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장바구니0

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끝말잇기 끝판왕

지난 2월 말 가족 모두 제주도에 다녀왔다. 방학인데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 주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계획한 여행이 아닌, 이번에야말로 장인어른을 꼭 찾아뵈어야 한다는 심정으로 부랴부랴 준비한 일정이었다. 올해 예순다섯인 장인어른은 아직도 현장에서 폴리염화 비닐(PVC) 주름관 같은 자재를 직접 손에 잡고 일하는 배관공이다. 일의 성격상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석 달 혹은 육 개월씩 숙소 생활을 하곤 했다. 재작년에는 줄곧 강원도에서 일하다가 작년 봄 훌쩍 제주도로 떠났다.

 

“임금은 박한데, 그래도 제주도잖니. 구경 실컷 하고 또 너희가 놀러오면 내가 가이드도 하고…….” 그렇게 말하고 떠난 제주도여서인지는 몰라도 장인어른은 예전보다 부쩍 자주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날 즈음엔 늘 “언제 한번 안 내려오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마다 “네, 한번 갈게요.” 하고 인사했지만 그 약속을 쉽게 지키지 못했다.

 

지난 연말, 일 때문에 외국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어찌어찌 자리가 생겨 아내도 동행하게 되었다.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는 세 아이가 걱정이었지만 사정을 들은 장모님이 열흘 넘게 우리 집에서 대신 돌봐주기로 했다(장모님은 아내가 외국에 나가는 일이라면 언제든 당신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문제는 외국에서 돌아온 직후 생겼다. 장인어른이 냉랭한 목소리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외국에 나갈 시간은 있고 제주도에는 한 번도 오지 않는구나.” 아내가 “아니, 그게 아니고 아빠.” 하며 변명했지만 장인어른은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놔둬라, 남자란 나이를 먹으나 안먹으나 그냥 다 애야. 저절로 풀리니까 너무 애쓰지 마.” 장모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위 된 입장에서야 어디 그런가? 아내에 이어 내가 바로 전화했지만 장인어른은 쉬이 마음을 풀지 않았다. “알았네, 피곤하니까 다음에 얘기하세.” 그 말이 전부였다.

 

아아, 이거 큰일이구나. 나는 장인어른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제주도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어쨌든 내가 무심했던 게 맞으니까. 그건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나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제주도에 내려가 장인어른을 뵙고 함께 마라도도 가고, 이중섭 미술관을 둘러보고 흑돼지구이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도 장인어른의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이들과 얘기할 때는 영락없는 돌하르방처럼 웃는 모습이었지만, 우리 부부가 말을 걸면 다시 딱딱한 화강암이 되곤 했다. 장인어른의 그런 태도 때문인지 아내는 쉽게 지쳤다.

 

첫날 일정을 모두 끝내고 렌터카를 이용해 숙소로 돌아오는 중 아내는 기어이 깊이 잠들어 버렸다. 아내마저 잠이 드니 장인어른과 나 사이엔 더욱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깬 건 둘째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아빠, 우리 끝말잇기 해요.” 첫째와 막내 또한 엄마를 따라 잠들어 버렸고, 차에는 오직 나와 장인어른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인 둘째만 깨어 있었다. “우리 손자가 하자면 해야지.”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장인어른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바로 응답했다. 그러니 나 또한 어쩔 수 있나. 순서는 ‘나, 둘째 아이, 장인어른, 다시 나’ 하는 식으로 돌아갔다.

 

처음 나는 별생각 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끝말잇기를 했다. 내가 “제주도!” 하면 둘째 아이가 “도라지!” 하면서 받고, 장인어른이 바로 “지하철!”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순서가 몇 번 돌아가자 장인어른의 말을 받아 끝말을 잇는다는 것이 어쩐지 어색했다. 마치 꼭 장인어른을 게임에서 이기려 드는 것만 같고.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을 둘째 아이 선에서 끝내려고 마음먹었다. 마침 장인어른이 ‘한라산!’으로 바통을 넘긴지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둘째 아이에게 ‘끝장 단어’를 날렸다.

 

“산기슭!”

그래, 이제 조용히 숙소로 가자. 장인어른의 마음은 내일 또 풀면 되지. 나는 비로소 게임이 끝났다 생각하며 안도했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는 둘째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 하나로 모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산기슭…… 산기슭…… 그럼 나는 슭을 놈!” 그 말 덕분에 장인어른과 나는 한참 동안 마주 보며 웃었다(다행히 신호 대기중이었다). 그 웃음이 우리를 다시 예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둘째에게 고마웠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장인어른이 조용히 입을 뗐다. 

 

“놈팡이!”

끝말잇기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이기호 님 | 소설가 

 

       


고객문의

  • 정기구독02 - 337 - 0332
  • 다량문의02 - 330 - 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