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새벽 햇살

교도소에서 온 희망 편지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2019.07.30   조회수 : 176    댓글 : 1개
내가 어릴 적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곤 했다. 그로인해 결국 이혼했다.아버지의 행동은 내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대학에 입학하고도, 제대한 이후에도 외아들인 나는 아버지를 멀리하며 살았다. 간혹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원망이 앞서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제대하고 학원에서 강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교사가 꿈인지라 적성에 잘 맞았다. 차츰 경력이 쌓이고 강의 시간과 학생도 늘어났다. 수입도 두둑해졌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홀로서기에 성공한 스스로가 뿌듯했다. 아버지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었음에도 그에 연연하지 않고 자수성가했다. 보람을 넘어 자만심까지 들었다.​아버지는 서울에서 여러 사업을 벌였으나 연이어 실패했다. 결국 빚만 떠안은 채 할머니가 있는 시골로 내려갔다. 이후 새벽같이 일어나 화물차를 운전했다. 나는 소식을 전해 들어 아버지 형편을 알고 있었지만 외면했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고 방탕하게 살았다.​그러던 어느 날 큰 사건이 터졌다. 퇴근 후 동료와 술을 마시는 중 학원 주차장에 화재가 난 것이다. 그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까지 받은 나는 강사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가진 돈은 바닥났고, 그동안 쌓은 인맥도 하나둘씩 끊겼다. 내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이곳에 왔다. 내 삶은 이제 끝났다고, 내 곁엔 아무도 없다고 좌절했다. 아버지에게는 도저히 연락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동료 수형자들은 가족의 면회나 편지로 위로받았다. 지금껏 혼자서도 잘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나에겐 나뿐이었다. 갈수록 외로움이 깊어졌다.​나는 용기 내어 아버지에게 연락했다. 그간 소식이 끊긴 아들이 갑자기 구치소에서 연락하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혹시나 예전처럼 화를 내지는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 생각과 달리 아버지는 한달음에 면회를 왔다. 나를 원망하거나 질타하지 않았다. 아픈 데는 없는지, 힘들지는 않은지 물었다. 짧은 면회 시간 동안 내 걱정뿐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눈물을 보였다. 가족을 향한 잘못을 뉘우치면서. 나도 덩달아 울었다.​나는 지금껏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자만과 허영에 빠져 정작 중요한 가치는 모르고 살았다는 회한이 들었다. 아버지 역시 무심한 자식을 오래도록 기다리며 혼자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나는 아버지를 향한 원망을 씻어 내고, 지난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반성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힘들게 일하며 생계를 꾸린다. 그러면서도 당신보다 나를 걱정한다.​더 늦기 전에 아버지를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며 살자고 다짐해 본다. 몸과 마음이 떨어져 있었던 만큼 어색함도 쌓였지만, 앞으로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으리라.지금도 “아버지…….” 하고 되뇌면 가슴이 저려 온다.
