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새벽 햇살

교도소에서 온 희망 편지

내 곁을 지키는 사람
2019.04.08   조회수 : 216    댓글 : 2개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그날은 삼 년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난부모님의 기일이자, 내 생일이기도 했다.부모님 산소에 다녀와 평소보다 늦게 가게 문을 열었다. 초등학교 동창인 소영이가 찾아왔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소영이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스물여섯동갑내기 중 유일하게 결혼한 친구이기도 했다.‘이 시간엔 애들 때문에 나올 수 없을 텐데…….’ 무슨 일인가 싶어 물었다.“이렇게 돌아다녀도 돼? 애들은 어쩌고.”“애들은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얼른 이리 앉아 봐.”소영이를 초등학생 때부터 한동네에 살며 보아 왔으나, 그날 모습은 낯설 만큼 진지했다.“무슨 일인데 사람을 긴장시켜?”“부탁이 있어서 왔어.”“뭔데?”“…….”얼마 전 급히 쓸 데가 있다며 다짜고짜 이백만 원만 빌려 달라고 할 때도 맡겨 둔 돈 찾아가듯 당당하던 소영이었다. 한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너답지 않게 왜 이리 뜸 들여?”“친구가…… 얼마 전 아기를 낳았어.”“나도아는 친구야?”“그럼, 너와도 인연이 있지. 네 부모님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소개해서 만난 적 있어. 민지라고.”“민지?”부모님 사고 나기 한 달 전쯤, 소영이가 이번 크리스마스엔 혼자 청승 떨지말고 여자 친구 만들어 보라며 소개해 준 이였다. 무슨 얘기를 해도 잘 들어 주고 웃어 준, 눈이 참 예쁜 사람.“네가 부모님 돌아가시고 연락 끊어서 많이 속상해했어. 이 년 전에 같은 학원 강사랑 사귀었는데, 그놈이 사기꾼이었어. 민지한테 같이 학원 차리자고 거짓말하더니 돈만 갖고 도망가 버렸어. 그중 부모님 돈도 있었다네. 돈이야 앞으로 벌면 되는데, 문제는 임신을 한 거야. 그나마 조금 갖고 있던 돈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모양이더라. 아기 낳고 갈 데가 없대. 부모님도 연을 끊은 상태고. 얼마 전에 빌려간 돈도 민지 병원비였어. 지금 우리 친정에 있다.”그제야 소영이가 하려는 말을 알 듯했다.“우리 집으로 데려와.”소영이는 속내를 들켜 놀란 눈치였다.“뭐?”“그 말 하고 싶었던 거잖아.”“정말?”“내가 이 층으로 옮기고, 일 층 쓰면 되겠네.”소영이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오늘 주문 처리하고 집에 가면 늦을 거야. 열쇠 줄 테니까 먼저 가 있어.”“당분간만 있게 해 줘. 거처 마련해 볼 테니까.”“쭉있으라고 해. 일 층 세줬다고 생각하지 뭐.”“고마워, 정말.”소영이가 돌아가고 문득 부모님 사진이눈에 들어왔다. 두 분이 웃고 있었다.집에 도착하자 잠든 아기와 민지가 있었다. 소영이는 잘 부탁한다며 내 손을 꼭 잡고는 돌아갔다.그날 밤 나는 몰래 집에서 나가려는 민지와 마주쳤다.“여기 와서야 알았어. 네 집인 줄 알았으면 안 왔을 거야. 내가 있을 곳은 아닌 것같아. 미안해.”“갈 데는 있어? 밖에 날씨가 아기가 견디기엔 너무 추워. 아기를 생각해야지.”민지는 말없이 아기 얼굴만 바라보았다.“가고 싶으면 언제라도 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그날 이후 민지는 이십 년 동안 내 곁을떠나지 않았다.내가 이곳에 오면서 이제는 떠나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곁을 지키고 있다.민지는 접견 올 때마다 나에게 다짐을받는다. “내 허락 없이 떠나라는 말 하지마. 알았지?”“민지야, 내 곁에 와 줘서 고마워. 미안해그리고 사랑해.”
자유보다
2019.03.11   조회수 : 305    댓글 : 0개
나는 사회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성공하고 싶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여겼지만, 돌이켜 보니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였다.나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홀로 일곱 남매를 키웠다.옷은 물려 입었으나, 먹는 것은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그때부터어른이 되면 가족들에게 가난의 고통을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물질 만능 주의에 빠져 살았다.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으로 키워 주었다. 나도 자식을 길러 보니조건 없는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무뚝뚝한 나는 사랑이라는 말이 그저 낯부끄러웠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깨달았다. 우리 삶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부모 자식 간의 사랑, 연인과의 사랑, 직업에 대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등.나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자유를 잃었다. 그러나 수형 생활을 할수록커져 가는 것은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이 아니다. 바깥에서 지내는 가족들 생각이다.남편 없이, 아버지 없이, 자식 없이, 형제 없이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는 소중한 이들이 떠오른다.내게 진정 절실한 건 자유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들을 향한 사랑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한 지난날이 후회된다.이제는 접견실 창을 두고 마주한 가족에게 서슴없이 사랑을 말한다. 반성과속죄의 시간을 통해 어느새 나도 사랑을 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사회로돌아간다면 사랑을 더 많이 나누며 살고 싶다.
