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 <청소 직업 전문 학원 원장 정재현 님>
2017.11.07   조회수 : 4,795    댓글 : 1개

청소를 누가 돈 주고 해?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해야지.

어떤 이에게 청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막상 하자니 귀찮은 일로 다가온다. 하지만 청소 직업 전문 학원 정재현 원장(52세)은 주위를 깨끗이 정리해야만 정신 역시 맑아진다고 믿는다. 청소는 사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카피라이터, 옥외 광고 전문가, 농부, 여행사 대표 등 그동안 거친 이력은 화려하지만 지금의 일에 가장 만족한다고 말한다. 

 

카피라이터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한번은 전자수첩 홍보를 맡았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꽤 많은 돈을 벌자 자신감이 생겨 옥외 광고 분야까지 진출했죠.

그런데 갑자기 아이엠에프의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잘될 줄 알았던 일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늘 위기에 가로막혔다. 

 

3개월 동안 집에 틀어박혀 망연자실했죠. 이제 남은 건 몸뚱이뿐이구나 하면서요. 그러다 예전에 일본으로 어학연수 갔을 때가 떠올랐죠. 거기서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청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었어요. 청소부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대단했죠. 내겐 아직 건강한 몸이 있으니 그 분야에 도전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저기……. 청소를 배우고 싶습니다.” 청소 업체에 연락하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을 받지 않아도 좋으니 시켜만 달라고 매달리길 수차례, 고맙게도 한 청소 대행업체 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지저분한 곳을 쓸고 문지르는 게 전부였지만 청소에 매력을 느끼기 충분한 기회였다. 무엇보다 일의 순서를 익힐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사업 실패 후 배운 게 있어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만 신경 쓰면 절대 잘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마 어린 나이였다면 청소를 초라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몸을 쓰는 일만의 특별함을 깨달았어요. 땀 흘릴수록 정신이 맑아진다는 거죠. 공간이 말끔해진 만큼 머릿속 잡념이 싹 사라졌어요. ‘아, 누구나 깨끗한 공간에서 살 필요가 있구나!’ 이 분야에서 점점 비전을 찾았죠.

그는 본격적으로 청소 대행업체를 차렸다. 일이 들어오면 도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아내와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부끄러워 고개 숙인 적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제법 단골도 생겼다. 어느집은 너무 지저분해 처음엔 치우는 데만 여덟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기간을 두고 몇번씩 방문하자 시간이 짧아졌다.고객은 몰라보게 달라진 표정으로 자랑했다. “이제야 깨끗한 곳에서 지내는 기쁨을 알겠어요. 날마다 조금씩 치우다 보니성격도 밝아졌고요. 고맙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성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2013년, 청소 전문 학원을 열었다. 주위에선 누가 청소를 돈 주고 배우느냐며 타박했지만 ‘나처럼 알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 역시 청소를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묻고 또 물었다. 어떤 세제를 써야할지 몰라 공부하고, 제조사에 연락하다 밤을 샌 적도 있었다.


타일만 해도 목재, 도기, 유리 등 종류가 여러 가지예요. 어떤 도구에 무슨 세제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죠. 또 원인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주된 고민 중 하나가 부엌 정리거든요. 부엌에서 제일 중요한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마루와 싱크대 사이 공간이에요. 먹을 게 있고 어두운 곳이라 바퀴벌레가 생기기 쉽거든요. 먼지를 닦고 환기를 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해충을 막을 수 있죠. 이렇듯 파고들수록 공부할 것이 많다 보니 수강생들이 입을 쩍 벌린다니까요. 무엇보다 청소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깨닫는 과정이 보람있어요.

스물셋의 청년부터 일흔넷의 어르신까지, 나이와 사연은 천차만별이지만 누구 하나 청소를 쉽게 여기지 않는다. 단순 기술뿐 아니라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운 그들은 자신을 ‘삶을 변화시키는 전문가’라 말한다.

