은 먹이고 입히고 재워 주었다. 누나 그늘도 포근했다. 풍족하진 않았으나 배곯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그는 성실히 일했다. 그리고 알게되었다. 내 손으로 일해 먹고사는 기쁨을. 처음엔 심부름하거나 풀무로 불 피우는 게 고작이었다. 차츰 어깨너머로 대장간 일을 배워 갔다. 2년쯤 지났을 때매형이 그에게 말했다.돈 벌러 갈래? 공주에서 사람을 구한단다. 큰물에서대장 기술을 배워 보는 게 어때.​매형은 작은 대장간을 운영하는 탓에 그가 한몫을 해내고 남는데도 월급을챙겨 주지 못하는 걸 미안해했다. 그는 매달 오백 원씩 받기로 하고 공주의 한대장간으로 옮겼다. 사실 대장 기술은 누가 찬찬히 일러 주는 게 아니었다. 기술자들이 일할 때 잔일을 하며 눈여겨보는 게 다였다.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뭐라도 배우고 싶었다. 한데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당시는 기술자가 귀했어요. 기술을 다 배우면 도시로 가 버렸거든. 기술자가 떠나고 하루는 주인이 나한테 그래. ‘노기야, 네가 한번 배워 볼래.’ 단번에‘예.’ 그랬죠.​정식으로 기술을 가르쳐 준다고 해도 낮에는 평소처럼 일하고, 일과를 마친후에나 배울 수 있었다. 새벽 네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일하는 나날이 이어졌다.하루에 서너 시간씩 자면서 악착같이 익혔다.그런 그가 기특했는지 주인 역시 “이것도해 볼래? 너라면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라며 하나라도 더 알려 주려 애썼다. 덕분에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온갖 기술을 연마해기술자가 됐다. 당시 충남 지역의 가장 어린기술자가 기계를 제일 잘 다룬다는 소문이나기도 했다.​1973년, 그는 영주로 옮겼다. 다섯 평짜리 창고를 개조해 영주 대장간 간판을 걸었다. 집을 마련해 가정도 꾸렸다. 그날부터오늘에 이르기까지 ‘땅땅땅’ 하는 맑은 소리는 밤낮으로 끊이질 않는다.내 집 한 칸갖고 공장 차리고 싶은 소원을 이루긴 했지만 그게 다 빚이었거든요. 절단기 하나가집 한 채 값이었으니까. 어렵게 이룬 걸 잃을까 봐 죽기 살기로 일했죠.​스물셋 청년 대장장이는 어느덧 육십을 훌쩍 넘겼다. 뚝심 있게 계속하다 보니 지난해 경상북도에서 ‘최고 장인’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고비도 많았다고.이 동네에만 대장간이 서너 개 들어섰어요. 그다음엔 중국산 제품이 싸게 공급됐고요. 경쟁이 치열했지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고민이 말도 못했어요.그가 찾은 해답은 좋은 제품. 궁리 끝에 호미를 용도에 맞게 각기 제작했다.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를 주문받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농사일도 덜 힘들고, 쓰는 사람 마음에도 드니 그 역시 흡족했다. 재료도 여느 대장간과 다르게 썼다. 영주 대장간에서는 차량용 스프링, 일명 ‘판 스프링’이라 불리는 쇳덩이로 호미를 만든다. 폐차 스프링이나, 스프링을 만들고 남는 자투리를 가져와 쓴다.제작 방법도 전통 방식을 고수한다. 쇠 자르기와 초벌 메질만 기계로 할 뿐 형태를 잡고 날을 세우고 손잡이 다는 것까지 전부 수작업이다. 쇳덩이를 가마 불에 집어넣었다가 꺼내 망치로 두드리고, 또다시 불에 달구어 메질한다. 쇳덩이가 호미로 탄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이삼십 분. 그렇게 하루에 육십 자루 정도 만든다. 수천 번 메질하는 게 힘에 부칠 때도 있지만 손으로 꼼꼼히 만들어야 더 견고하고 호미 날도 정교하게 휘어진단다.기계가 발전해도 내 손 못 따라갑니다. 내가 평생 해 온 일인데요.​영주 대장간 농기구는 전국으로 팔려 나간다. 그중 호미는 미국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에서 판매 순위 10위권에 들어 화제를 모았다. 물건을 구매한 사람들의 호평도 이어졌다. “그간 사용한 정원 관리 도구 중 최고다.” “날이 구부러져 힘이 덜 든다.” 등등. 미국뿐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호주 등 전 세계로 수출한다. 그는 얼떨떨한 눈치다.어떤 외국인이 내 호미를 가지고 정원을 가꾸는 걸 비디오로 찍어 올렸대요. 그 영상이 해외 여기저기로 퍼져 나가면서 주문이 더 많아졌어요.​아쉬운 건 주문은 밀려오는데 물량이 부족한 것. 영주 대장간에서 매일 일하는 사람은 그 혼자다. 대장장이로 이끌어 준 매형과 장인들이 주 2~3회 나와 일손을 돕지만 모두 칠십 대 중반이 넘었다. 젊은 일꾼이 들어와 그가 50여년간 쌓은 기술을 전수받기만을 학수고대한다.​그에게 앞으로의 바람을 물었다.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난 다 이뤘어요. 나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예요. 누군가는 대장간 일 하며 고생만 실컷 한 사람이 뭐가 그리 좋으냐고 할 수도 있어요. 열네 살에 고향 떠날 때, 내집과 공장 하나 갖는 게 꿈이었거든요. 다 이뤘잖아요. 대장장이 하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망치질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일할 거예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6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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