희망 공부
2019.02.11   조회수 : 615    댓글 : 4개
나는 스무 살이 되도록 구구단을 잘 외우지 못했다. 친구들은 군대에 다녀오고 직장에서 자리를 잡았으나 나는 학력 제한으로 군대도 못 가고 변변한직업도 없이 방황했다.그러다 죄를 짓고 이곳에 왔다. 처음엔 아무 의미 없이 수형 생활을 했다. 공장에서 일하고, 정해진 시간에 밥 먹고, 잠자며 기계적으로 살았다.어느 날 부모님을 대신해 나를 키워 준 할머니가 접견을 왔다. 할머니는 부쩍 연로해 보였다.“오늘 널 만나는 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네가 나중에 출소해서 살 수 있는길은 그 안에서 공부하는 것뿐이다.”할머니는 유언을 남기듯 말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약속했다. 그제야 할머니 얼굴이 밝아졌다.며칠 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생이 얼마남지 않은 것을 알고 내게 마지막 당부를 한 걸까.그럼에도 나는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공부해서뭘 해, 졸업장 같은 건 필요 없어.’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그러다 이송을 갔다. 다시 새로운 곳에 적응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새 보금자리에서 지내는 중 검정고시 응시생을 모집한다는공고를 보았다. 공장 작업이 고되고 무료했던 터라 너도나도 신청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예비 시험을 치렀다. 합격 여부는 궁금하지 않았다. 당연히 떨어질 거라 여겼다. 한데 며칠 뒤 담당자가 시험을 통과했으니 원서를 쓰러 가자고 했다. ‘그럴 리 없는데.’ 하면서도 무척 기뻤다.하나 곧 걱정이 들었다. 국어, 영어, 수학…….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더군다나 내가 소속된 공장에서 나만 통과한터라 공장 담당자까지 잘하라며 응원하는게 아닌가. 부담이 커져 잠이 오지 않았다.주변에서 하나둘 나를 도와주고 격려해주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매일 공부에 전념했다.마침내 중학교 검정고시 전 과목에 합격했다. 이듬해 고등학교 검정고시도 합격해졸업장을 갖게 되었다.자신감을 얻은 나는 방송 통신 대학을알아보고 예비 시험까지 치렀다. 그러나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포기했다. ‘그럼그렇지, 내가 무슨 대학을…….’그러던 어느 날,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등록금이 없는 독학사 과정을 시행한다는것이다. 하나 금전적 부담은 여전했다. 책열일곱 권이 필요한 데다 시험 단계별로 응시료를 내야 했기 때문이다.때마침 한 직원이 자매결연을 맺은 교회목사님에게 내 사정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덕에 교재비를 지원받아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열심히 준비해서 1단계 시험을 치렀으나다섯 과목 중 네 과목이 불합격이었다. 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역시 나는 안 되나?’싶어 힘들었다.소식을 들은 목사님은 오히려 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그리고 따뜻한 말로격려해 주었다. 지금까지 잘해 왔다고 힘을실어 주었다. 나는 용기를 얻어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듬해 1단계 시험에서 전 과목합격했다. 이어 나머지 단계는 물론 졸업시험까지 통과했다.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던 내가 대학 졸업장까지 받았다. 결국 운명은 오래된 나의습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 달린 것이었다.누군가 예전의 나처럼 자신감을 잃었다면, 지레 겁먹고 뒷걸음질 친다면 용기를내면 좋겠다. 나 역시 계속 희망으로 나아가리라 다짐한다.“할머니, 저 약속 지켰습니다.”
