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이달의 좋은생각

달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좋은님 에세이] 만두
2020.05.29   조회수 : 612    댓글 : 0개
그녀가 부린 사치는 단무지였다.“ 만두 먹을 때는 꼭 단무지가 있어야해.”내가 만두만 들고 간 날에는 투정을 부렸다. 그 모습이 밉지 않았다.집에서도, 나가서 데이트할 적에도 주로 만두를 먹었다.나는 한여름에 막노동을 다녔다. 그녀는 하루도 쉬지 않는 나를 못마땅해하며 굳이 고생스러운 일을 해야 하느냐고 토라졌다. 어쩔 수 없었다. 일당은 대학생인 내게 꽤 큰 금액이었다.등록금, 생활비 등을 해결할 만큼돈이 생겼을 때 고급 레스토랑에 갔다.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온그녀는 입구에서 조금 멈칫했지만 태연한 듯 들어갔다.자리를 안내받은 그녀가 빠르게메뉴판을 훑었다. 한참 보기만 하기에 내 마음대로 파스타, 스테이크, 샐러드를 주문했다. 그녀는 손을저으며 말했다.“ 두 개만 시켜도 될 것 같은데…….”막상 음식이 나오자디저트까지 싹 먹었다. “만두같이 생겼다, 너.” 먹는 모습을 보며 웃었더니그녀도 따라 웃었다.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미리 계산했다. 그녀는 뒤늦게 계산대로 가서영수증을 확인했다. 십만 원이 넘는 액수를 보고는 식당에서 나가자마자울기 시작했다.그녀는 끅끅대며 말했다.“ 고생해서, 돈, 내가, 먹는다고,싫어.”“ 피 터진 물만두 같아.” 내 말에 그녀는“ 웃겨.” 하며 안겼다.가난했던 그 시절 그녀가 좋아한 만두는 나를 향한 사랑이었다.임효원 님 ㅣ 경기도 성남시
[오늘의 만남] 그 순간
2020.05.29   조회수 : 681    댓글 : 0개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입시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모든 상황이 나를 옥죄어 하루하루 숨이 턱턱 막혔다. 불을 끄면 캄캄한어둠이 나를 덮쳐 오는 기분에 형광등을 켜고서야 겨우 잠들었다.그 시절 내 온갖 짜증을 받아 준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나는 무척 예민했다. 밥 먹어라, 불 끄고 자라, 일어나라 등 부모님이 하는 말마다 독을 쏘는 동물처럼 대답했다. 부모님은 목구멍까지 화가 올라와도 꾹꾹 밀어 넣으며, 늘 조심스레 내 방문을 닫았다.당시 야간 자율 학습을 해서 밤 아홉 시가 넘어서야 학교에서 빠져나올수 있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빠를 만났다. 나는 우연이었다고 기억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우연은 아니었던 듯싶다. 아빠는 그날담배를 산다는 핑계로 내가 집에 돌아올 시간에 맞추어 나의 동선에 서 있었다.“뭐야.” 아빠를 본 내가 내뱉은 말이다. 아빠는 말없이 내 책가방을 자신의 어깨에 둘러멨다. 우리는 아무 대화 없이 집으로 뚜벅뚜벅 걸었다.그길에서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안녕. 내일 봐!”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동지였다. 학교는엄연한 사회였고, 내가 힘들다고 친구들에게 짜증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나는 학교에서처럼 가면을 쓴 채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빠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집으로 돌아와 샤워하고 욕실 문을 연 때였다. 거실에서 아빠와 엄마가머리를 맞대고 손으로 땅콩 껍질을 하나하나 까고 있었다.“ 그래도 친구한테는 웃더라.” 왁자지껄한 텔레비전 소리에 섞여 아빠의 말이 들려왔다. 엄마는 계속 땅콩을 까며 살포시 웃었다.나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로 한동안 욕실 앞에 서 있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생경한 느낌이 훅 밀려들었다.아직도 문득 그순간이 떠오른다.박주혜 님 ㅣ 동화 작가
[특집] 나답게 만든 것
2020.05.29   조회수 : 771    댓글 : 1개
