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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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우리는 나아간다

 

올해 여덟 살이 된 아이는 숫자를 쓰는 것도 한글을 익히는 것도 늦은 편이었다. 아이가 일곱 살 때 나는 학부형이 된 선배들을 만날 적마다 “한글을 언제 읽고 썼나요?”라고 물어보곤 했다. 그때 아이는 자기 이름 석 자와 받침 없는 글자 몇 개만 겨우 읽고 쓸 줄 알았다. 육아 선배들이 “우리 아이도 학교 갈 때까지 잘 못 읽었다.”라거나 “입학을 앞두니 확 늘더라.”하고 말해 주면 마음이 놓였다.

 

하원 하는 아이를 데리러 가서 교실 앞에서 기다리다 보면 복도 벽을 따라 그 주 활동지가 줄지어 붙어 있는 게 보였다. ‘어버이날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여름 하면 생각나는 것’ 같은 주제에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색종이로 만든 꽃을 붙여놓은 활동지가 알록달록한 색을 뽐내며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의 활동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글씨는 전혀 없고 그림만 있거나 선생님이 써 준 글씨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 그걸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림으로 표현하는 건 좋지만 글자를 알면서 그림을 선택하는 것과 그림으로밖에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 살이면 한글을 읽고 쓰는 것이 좋겠다 싶어서 가르쳐 보려고 할때마다 아이는 아는 글자 몇 개를 내세우며 버텼다. “이것만 알아도 괜찮잖아.” 하면서 사는 데 어려움이 없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글자를 알면 혼자 책도 읽을 수 있는데?” “숫자를 배우면 버스 번호도 볼 수 있어.” 나는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예로 들어 설득했다. 

 

알게 되면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게 얼마나 즐겁고, 아는 것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하는지에 대해 아이에게 다 말해줄 수는 없지만 꼭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동화책은 엄마 아빠가 읽어 주면 되고 버스도 혼자 탈 일이 없잖아.” 하면서 숫자나 글자를 몰라도 사는 데 불편함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행히 고집부리는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다른 친구가 모두 읽고 쓸 줄 안다는 걸 파악한 뒤에는 아이도 한글을 익혀서 몇 달 만에 어려운 받침이 들어간 글자를 빼고는 읽고 쓰는 게 가능해졌다. 아이는 엄마 아빠를 조르지 않아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재미를 느꼈고, 좋아하는 공룡 책과 요괴 책에 작은 글씨로 등장하는 주의 사항이나 공격 포인트 같은 사소한 표현에 열광했다. 숫자로 표현된 공격력과 마력이 얼마인지 맞혀 보라며 퀴즈를 내기도 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생신 때 건넬 카드도 쓰고, 직접 만든 안마 이용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몇 줄의 글로 칭찬과 선물을 듬뿍 받은 아이는 카드와 안마 이용권을 남발했고 한글의 수혜를 톡톡히 누렸다. 내가 “글자 아니까 좋지?”라고 물으니 “괜찮네.” 하며 웃었다.


초등학생이 되니 국어 교과서에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가 나오고, 수학 수업 때는 덧셈과 뺄셈도 등장했다. 내가 새로운 것을 익히자고 하니 아이의 “몰라도 돼.” 시리즈가 또 시작되었다.


“엄마. 나 더하기 몰라도 되는데.” 사실 아이가 새로운 것, 모르는 것을 만날 때 보이는 반응을 접할 적마다 답답하면서도 속으로 뜨끔했다. 나야말로 낯선 것을 싫어하고 바꾸는 일에 소극적이며 익숙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것을 만나면 뒤로 한 발짝 물러나고 그걸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다고 속으로 외치곤 했다.

 

최신 기계나 유행에 대해서는 조금 미루고 더디게 따라가도 괜찮지만, 돌봐야 할 생명이나 귀 기울여야 할 목소리, 도움의 손을 뻗어야 할 처지의 사람과 지켜야 할 자연환경에 대해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 요즘이다. 

 

한 달 이상 지속되는 비를 보면서 ‘몰라도 되는데. 이 정도면 충분한데.’라고 생각해 온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돌아보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어른인 내 앞에도 알아 가고 배워야 할 일이 계속 나타난다.

 

아는 것이 자유로움이 아닌 죄책감과 고통의 문을 열 때도 있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안주하거나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나아감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이다.

 

 

서유미 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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