아버지의 당부
2019.06.27   조회수 : 345    댓글 : 2개
추운 겨울 눈 내리는 밤, 어머니는 갓 돌이 지난 동생을 업고 집을 나갔다. 무엇이 세 살배기 어린 나를 재워 두고 어머니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을까. 전국으로 장사를 다니던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내의 빈자리는 술로도 채우지 못할 슬픔이었다. 단란했던 가정은 한순간에 어둠으로 빠져들었다.​그래도 아버지는 좌절하지 않았다. 어린 나를 할머니에게 맡기고 다시 일터로 갔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은 알지 못했지만, 할머니의 애틋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고등학교 다닐 땐 가정 형편이 나아져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렇게 성인이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무심히 흐르는 세월 속에 어머니의 존재를 묻어 버렸다.하루는 술자리에서 친구가 말했다. “엄마 없는 자식들이 늘 문제야.”​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말았다. 화기애애했던 자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파출소에 가서도 난동을 부렸다. 결국 나는 이곳에 들어왔다.​면회 온 아버지는 수척해 보였다. 눈물짓는 아버지 모습에 가슴이 미어졌다. 아버지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격려해 주었다. 사회에서는 책을 멀리하던 내가 이곳에 온 뒤 독서하는 습관을 들였다. 지난 일을 반성하며 배려와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주먹을 쥐면 남을 상하게 하지만, 펴서 한데 모으면 남을 위해 기도하는 손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용접 훈련생으로서 매일 불꽃을 튀기며 열심히 기술도 배우고 있다.​얼마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내게 언제 어디서나 기죽지 말고,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땀 흘린 만큼의 몫만 거두며 성실히 살아가라고 당부했다. 오늘도 아버지의 말을 새기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제 사랑할 시간
2019.06.03   조회수 : 512    댓글 : 1개
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어머니는 나를 낳다 세상을 떠났다. 태생적 죄책감 때문인지 나는 아버지 눈치를 많이 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원망하는 게 느껴졌다.중학생 시절, 하루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속마음을 내비쳤다. 나 때문에 엄마가 목숨을 잃었다고. 차라리 욕이나 손찌검을 하는 게 나았을 텐데, 그 말은 못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혔다.이따금 아버지는 나를 신경질적으로 대했다. 사소한 실수에도 불같이 화냈다. 잘 챙겨 주지 않아 나는 늘 낡은 옷을 입었다. 생일 선물 받은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다.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독립했다. 아버지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숙식을 제공하는 식당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돈을 모아 집을 구하고 공장으로 일터를 옮겼다. 꾸준히 저축해 스물다섯 살에는 휴대 전화 대리점을 열었다.마냥 잘될 줄만 알았다. 한데 좀처럼 돈이 벌리지 않았다. 낮은 실적에 허덕이다 결국 나쁜 짓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이곳에 왔다.​하루는 누군가 접견을 왔다. 가끔 오는 친구들이려니 싶었는데, 아버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갸우뚱했다.‘어떻게 알고 왔지?’접견을 취소할까도 생각했지만 중요한 일이 있나 싶어 일단 만나기로 했다.오랜만에 본 아버지는 왜소했다. 건장했던 옛날 모습이 떠올라 측은했다.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건넸다.“그동안 잘 지내셨어요?”아버지는 힘없이 나를 쳐다볼 뿐 별다른 말이 없었다.“무슨 일 있어요?”“와 봐야 할 것 같아서 왔다. 다른 일은 없다.”순간 화가 났다.“왜 왔어요? 차라리 나오지 말걸.”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갑자기 울분이 터졌다.“아버지가 날 이렇게 만든 거예요.”“미안하다.”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나는 외려 왜 우느냐며 화를 냈다. 아버지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네 엄마를 생각하면 너를 좀 더 따뜻하게 키웠어야 했는데, 내가 속이 좁았다.”아버지는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했다.내가 커 갈수록 의도적으로 멀리했단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그동안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아버지는 어머니를 무척 사랑한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아버지가 가여웠다. 그래도 나를 키워 준 분 아닌가. 생일 선물이나 새 옷을 사 주지는 않았어도 바르게 크길 바랐을 것이다.아버지는 이후로도 종종 접견을 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어디서 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고 했다. 휴대 전화 대리점을 할 때에는 몰래 찾아와 멀리서 지켜보기도 하고, 나 모르게 영치금을 넣은 적도 있단다.그렇게 아버지와의 사이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나는 농담을 건넬 정도로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었다.아버지는 어머니 얘기도 해 주었다. 어릴 적 한동네에 살았던 어머니는 인기가 많았단다. 어머니 마음을 얻으려 무진 애를 썼다고.아버지는 그때를 회상하며 즐거워했다.이토록 밝은 모습을 본 적 있었던가. 무엇이 아버지를 바꾸었을까.비록 아픔과 상처는 남았지만 이제라도 아버지가 행복하면 좋겠다. 이곳에서 나가면 아버지와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우리에겐 사랑할 시간도 모자라기에.