 

청소를 통해 배운 게 많기에 갈수록 자부심이 커져요. 예를 들어 정리를 위해선 버릴 걸 정해야 하죠. 고객을 만나 보면 냉장고엔 작년 추석 음식, 옷장엔 3년 전 입었던 옷이 수두룩해요. 그때마다 질문하죠. ‘이게 꼭 필요합니까?’ 그럼 대부분 고개를 저어요. 당사자로선 큰 결심이죠. 버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얻기 위해선 먼저 버려야 한다는 걸 직접 경험해 보니 제 인생도 단순하고 명확해졌어요.

 

인터뷰 전문은 좋은생각」 12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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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신정호
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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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서점에 가면 
무서울 정도로 AI(인공지능)의 발전을 경고하는 책이 넘치는데,
적어도 기계가 대신 못하는 영역의 일을 
사람의 힘으로 프로정신을 갖고 덤비다면
앞으로도 직업에 희망을 갖고 계속 도전할 수 있겠네요.

버리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 공감합니다.
저도 먼저 버리고 제 인생을 단순, 명확하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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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의 기쁨
책과 사람이 있는 곳 <서원지기 전영애 님>new
2018.11.09   조회수 : 89    댓글 : 0개
경기도 여주시 보금산 자락에는 서원이 있다. 서울대 독문과 명예 교수 전영애 님(67세)이 세운 공부하는 집. 아버지 호인 여백(如白)을 따서 여백서원이라부른다.아버지의 성품이 맑다고 친구분들이 지어 준 호랍니다. 이곳이 ‘맑은사람들을 위한 집’이길, 여백 같은 공간이길 바라며 이름 붙였습니다.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월마토’라고 부른다.)이면 이곳으로 사람들이 하나둘모여든다. 이날은 누구든 서원을 방문할 수 있다. 그녀의 안내로 서원을 둘러보거나 갤러리에서 전시를 관람하기도 하지만 종일 책만 읽는 사람도, 산 위전망대에 올라 내내 경치만 보다 돌아가는 경우도 있단다.여러 사람을 위한 집을 짓는 건 오래전부터 생각한 일이었다. 원래 여백서원은 작은 정자에서 시작됐다. 좁아도 좋으니 따로 글을 쓸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 온 터다. 2004년 지인이 여주의 한 농가를 소개했다. 허름해도 집필실이 생겨 무척 기뻤다. 짬만 나면 달려와 글을 썼다. 한데 마음에 들수록 걱정이 커졌다. 마을 땅이라 언제라도 집이 헐릴 수 있는 것. 그녀는 건넛마을에 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밭 1,200평을 덜컥 샀다.형편도 생각하지 않고 저질렀어요. 빚 갚느라 몇 년을 고생했죠. 땅만 있지 집 지을 돈이 없었어요.그곳에 ‘시정’이라는 작은 정자를 세웠다. 목수는 여유가 없는 그녀를 위해지나는 길에 한 번씩 들러 봐주었다. 보통 2주면 뚝딱 지을, 방과 마루 2칸짜리집은 무려 1년 7개월에 걸쳐 완성됐다. 돌 하나도 그녀가 직접 사다 날랐다. 이렇게 마련한 터에 나무도 심었다. 계단이나 돌 틈새에서 자라 곧 뽑힐 운명인어린 나무들을 데려왔다. 제자나 지인이 꽃과 나무를 가져와 심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니 제법 잘 자라 푸르러졌다. 이 공간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졌다. 2014년 시정 아래 세운 여백서원 본관과 이듬해 그 건너편에 들어선 ‘우정’은 그렇게 탄생했다. 우정은 외국 작가나 예술가, 학자 등이 1년에 두 팀씩와서 무료로 머무르며 작업을 한다. 개인이 이런 일을 하는 게 신기해 물으니이런 말이 돌아왔다.‘선에 대해서 그대 보답을 받았던가. 나의 화살은 하늘로 날아갔다오. 참 아름답게 깃털 달고. 온 하늘 열려 있었으니 어디엔가 맞았을 테지요.’ 괴테의 이말을 참 좋아해요. 저도 독학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그녀는 고등학생 때 세계 문학 전집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웠다. 특히 제2 외국어로 독일어를 공부하면서 릴케나 괴테 등 독일 작가들에게 매료됐다. 자연스레 전공도 독문학을 택했다.대학원을 마칠 때까지는 별문제가 없었다.졸업 성적이 좋아 학과 조교로 뽑혀 유학시험을 치를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군대에다녀온 남학생이 그녀의 자리를 차지해 그다음 길이 사라져 버렸다. 