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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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충주 버스 정류장

초등학교 동창인 그에게서 불쑥 연락이 왔다. 마침 남자 친구와 헤어져 기분이 울적한 터였다. 나는 언제 한번 충주에 놀러 오라고 했다. 그가 사는 곳은 울산. 버스로 다섯 시간 넘게 걸리는 충주까지 오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 약속을 잡았다. 그를 만나는 날,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하며 설레었다. 자취방 앞 버스 정류장에서 그에게 어디냐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맞은편 정류장.”이라는 답장에 고개를 들어 보니 4차선 도로 건너편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체인이 주렁주렁 달린 바지, 하얀 해골 장식이 박힌 가방. 게다가 모자에도 해골이 그려져 있었다. 

 

‘설마 저 사람은 아니겠지?’ 주위를 둘러보는데 그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소리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보았다. 빨리 그곳을 빠져나가는 게 나을 듯해 서둘러 횡단보도로 향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서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우산을 가져오지 않아 손으로 가렸다. 그가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들었다. 노란 바탕에 주황색 꽃무늬가 선명한, 덩치에 비해 작은 우산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우리는 칠 년 연애 끝에 결혼했다. 일 년이 지날 무렵 위기가 찾아왔다.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한 사업은 잘되지 않았고, 부족한 생활비에 이런저런 고민이 겹쳐 서로를 원망하는 일이 잦았다. 그날도 서로 큰소리를 내며 싸웠다. 한데 남편이 먼저 충주 여행을 제안했다. 예전에 살았던 집에도 가 보고, 연애 시절도 떠올려 보자는 것이다. 아직 덜 풀린 마음으로 남편을 따라나섰다가 또 크게 다투고 말았다. 나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혼자 밖으로 나왔다. 딱히 갈 곳이 없어 예전 동네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편과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며 걷는데 그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왼쪽을 봐.” 건너편을 보니 그가 버스 정류장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그쪽으로 갈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앞에 선 그가 뒤에 감춘 무언가를 꺼냈다. 그때의 꽃무늬 우산이었다. 사람들은 맑은 날씨에 우산을 펼쳐 든 우리를 힐끔거렸다.

“창피하니까 얼른 접어.” 우산을 든 그가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여행을 떠날 때부터 화해할 생각으로 우산을 챙겼을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그때부터 크게 다툰 뒤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장소를 찾았다. 서로를 위해 다섯 시간 거리를 오가고, 퇴근 후에 잠깐 보는 얼굴에도 더없이 행복했던 그 시절. 힘든 순간 함께 추억할 장소가 있는 것만으로 보물이 생긴 듯 뿌듯하다. 결혼이란 이렇듯 추억의 장소를 하나씩 늘려 가는 게 아닐까?


최수정 님 | 인천시 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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