갚을 수 없는 은혜
2019.05.08   조회수 : 967    댓글 : 2개
나는 네 아이를 둔 엄마다. 결혼 생활은 전쟁 같았다. 힘겨운 일이 첩첩산중으로 밀려왔다. 세 아이 아빠와 이혼하고, 재혼해 딸을 낳았다. 한데 얼마 후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혼자 아기를 키워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이곳에 오기 전 난생처음 재판을 받았다. 내가 구속되면 일곱 살 된 딸을 돌봐 줄 이가 없어 보육원에 보내야 했다. 판사는 피해자와 합의하면 구속을 면할 수 있다고 했으나 돈이 없었다. 그래서 구속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학원을 운영했다. 그러나 잘못은 한순간이었다.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훨씬 빠르고 그 충격이 컸다.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죗값을 치르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엄마밖에 모르는 내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하나……. 난 친인척이 없어 명절도 방에서 아이와 둘이 보내야 했다. 아이가 버림받은 기억을 견딜 수 있을까? 아이 앞에서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엄마가 8년 같은 8개월 동안 자신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구속 이틀 전, 아이에게 말도 못하고 보육원으로 짐을 옮겼다. 우연일까? 아이를 보내려는 보육원은 내가 일 년 전부터 수학을 가르치는 봉사를 한 곳이었다. 그곳의 아이들, 친절한 수녀님들과 인연을 쌓았다. 한데 그곳에 아이를 맡길 줄이야.‘난 나쁜 엄마구나.’ 눈물이 터졌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수녀님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난 아이를 꼭 데리러 오겠노라 약속했다. 잘 부탁한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차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학원을 운영할 당시 생후 6개월이던 딸을 돌봐 준 선생님의 남편이었다. 선생님과 나는 부쩍 친해져 언니 동생 사이가 되었다. 언니 내외는 형편이 넉넉하진 않아도 늘 인자했다.“잘 지내지?” 난 여느 때처럼 밝은 목소리로 답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네.”라고 한 뒤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르신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제주도에 몇 달 다녀올 것 같아요.”“왜?”딱히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그냥요.”“무슨 일 있지?”결국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어르신은 잠시 말이 없더니 금세 목소리에 힘을 싣고 얘기했다. “우리 집에 데리고 와.” 나는 천만금을 선물받은 것보다 더 기뻤다. 그럼에도 마음에 없는 거절을 했다. “아녜요, 어떻게 그래요.” 어르신은 단번에 내 대답을 잘랐다.손주가 없던 언니 내외는 우리 아이에게 첫 정을 주었다. 일 년간 아이를 돌본 인연을 꾸준히 이어 왔다.난 짐을 들고 어르신 집으로 갔다. 아이가 두 분과 지내게 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아이에게는 출장 간다고 거짓말하고 돌아섰다. 아이는 8개월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 셈할 수조차 없었다. 겨우 “몇 밤 자면 와?”라고 할 뿐. 이곳에 온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보고 싶은 아이와 통화할 수 있었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서로 울기만 하다 주어진 3분이 다 지나갔다. 그래도 두 분 덕에 아이는 잘 지냈다.난 결심했다. ‘마땅히 죗값을 성실하게 치르자.’ 미용 기술을 배워 수용자들에게 미용 봉사를 하고, 자동차 부품 조립 일도 한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형기의 절반이 지났다.하루는 언니 내외가 면회를 왔다. 그저 눈물만 흘렀다.“죄송해요.”“미안해하지 말고 나와서 잘 살면 돼. 아이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게만 지내.”나는 두 분에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 출소하면 큰절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각박한 세상에서 한 줄기 빛으로 용기를 얻었다. ‘열심히 살자! 내 삶은 다시 시작이다.’