해외 유학 기회도, 박사 과정 진학도.결혼해 아이들을 낳으며 배움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지는 듯했다. 간신히 유학 기회를얻어 독일에 갔으나 두고 온 2개월 된 아기가 눈에 밟혀 3학기 만에 돌아왔다. 이후박사 과정에 진학할 때까지 무려 십 년이 걸렸다.혼자 책이란 책은 다 읽고 번역했어요. 젓가락질도 못할 정도로 타자기를 쳤죠. 번역서를 낼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막읽었지요. 할 줄 아는 건 읽는 것뿐이니까.그때 열심히 본 게 후에 큰 힘이 되었죠.그녀는 책을 읽으며 저자 역시 온갖 고생끝에 그 경지에 이른 걸 알았다. ‘이렇게 훌륭한 책을 쓴 사람도 힘든 인생을 감내하며사는구나.’ 싶어 어려운 일도 의연하게 감당했다.그녀가 두루마리 하나를 가져와 조심스럽게 풀어 보여 주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필사한 책이다. 어머니는 배움에 열망이 컸다. 큰살림을 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책을읽고 일일이 한지에 베끼며 외웠다. 글자가적힌 것이라면 신문 한 장도 소중히 여겼다. 뒤이어 대나무 바구니에서 종이 뭉치를꺼냈다. 증조부의 문집을 그녀의 아버지가옥편 160권을 찾아 가며 번역한 것. 괴테의작품은 읽어도 증조부 글은 못 읽는 딸을위해서였다. 붓으로 한 자 한 자 쓴 종이가천 장이나 된다.어머니, 아버지가 남겨 준 책을 소중히보관하고, 살면서 받은 도움을 되돌려 주고자 그녀는 서원을 만들었다.누구든 산책하며 시를 만나고 서원 곳곳에 놓인책을 들춰 보며 생각할 시간을 갖길 희망한다. 자신을 추스르고 같이 이야기나눌 곳이 있다면 든든할 터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뚝 서 함께한다면세상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그녀가 서원지기로 여생을 보내려는 이유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2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아름다운 준비 <서울 성모 병원 수간호사 박명희 님>
2018.10.10   조회수 : 2,073    댓글 : 3개
누구나 살면서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난다. 그를 통해 성숙해지고 어느덧인생길까지도 달라진다.서울 성모 병원 호스피스 완화 의료 센터 수간호사 박명희 님(48세)도 그랬다. 그녀는 신입 시절, 암 병동에 배치받아 일했다.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의사를 도와 치료할 수 있어 행복했다.간호사라는 직업에 자긍심이 높아질 무렵, 병동의 60대 위암 환자가 숨을거두었다. 그는 그녀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초보 간호사가 저지른 실수에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너그러이 보아 넘겼고, 일이 손에 익지 않아 자책하면“내 보기에 박 간호사는 아주 잘하고 있어.” 하고 격려했다. 그토록 고마운 이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해 줄 게 없었다. 무력하게 그를 떠나보낸 후 그녀는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다른 환자의 임종 역시 볼 자신이 없어피하고만 싶었다.그때 상담 수녀가 호스피스 병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환자가 품위 있게생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라고 했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곳에서 환자들의 마지막을 함께하자.’라고 생각하며 근무를 자원했다. 당시는 병원에 호스피스 병동이 있음에도 환자들은 물론이고 의사나 간호사조차 어떤 곳인지잘 몰랐다. 그녀 역시 첫 출근을 앞두고 막막했다.립스틱을 바르고 가도 되나, 분위기가 심각할 테니 웃으면 안 되겠지 등 별별 생각을 다 했어요.한데 예상과 달리 병동 분위기는 밝았다. 한 병실에선 기타 반주에 맞춰 트로트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이 다 함께 까르르 웃었다.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들 역시 그녀처럼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생각이 든 것이다. 모범 답안 같은 얘기로 마지막을 잘 준비할 수 있게 이끌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부끄러웠다.‘내 역할은 그분들이 행복하게 사는 걸 돕는 거구나.’ 싶었어요. 마지막 여정이 편안하도록 동행하는 것임을 알았죠.그로부터 18년간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돕고 지친 가족을 보듬어 주며 종내 다가오는 마지막을배웅한다.