나의 콤플렉스는 가난했던 경험과 감성적인 성격이다.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워 가족과 떨어져 산 적이 있고, 어른이 되어서는 집안에 도움을 주느라 빚을 갚으며산 시간이 길다.가난은 두 글자지만, 그것이 주는 곤란함과 비루한 경험은 구체적이고 난데없었다.성격까지 감성적이라서 남들보다 많은 것을 느끼며 더 상처받고 슬퍼했다. 예측하지못한 곳에서 날아온 공을 여러 번 맞으면 공이 오지 않는 순간에도 무서운 것처럼, 불행은 나를 위해 준비된 것 같다는 어두운 생각을 하며 청춘을 보냈다.변호사가 된 뒤 좋은 환경에서 성장한 동료들을 만났다. 나와는 인생의 출발선이다른 사람들로 느껴졌다. 게다가 변호사 대부분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었다. 나는 내성격이 비이성적이라는 단점으로 여겨져 변호사라는 직업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생각도 들었다.그러다 어려운 사람들을 변론하는 국선 변호를 하게 되었다. 나는 내 가난의 경험과 감성적인 성격 덕에 피고인들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앞서 이해하고 공감할 수있었다.아르바이트인 줄 알고 보이스 피싱 일당에게 이용당한 남자의 국선 변호를 맡았다.그는 이혼한 뒤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그의 아버지는 전신불수로 누워 지냈다. 그의어머니는 종일 아버지를 간병했는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서 많이 지쳐 있었다. 그는그런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구치소로 들어왔다.그는 내 앞에서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반성했다.“ 딸이 곧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가방 하나 못 사 주고.” 그는 딸 얘기를하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아빠가 먼 타국에 일하러 간 줄 아는그의 딸은 어머니를 통해“ 아빠, 입학식에는 꼭 와 주세요.”라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다.나는 그를 대신해서 딸의 가방과 신주머니를 고르고 포장했다.며칠 뒤 그로부터 편지가 왔다. 딸이아빠 이름으로 보내진 분홍색 가방을받고 기뻐했다는 소식을 어머니로부터들었다고. 그는 또다시 가족과 헤어지는일이 없도록 출소 후 반듯하게 살겠다고 했다.홀로 미성년 자녀를 양육하다 아이들만 집에 두고 덜컥 구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아이들에게 전화해서 어른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꼭 내게 연락하라고했다.피고인들로부터 작은 희망과 고마운 마음이 담긴 편지를 받으면서 내 지난 어려움과 감성적인 성격이 때로는 나를 더 좋은 변호사이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콤플렉스라고 여긴 점들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 주었다.최진희 님(가명) ㅣ 서울시 마포구
[햇살 마루] 삶 이후 영원의 풍경들
2020.05.29   조회수 : 633    댓글 : 0개
지난겨울 생폴드방스라는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에 머물렀을 때 일이다.동틀 무렵이면 마치 새벽 약속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홀연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곤 했다. 이 마을은 해발 180미터에 성을 쌓아 요새로 만들었던중세기 모습 그대로였다. 성 안쪽 길들은 마치 미로처럼 좁은 골목들이 사방으로 나 있었다.나는 마을 가장자리, 그러니까 성벽을 따라 난 길의 삼층짜리 돌집 일 층에 여장을 풀었다. 이 숙소는 여러모로 나를 아찔하게했다. 처음엔 곤란해서 아찔했고, 나중엔 황홀해서 아찔했다.내가 이 마을에 당도한 것은 자정이 넘은 야심한 시각이었다. 이곳에서단기 체류를 하게 된 것은 문학·예술인의 흔적을 답사하고 현장을 소개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설 명절 음식을 차리고, 차례를 지내자마자 도망치듯 공항으로 달려갔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 프랑스 니스에내려 깜깜한 밤길을 더듬듯 겨우 도착한 목적지에는 육중한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내가 이틀에 걸쳐 지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도착해 여장을 풀 숙소는 성 안에 있었다. 