꼬리 없는 붕어빵
2019.01.08   조회수 : 660    댓글 : 3개
우리 부모님은 어머니의 외도로 이혼했다. 군인인 아버지는 일이 바빠 나와세 살 많은 누나를 키우기 어려웠다. 새 삶을 살려던 어머니에게도 우리는 걸림돌이었다.어머니는 큰어머니를 찾아가 우리를 부탁했다. 큰어머니는 화를 내며 “이렇게 갈 거면 보육원에 보내겠다.”라고 했다. 결국 우리 남매는 어머니 그리고 새아버지와 같이 살았다.새아버지는 차가웠으나, 가끔 외식도 하고 놀이공원도 가며 추억을 쌓았다.한데 얼마 후, 새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동생이 태어났다. 그 뒤로 차별이시작됐다.처음엔 구박과 꿀밤 정도였다. 한데 “밥값을 해야 한다.”라며 고된 일을 시키더니, 날이 갈수록 때리는 정도가 심해졌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무렵에는 얼굴에 멍이 들어 어머니 화장품으로 가렸다. 그래도 숨겨지지 않아 학교에 못 가는 날도 있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다투는 날이 늘더니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도 맞기 시작했다. 우리 남매는 불안 속에서 살았다.어머니는 갑자기 사라졌다. 우리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새아버지는 우리를몰아붙였다. “느그 엄마 어디 갔노? 어디 있는지 알제?” 우리는 공포에 떨었다.폭력은 더 심해졌다. 여린 누나는 무슨 용기에선지 매번 내 앞을 가로막았다.무서워하면서도 비켜나는 일이 없었다. 누나의 떨림이 뒤에 숨은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덕에 나는 조금이나마 매를 피할 수 있었다. 누나는 내게 영웅이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희망이자 웃음을 주는 친구였다. 늘 엄마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다.어느 캄캄한 새벽, 누나가 나를 깨웠다. “현관문 나가면 누나 손잡고 뛰어.”혹시 들키면 어쩌나 두려웠지만 누나를 믿고 전력을 다해 달렸다. 우리는 한참을 뛴 다음 정처 없이 걸었다. 놀이터나 상가 건물을 전전했다.다음 날 저녁, 이틀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는 울면서 누나를 졸랐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돈이 없었다. 어른에 대한 적대감때문에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계단에서 졸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집에 안 가고 뭐 하니?” 누나는“신경 쓰지 마세요.” 하며 내 손을 잡고 언제라도 도망칠 준비를 했다. 아저씨는 그모습을 물끄러미 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나는 다시 졸기 시작했다.얼마 뒤 돌아온 아저씨가 누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붕어빵이었다. 우리는 망설이다 허겁지겁 먹었다. 살면서 가장 맛있게먹은 음식이었다.우리는 아저씨의 도움으로 외할머니 댁에 갔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군에서 전역한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갔다. 이후 누나와 나는 집 앞 붕어빵 가게를지날 적마다 아저씨의 따뜻한 손길을 떠올렸다.붕어빵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그러나 우리 형편으론 하나에 몇백원 하는 붕어빵도 사 먹기 힘들었다. 한 마리라도 살 수 있는 날엔 반씩 나누어 먹었다. 누나는 늘 내게 머리 부분을 내밀었다.나는 어린 마음에 ‘꼬리 쪽이 맛있나?’ 싶었다. “왜 맨날 누나만 꼬리 먹는데? 나도꼬리 먹고 싶다.” 내가 투덜대자 누나는 말했다. “머리를 먹어야 머리 좋아지지. 커서똑똑해지려면 머리 먹어.”그땐 멋모르고 서운했는데 이제야 알았다. 팥이 많고 부드러운 쪽을 내게 양보했다는 것을.지금 나는 잘못된 선택을 해 이곳에 왔다. 누나는 하나뿐인 동생 없이는 결혼식을 올릴 수 없다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붕어빵을 들고 누나를 찾아갈 날을 기다리며, 반성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성실히지낸다.“누나, 요즘은 꼬리에 크림 들어간 붕어빵도 있대. 실컷 먹어 보자. 사랑해.”
나를 사랑하기
2018.12.07   조회수 : 859    댓글 : 4개
나는 축복받지 못한 채 태어났다. 갓난아이 때 부모님에게 버려졌다.어떤 분들의 도움으로 나는 한 가정에 입양됐다. 여섯 살까지는 귀여움과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하지만 행복도 잠시, 양부모님의 불화로다시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러다 여덟 살에 보육원에 맡겨졌다.친부모와 양부모에게 두 번 버림받은 나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초등학생 때도시락을 싸 가지 못해 물로 배를 채운 일도 잊지 못한다.서러워하며 얼굴도 모르는 부모님을 간절히 기다렸다. 한 아이가 엄마와 손잡고핫도그를 먹으며 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만 엉엉 운 적도 있다.열여덟 살에 보육원을 퇴소했다. 사회는냉정한 곳이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두려웠다.갈수록 성격이 거칠고 비뚤어졌다. 수차례 싸움을 하며 말썽을 일으키다 결국 이곳까지 왔다. 내게 내려진 형벌 앞에 나는무너져 내렸다.이곳에서 깨달은 게 있다. 나의 정체성과내 삶을 비관하며 보낸 사십 년의 세월이허무했다. 무엇보다 그간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자숙의 시간을 보내며 운동과 독서로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중이다. 늘 부정적이던 사고방식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수감생활 중 얻은 큰 변화다.그간 수없이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며 지냈다. 출소를 앞두고 다짐한다. 자유를 되찾으면 나 자신과 이웃을 사랑하며살겠다고.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