아직도 ‘호스피스 병동은 죽으러 가는 곳이다, 아무 치료도 하지 않는다.’라고 오해해요. 물론 질병 자체에 대한 치료를 안 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여러방법으로 통증을 덜어 주어 환자가 식사도 하고 몸에 활력도 생기게 합니다.그래서 예상보다 오래 사는 분이 많아요.무수히 많은 임종을 보아 온 그녀에게 어떻게 해야 생의 마지막을 잘 준비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답했다.마지막을 인정하고, 떠나기 전에 지난삶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거죠. 쉬운 일은아니에요.그녀 역시 세상을 떠나는 건 두렵다.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생각하다 보니 대신 잘 사는 법을 고민하게 됐다.서울 성모 병원에서는 ‘소원 성취 프로그램’을 마련해 사회 복지사와 자원봉사자가임종 전 환자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녀는환자들이 외식, 가족 여행 등 일상에서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을 택한다고 했다.군대에 있는 아들 면회를 간 엄마도, 아버지 산소에 가고 싶어 한 60대 남자분도계세요. 사제를 지망하던 신학생은 성지 순례를 원해서 의료진과 다녀오기도 했죠.그때 알았다. 하고 싶은 일은 미루지 않고 ‘지금’ 해야한다는걸. 누군가에게 해 주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환자가 원하는 게 있으면무조건 그날 다 해 드리려고해요. 내일, 아니 몇 시간도기약할 수 없거든요. 나에게, 남에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잘 사는 법 아닐까요.사랑하는 이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본 가족들은 말한다.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건 운 나쁜 누군가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는 일이라고.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특별한 건 없다. 그저 주변 사람을 소중히 대하는 것.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살다 보면 내 생의 마지막도, 가족과의 이별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이 일을 하며 살 수 있어서 제가 오히려 고마워요. 많은 환자가 부족한 저를거쳐 갔어요. 그 덕에 저는 값진 경험의 양식을 쌓았죠. 앞으로도 그럴 테고요.그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은 이 경험으로 다른 환자를 더 잘 돌봐 드리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번 생에는 호스피스 간호사로만 살려고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수학에 삶이 있다 <고양외고 수석 교사 박성은 님>
2018.09.07   조회수 : 2,813    댓글 : 3개
십오 년 전 어느 날, 한 학생이 물었다.선생님, 수학은 배워서 어디다 써먹어요?아이들에게서 자주 받는 질문이라 습관처럼 답하곤 했다. “대학 가지.”“창의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 하지만 그날따라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 그러려고 수학을 배우나?’ 결국 수업이 있다는 핑계로 나중에 다시 오라며 돌려보냈다. 학생의 얼굴엔 실망감이 스쳤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이 질문에 답을 찾자, 그러지 못하면 교편을 놓자고 생각했지요.‘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를 일으키고 많은 학생이 기다린다는 고양외고 수석 교사 박성은 님(54세)의 수업은 이렇게 시작됐다.이전까지 그는 수학 성적을 잘 받게 하는 교사였다. 초임 교사일 적엔 유명입시 학원 수업을 수강하며 강사들의 비법을 배웠다. 우스운 말투와 과장된몸짓으로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하나 이내 알았다. 학생들을 잠깐 집중시키는 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을.그는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길 바랐다. 수준별로 학습지를 만들었다. 복사기도 없는 시절이라 쉬는 시간마다 등사기를 밀어 제작했단다. 난이도에 따라자신 있는 문제를 풀게 한 뒤 조별 토론을 시켰다. “요즘 말로 하면 ‘자기 주도학습’이에요. 그 효과를 예전부터 깨달은 셈이죠.” 