가로등불빛만이 환하게 성벽과 그 앞 광장을 비추고 있을 뿐 어디에서도 사람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니스 공항에서 출발할 때부터 마치 서로 암호문을 주고받듯 문자 메시지로 소통하던 마크라는 집주인은 정작 도착한 순간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매번 그런 식이었다. 다 왔다고 생각할때, 새로운 시련이 도사리고 있었다. 스마트한 구글 지도를 손바닥에 놓고작동해 보아도 어느 쪽이 동쪽이고 서쪽인지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한겨울, 자정의 광장에서 십여 분을 기다린 뒤에야 나는 마크를 만났다.그는 내가 예상한 성문 쪽이 아니라 마을 입구 쪽 비탈길에서 불빛을 등에지고 휘적휘적 걸어 내려왔다.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 온 친구와 재회하듯 반갑게 그를 향해 돌아섰고, 그 역시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그는 내가 타고 온 차를 쓱 보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조수석에 올라타서 길잡이 노릇을 했다. 마치“ 열려라 참깨!”를 외치면 한 세계가 열리는 《아라비안나이트》에서와 같이 그의 신호에 따라 바닥에 솟아있는 진입 금지 기둥들이 납작하게 엎드렸고,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스르르 열렸다.그것으로 시련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성벽 길은 소형 중에서도이 인용 차가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통로였다. 거처까지 사백 미터거리였으나, 심리적인 거리는 이 킬로미터 이상이었다.날이 밝았고, 나는 늘 그래 왔듯 일상과 똑같이 그곳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부엌에서 밥을 짓고,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가까이 혹은 멀리 답사를다녔다. 그리고 새벽마다 홀연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 내 뒤를 쫓았다면 기이한 발걸음으로 생각할 만큼 일반적인 산책은 아니었다.내 삶의 주인은 나임에도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떠나는 결정적인 순간만큼은 내가 모른 채 진행된다.나는 삼십 년째 문학·예술인들의 삶 이후의 현장들, 그들의 영면처를 찾아다녔다. 내 아버지 어머니라도 되는 듯이. 여명의 어스름 속에 성벽 길을 걸어 내가 찾아간 곳은 러시아의 아주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화업(畵業)을 일구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짐을 꾸려 이곳 남쪽 바닷가 언덕 마을로 터전을 옮긴 샤갈의 묘였다.샤갈의 묘 위에는 큰 새 한 마리가 돌에 새겨져 있었다. 로즈메리와 바닷가 조약돌들이 새를 빙 둘러 감싸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새는 날개를 펄럭이며 창공을 향해 자유롭게 날아갈 것처럼 생기롭게 되살아났다.나는 떠오르는 태양이 보랏빛으로, 연어빛으로, 마침내는 투명한 빛으로 사이프러스 나무를 감쌀 때까지 화가가 묻혀 있는 공동묘지 주위를 산책했다. 샤갈은 98년 생애의 마지막 이십 년을 이곳에서 살며 마을의 정경과 사람들을 그렸다.해발 180미터 요새 마을에는 산 사람이 살 만한 땅 한 뙈기가 부족했다.그럼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있을 것은 다 있었다. 거기에서 나고 살다 세상을 떠난 이들과 더불어 샤갈과 같은 이방인 예술가 묘까지.마을을 떠날 때, 돌부리에 긁힌 상처들이 자동차 옆구리 여기저기에 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아침 햇살 속에 삶 이후, 영원의 풍경들을 그려 볼 수 있었으니. 샤갈과 함께 하루를 열 수 있었으니.함정임 님ㅣ소설가, 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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