내 곁을 지키는 사람
2019.04.08   조회수 : 1,104    댓글 : 2개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그날은 삼 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부모님의 기일이자, 내 생일이기도 했다.부모님 산소에 다녀와 평소보다 늦게 가게 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소영이가 찾아왔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소영이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스물여섯동갑내기 중 유일하게 결혼한 친구이기도 했다.‘이 시간엔 애들 때문에 나올 수 없을 텐데…….’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애들은 어쩌고.”“애들은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이리 앉아 봐.”소영이를 초등학생 때부터 한동네에 살며 보아 왔으나, 그날 모습은 낯설 만큼 진지했다.“무슨 일인데 사람을 긴장시켜?”“부탁이 있어서 왔어.”“뭔데?”“…….”얼마 전 급히 쓸 데가 있다며 다짜고짜 이백만 원만 빌려 달라고 할 때도 맡겨 둔 돈 찾아가듯 당당하던 소영이었다. 한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너답지 않게 왜 이리 뜸 들여?”“친구가…… 얼마 전 아기를 낳았어.”“나도아는 친구야?”“그럼, 너와도 인연이 있지. 네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소개해서 만난 적 있어. 민지라고.”“민지?”부모님 사고 나기 한 달 전쯤, 소영이가 이번 크리스마스엔 혼자 청승 떨지말고 여자 친구 만들어 보라며 소개해 준 이였다. 무슨 얘기를 해도 잘 들어 주고 웃어 준, 눈이 참 예쁜 사람.“네가 부모님 돌아가시고 연락 끊어서 많이 속상해했어. 이 년 전에 같은 학원 강사랑 사귀었는데, 그놈이 사기꾼이었어. 민지한테 같이 학원 차리자고 거짓말하더니 돈만 갖고 도망가 버렸어. 그중 부모님 돈도 있었다네. 돈이야 앞으로 벌면 되는데, 문제는 임신을 한 거야. 그나마 조금 갖고 있던 돈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모양이더라. 아기 낳고 갈 데가 없대. 부모님도 연을 끊은 상태고. 얼마 전에 빌려간 돈도 민지 병원비였어. 지금 우리 친정에 있다.”그제야 소영이가 하려는 말을 알 듯했다.“우리 집으로 데려와.”소영이는 속내를 들켜 놀란 눈치였다.“뭐?”“그 말 하고 싶었던 거잖아.”“정말?”“내가 이 층으로 옮기고, 일 층 쓰면 되겠네.”소영이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오늘 주문 처리하고 집에 가면 늦을 거야. 열쇠 줄 테니까 먼저 가 있어.”“당분간만 있게 해 줘. 거처 마련해 볼 테니까.”“쭉있으라고 해. 일 층 세줬다고 생각하지 뭐.”“고마워, 정말.”소영이가 돌아가고 문득 부모님 사진이눈에 들어왔다. 두 분이 웃고 있었다.집에 도착하자 잠든 아기와 민지가 있었다. 소영이는 잘 부탁한다며 내 손을 꼭 잡고는 돌아갔다.그날 밤 나는 몰래 집에서 나가려는 민지와 마주쳤다.“여기 와서야 알았어. 네 집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야. 내가 있을 곳은 아닌 것같아. 미안해.”“갈 데는 있어? 밖에 날씨가 아기가 견디기엔 너무 추워. 아기를 생각해야지.”민지는 말없이 아기 얼굴만 바라보았다.“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그날 이후 민지는 이십 년 동안 내 곁을떠나지 않았다.내가 이곳에 오면서 이제는 떠나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곁을 지키고 있다.민지는 접견 올 때마다 나에게 다짐을받는다. “내 허락 없이 떠나라는 말 하지마. 알았지?”“민지야, 내 곁에 와 줘서 고마워. 미안해그리고 사랑해.”
자유보다
2019.03.11   조회수 : 961    댓글 : 0개
나는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성공하고 싶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여겼지만, 돌이켜 보니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나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홀로 일곱 남매를 키웠다.옷은 물려 입었으나, 먹는 것은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그때부터어른이 되면 가족들에게 가난의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물질 만능 주의에 빠져 살았다.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으로 키워 주었다. 나도 자식을 길러 보니조건 없는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무뚝뚝한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그저 낯부끄러웠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깨달았다. 우리 삶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연인과의 사랑, 직업에 대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등.나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자유를 잃었다. 그러나 수형 생활을 할수록커져 가는 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이 아니다. 바깥에서 지내는 가족들 생각이다.남편 없이, 아버지 없이, 자식 없이, 형제 없이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는 소중한 이들이 떠오른다.내게 진정 절실한 건 자유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들을 향한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한 지난날이 후회된다.이제는 접견실 창을 두고 마주한 가족에게 서슴없이 사랑을 말한다. 반성과속죄의 시간을 통해 어느새 나도 사랑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사회로돌아간다면 사랑을 더 많이 나누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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