그렇게 여러 방법을 동원해수학을 가르쳤으나 결국 목표는 대학 입학이었다.성적을 잘 받게 해 대학만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돌아보니 젊은 시절겪은 일 때문이었지요.막 교단에 섰을 무렵, 그는 학생들이 좋아하는 수업을 하고 싶었다. 당시는학력고사 시대. 학생들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기출문제만 풀었다. 문제도제대로 읽지 않고 기계적으로 답을 구하는 걸 보며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사회 이슈를 수학 문제와 연결시키기도 하고 시를 낭독하며 개념을 설명하기도 했다. 지친 고 3 학생들은 그의 수업을 반겼다.일 년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가 담당한 반 학생들 성적이 다른 교사가 가르친 반보다 낮은 것.일 년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두고두고 생각했어요. 무엇이 문제였을까. 애들이 열심히 했는데 성적이 낮은 이유는 뭘까.선배교사에게 상담하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지나가다 잠깐 봤는데 수업 시간에 딴얘기가 많더라. 대학 갈 수업을 해야지.그때부터 줄곧 점수를 위한 수업을 했다.하지만 학생의 질문에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수학’을 가르쳤으나 ‘수학 교육’은 하지 못했음을. 입시 위주의 교과 내용 전달자에만 머무른 것이다. ‘그렇다면 수학 교사로서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는 고민에 빠졌다.그날 이후 그는 십육 년째 인문학을 접목한 수학 수업을 연구한다. 수학 개념에 문학, 사회 문제, 영화 등 다양한 소재를 입혀가르치는 것. 초임 교사 시절의 수업과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때는 재미있게 가르치는 데 초점을 두었다면, 지금은 그 교수법으로 수학에 흥미를 불러일으킨 다음 수학적 개념과 원리를 통해 ‘삶의 이야기’를서로 나눈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스스로‘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데까지이끌어 준다.‘부등식’에서 남과 비교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게 하고, ‘사칙 연산’을 통해 약속과 규칙의 중요성을 되새겨 준다. 수학을 삶과 연결시키는 것이다.학생들의 변화는 놀라웠다.수업 중에 엎드려 있는 학생들이 사라지고 수학 시간을 기다리기까지 한단다. 그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학생들이 수학을 두고 ‘해도해도 모르겠어요.’ ‘늘 처음처럼낯설어요.’ 하는 건 수학이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왜 배우는지 모를 수밖에요. 그런 학생들에게 ‘수학은 인간의 삶을 해석하는학문이다.’라고 알려 주면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0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다 <미술사학자 이내옥 님>
2018.08.08   조회수 : 1,867    댓글 : 0개
모든 존재에는 아름다움이 들었죠.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국립 박물관에서 34년간 큐레이터로 일한 미술사학자 이내옥 님(63세). 그는 박물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를 고민했단다. 관람객이 몰려오고, 선배들도 “참 잘생겼구먼.” 하고 감탄하는 유물이 그의 눈에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그 유물이 얼마나 가치 있고 빼어난 미를 지녔는지 책에서 배워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으로 느끼질 못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이런 미적 안목이나 감수성은 어릴 적부터 보고 느끼고 맛보며 자연스럽게 체득하기 마련이다. 하나그러기 어려웠다. 문화의 싹을 키우기엔 먹고살기가 고달팠다. 그만이 아니라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박물관에서 유물을 살피고, 번호를 매기고, 사진 찍어 대장을 작성하기를수없이 반복했다. 하루는 어느 도자기를 보다 문득 알았다. 진품과 가품의 차이를.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많이 보고, 계속 공부하면 눈이 열린다는걸.그러고도 꽤 오랜 시간 유물을 보고 절절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공부가 진척되고 견문을 쌓은 뒤에야 남의 지식이 아니라 내 관점으로 하나하나 보게됐다. 이른바 안목이 생긴 것. 여기엔 유물만이 아닌 모든 사물의 아름다움을보는 것까지 포함되었다.박물관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 덕분이지요.부여 박물관 백제 도록을 만들 때 만난사진 작가 준초이 선생. 최고의 상업 작가인 그는 어떤 것도 좋아 보이게 찍었다. 그러니 백제 유물이 지닌 아름다움은 오죽잘 전달해 주랴 싶어 사진을 부탁했다. 그역시 자신만만했다.하지만 준초이 선생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 사유상을 찍으며 별 감흥을 느끼지못했다고 고백했다. 하루 내내 촬영했으나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찍겠다는 것. 어렵게 허가를 얻어 재촬영 일정을 잡았다.촬영 날, 그는 3톤짜리 대형 받침대를 제작해 가져왔다. 그 위에 불상을 올려놓고천천히 돌려 가며 보고 또 보았다. 어느 순간 반가 사유상의 콧날부터 이마까지 이어지는 날렵한 선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그런 후에야 겨우 만족할 만한 작품을 얻었다. 만약 준초이 선생이 금동 반가 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한 채 사진을 찍었다면 좋은 작품이 탄생했을까.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인 그가 힘을 빼고 겸허하게 다가가 마침내 그만의 방식대로 유물사진을 찍은 것이다.얼마 전 작고한 최영도 선생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변호사로 일하며 평생 토기를수집했다. 토기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암 수술 후 입원 중에도 좋은 물건이 있다는 말에 병실을 빠져나가 지방까지 달려가 사 왔단다. 그런 선생이 수집한 토기 1,700여 점을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했다. 변호사답게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토기를 어떻게 다루고 보관할지도 썼다.그는 최 선생을 포함해 많은 수집가를 만났다. 그들은 처음엔 한 점, 두 점모으는 데 재미를 붙이다 점점 수집품의 장래를 고민한다. 그러다 결국 그 물건들을 공공 박물관에 기증한다. 자신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그 아름다움을 살리지 못할 바에는 대접받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소유가 아닌존재로 두는 것. 그는 수집가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요즘은 젊은이들에게 배웁니다. 음식의 맛을 찾는 것도 하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겁니다. ‘미니멀리즘(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방식)’에서부터 ‘소확행(작고 확실한 행복)’까지, 우리 시대와 달리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삶의 방식에 격려를 보냅니다. 또한 책을 많이 읽고, 여행을 자주 하면서 이류나 삼류가 아닌 최고의 것을 보면 안목이 열릴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쪽으로 나아가고 있고, 또 그렇게 되리라 낙관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삶은 훨씬 풍성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9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최선을 다하면 기회는 온다 <쇼트 트랙 선수 김아랑 님>
2018.07.09   조회수 : 3,392    댓글 : 3개
여름날에도 빙상 경기장은 몸이 움츠러들 만큼 공기가 찼다. 김아랑 선수(22세)는 익숙한 듯 얇은 패딩 점퍼 차림에 야무지게 윗옷까지 챙겨 왔다. 힐끗보더니 대뜸 옷을 건넨다. “추우시죠? 이거 걸치실래요?” 지상 훈련 중인 후배를 보자 살뜰히 안부를 묻고, “우아! 국가 대표 처음 봐요.” 하고 신기한 듯 쳐다보는 어린이에겐 손을 흔들어 준다.문득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쇼트 트랙 1,500미터 결승전이 떠올랐다. 간발의 차로 메달 획득이 무산된 김아랑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눈물을 쏟는 최민정 선수에게 다가가 다독였다. 활짝 웃는 그 장면은 사람들 뇌리에 오래 남았다.“정말 축하해 주고 싶었어요. 대견하잖아요.”그 일에 대해 묻자 그녀가 답했다. 그러곤 덧붙였다.“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후회 없는 경기여서 저 자신도칭찬해 줬어요.”후련한 마음에서 우러난 미소였다.그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친오빠와 스케이트를 시작했다.제가 스케이트를 신고도 잘 서 있어서 코치님이 한번 시켜 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대요.스케이트는 흥미로웠다. “특히 쇼트 트랙은 1등으로 앞서다가도 넘어질 수있고, 마지막까지 누가 이길지 모르는 재미가 있어요.” 또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기회가 온다는 것도.하지만 어린 시절 탄탄대로만 달린 건 아니다. 아들딸을 운동시킬 만큼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고향 전주에는 빙상 경기장이 단 한 곳뿐이라훈련 장소도 부족했다. 팀을 옮겨 서울에 올라왔으나 또래 유망주들에게 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연습에 매진했다. 굳은 심지를 다질수 있었던 건 부모님 덕분이다.단 한 번도 성적 때문에 혼난 적이 없어요. 시합 다녀오면 결과도 묻지 않고 ‘우리딸 수고했어.’ 하셨죠.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중 3 때 시합을 망친 후 펑펑 우는데어머니가 말했다.넌 잘할 수 있는 아이야.이 시합이 전부가 아니잖아. 잊어버리고 다음에 잘하면 되지.그때 알았다. 성적이 나빠도, 국가 대표가 되지 못해도 부모님은실망하지 않는 것을. 또 언제나 ‘다음’이 있다는걸. 이 일은 그녀가 위기를 겪을 적마다 스스로를 다잡고 일어서는 힘이 됐다.그녀는 소치 동계 올림픽과 평창 동계 올림픽에 연이어 출전해 각각 금메달을 목에걸었다. 결과만 보면 선수 생활이 승승장구한 듯 보이지만 부침이 많았다. 국가 대표에 선발돼 열아홉 살에 소치 올림픽에 나갔으나, 경기 당일 급성 위염으로 주 종목인1,500미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그 후 2016/17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탈락하기도 하고, 스케이트 날에 얼굴을 베이는 사고도 겪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생각했다. ‘다음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자.’ ‘열심히 해서 다음 시즌에는 국가 대표가 되자.’‘다리나 허리를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이런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소치 올림픽에서 계주 금메달을땄고, 2017/18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종합 2위를 기록해 평창 올림픽에 나갔으며, 얼굴 흉터 역시 점점 옅어졌다.다만 2016/17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탈락했을 땐 꽤나 마음고생했단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쟤는 끝났어. 다시 국가대표 되기 힘들겠지.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하나 상황을 탓하기보다 인정하자고 마음먹었다.“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더 열심히 하면 돼.” 어머니도같은 말을 해 주었다. “괜찮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지.”혹시 불안한 적은 없었어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불안감은 준비가부족할 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 온다고 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으려 철저하게 준비했단다. 평창올림픽을 겨냥해 2년 훈련 계획을 세웠다.‘국가 대표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아예 배제했다. 초반에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훈련을 거듭하자 부담감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어느순간 스케이팅이 더 즐거워졌다.4년간 준비한 올림픽을 마친 지금 좀 편안해졌느냐고 물었다. 다부진 대답이 돌아왔다.제가 운동선수이긴 한가 봐요. 계속 운동을 해야 하니까 마음놓고 쉬지 못하겠어요. 아직은 더 해야 할 때구나 싶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8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마음을 담아야 맛이 난다 <동무밥상 대표 윤종철 님>
2018.06.07   조회수 : 3,794    댓글 : 4개
돈 욕심 부리면 망한다는 걸 남한 와서 배웠지요.함경북도 온성 출신인 윤종철 님(63세)은 1998년 두만강을 건너, 2000년에 남한으로 왔다.딸을 위해 돈을 벌고자 간 중국에서 남한 모습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그가본 한국은 자유롭게 일하고, 개인이 잘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다단계에 빠지기도 하고 이자를 많이 준다고 해서 투자했다가 정착금을 홀랑 날리기도 했어요. 돌아보면 전부 내 탓이에요. 쉽게 큰돈을 벌고 싶어 사기꾼들 말에 혹한 거죠. 욕심 부린 나를 반성했어요. 내가 잘하는 걸 열심히 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사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기술이 있었다. 바로 요리였다.열여덟 살에 군 입대 하니 나를 훈련소가 아닌 옥류관으로 데려가지 뭡니까.그전까지 부엌엔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한데 하루아침에 평양 최고의 식당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의 훈련은 요리였다. 옥류관에서 넉 달간 보조로 일하며 부지런히 익혔다. 그런 다음 다른 훈련병 세 명과 시험을 치렀다.기왕 칼을 잡았으니 최고로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밤잠 설쳐 가며 ‘요리 공부’를 한 끝에 일 등을 차지해 군 장성 식당에 배치됐다. 고위급 장성 열여섯 명을 위한 곳이었다. 각기 다른 지역 출신이라 입맛도,좋아하는 음식도 제각각. 맛없으면 호통치고, 먹고 싶은 음식 조리법을 알려주며 만들라고 했다. 그곳에서 십 년간 요리하며 군 복무를 마쳤다. 하지만 요리사로 살기는 싫었단다. “북한에선 요리사가 괄시받는 직업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유명 요리사였는데 평생 대접을 못 받으셨죠.” 그래서 회령 경공업 단과대학에서 발효를 배워 졸업 후 공장에서 된장, 간장 등을 만들었다.군에서 갈고닦은 요리 실력은 한국에서 뒤늦게 빛을 발했다. 북한 여러 지역의 음식을 꿰뚫는 덕분에 이호경 대표의 요리 교실 ‘호야쿡스’에서 북한 음식을가르치고 또 음식점을 차릴 발판도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 가게를 열 때만 해도 이런 후미진 골목까지 누가 찾아올까 싶었다. 그런데 입소문이 나며 사람들이 가게앞에 줄 서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자신의 기술로 정성을 다하면 통한다는걸.그는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 가게를닫는 월요일에도 아내와 김치를 담근다. 김치를 통에 담는 것까지 직접 해야 ‘딱 소리나는 맛(북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하는말)’이 난단다.영업을 일찍 마치는 일요일에는 순대를만든다. 그가 자랑하는 함경도 식 순대.돼지고기를 다져 갖은 채소와 찹쌀을 넣어 속을 만듭니다. 그걸 돼지 창자에 채워 넣죠.말로 하면 쉬운데 막상 만들면 무척 힘듭니다. 그래도 제대로 만든 북한 음식을 보여주고 싶어 계속합니다.그는 정통 북한 음식을 고집하지만 한국사람들 입맛을 고려해 요리법을 조금씩 바꾸고 메뉴도 과감히 변경한다. 그가 제일좋아하는 음식인 옥수수 국수를 손님들이즐기지 않자 메뉴판에서 지우고, 얼마 전오리탕도 돼지국밥으로 바꾸었다.평양냉면은 옥류관에서 배운 대로 만들되 여기에 맞게 변형했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먹을 때 가위로 자르지 않는다. 그래서면을 반죽할 때 목 넘김에 좋으라고 식소다를 섞는다. 하나 건강을 생각하는 남한 사람들은 화학조미료를 꺼려 뺀단다. 국물도 북한에서는 꿩고기를주로 썼지만 여기서는 구하기 쉬운닭과 꿩을 섞어 쓴다. 또 동치미 국물을 넣어 쨍한 맛을 내고, 간장으로간한다.집에서도 다 내가 해요. 가게에서든 집에서든 계속해야지, 안 그러면 요리가 늘지 않아요.그래서 외식도 꺼린다. 북한 음식은 원재료를 살려 살짝 싱거운 데 반해 남한 음식은 양념을 진하게 한단다. 북한 음식의 맛을 잊을까 겁이 난다고 했다.술집에 가서도 안주로 과자 몇 개만 집어 먹을 뿐 다른 건 일체 맛보지 않는다.우리 어머니가 해 준 옥수수 국수, 그 맛이 아직도 기억나요.그의 고향에서는 옥수수 농사를 지어 먹고살았다. 어머니가 해 준 옥수수국수는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우거짓국에 옥수수 면을 넣어 끓인 것이었다. 여덟 자식 입에 먹을 걸 넣어 주느라 부엌을 떠나지 못한 어머니. 비록 어머니에게서 요리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걸 깨우쳤다. 음식에 마음을담아야 맛이 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부엌에 선다. 그의손을 거친 음식이라야 손님상에 나간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7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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