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 <청소 직업 전문 학원 원장 정재현 님>
2017.11.07   조회수 : 4,016    댓글 : 1개

청소를 누가 돈 주고 해?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해야지.

어떤 이에게 청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막상 하자니 귀찮은 일로 다가온다. 하지만 청소 직업 전문 학원 정재현 원장(52세)은 주위를 깨끗이 정리해야만 정신 역시 맑아진다고 믿는다. 청소는 사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카피라이터, 옥외 광고 전문가, 농부, 여행사 대표 등 그동안 거친 이력은 화려하지만 지금의 일에 가장 만족한다고 말한다. 

 

카피라이터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한번은 전자수첩 홍보를 맡았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꽤 많은 돈을 벌자 자신감이 생겨 옥외 광고 분야까지 진출했죠.

그런데 갑자기 아이엠에프의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잘될 줄 알았던 일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늘 위기에 가로막혔다. 

 

3개월 동안 집에 틀어박혀 망연자실했죠. 이제 남은 건 몸뚱이뿐이구나 하면서요. 그러다 예전에 일본으로 어학연수 갔을 때가 떠올랐죠. 거기서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청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었어요. 청소부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대단했죠. 내겐 아직 건강한 몸이 있으니 그 분야에 도전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저기……. 청소를 배우고 싶습니다.” 청소 업체에 연락하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을 받지 않아도 좋으니 시켜만 달라고 매달리길 수차례, 고맙게도 한 청소 대행업체 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지저분한 곳을 쓸고 문지르는 게 전부였지만 청소에 매력을 느끼기 충분한 기회였다. 무엇보다 일의 순서를 익힐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사업 실패 후 배운 게 있어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만 신경 쓰면 절대 잘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마 어린 나이였다면 청소를 초라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몸을 쓰는 일만의 특별함을 깨달았어요. 땀 흘릴수록 정신이 맑아진다는 거죠. 공간이 말끔해진 만큼 머릿속 잡념이 싹 사라졌어요. ‘아, 누구나 깨끗한 공간에서 살 필요가 있구나!’ 이 분야에서 점점 비전을 찾았죠.

그는 본격적으로 청소 대행업체를 차렸다. 일이 들어오면 도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아내와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부끄러워 고개 숙인 적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제법 단골도 생겼다. 어느집은 너무 지저분해 처음엔 치우는 데만 여덟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기간을 두고 몇번씩 방문하자 시간이 짧아졌다.고객은 몰라보게 달라진 표정으로 자랑했다. “이제야 깨끗한 곳에서 지내는 기쁨을 알겠어요. 날마다 조금씩 치우다 보니성격도 밝아졌고요. 고맙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성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2013년, 청소 전문 학원을 열었다. 주위에선 누가 청소를 돈 주고 배우느냐며 타박했지만 ‘나처럼 알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 역시 청소를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묻고 또 물었다. 어떤 세제를 써야할지 몰라 공부하고, 제조사에 연락하다 밤을 샌 적도 있었다.


타일만 해도 목재, 도기, 유리 등 종류가 여러 가지예요. 어떤 도구에 무슨 세제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죠. 또 원인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주된 고민 중 하나가 부엌 정리거든요. 부엌에서 제일 중요한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마루와 싱크대 사이 공간이에요. 먹을 게 있고 어두운 곳이라 바퀴벌레가 생기기 쉽거든요. 먼지를 닦고 환기를 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해충을 막을 수 있죠. 이렇듯 파고들수록 공부할 것이 많다 보니 수강생들이 입을 쩍 벌린다니까요. 무엇보다 청소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깨닫는 과정이 보람있어요.

스물셋의 청년부터 일흔넷의 어르신까지, 나이와 사연은 천차만별이지만 누구 하나 청소를 쉽게 여기지 않는다. 단순 기술뿐 아니라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운 그들은 자신을 ‘삶을 변화시키는 전문가’라 말한다.

 

청소를 통해 배운 게 많기에 갈수록 자부심이 커져요. 예를 들어 정리를 위해선 버릴 걸 정해야 하죠. 고객을 만나 보면 냉장고엔 작년 추석 음식, 옷장엔 3년 전 입었던 옷이 수두룩해요. 그때마다 질문하죠. ‘이게 꼭 필요합니까?’ 그럼 대부분 고개를 저어요. 당사자로선 큰 결심이죠. 버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얻기 위해선 먼저 버려야 한다는 걸 직접 경험해 보니 제 인생도 단순하고 명확해졌어요.

 

인터뷰 전문은 좋은생각」 12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댓글 (1)

신정호
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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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서점에 가면 
무서울 정도로 AI(인공지능)의 발전을 경고하는 책이 넘치는데,
적어도 기계가 대신 못하는 영역의 일을 
사람의 힘으로 프로정신을 갖고 덤비다면
앞으로도 직업에 희망을 갖고 계속 도전할 수 있겠네요.

버리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 공감합니다.
저도 먼저 버리고 제 인생을 단순, 명확하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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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의 기쁨
사랑으로 지켜봐 주세요 <정신 건강 의학과 교수 조선미 님>
2018.04.06   조회수 : 1,715    댓글 : 0개
“인터뷰 약속 때문에 따님과 통화할 때 마무리 인사만 5분 넘게 했어요.”​이 말에 아주대 정신 건강 의학과 조선미 교수(56세)가 활짝 웃었다. 그야말로 ‘엄마 미소’였다.​큰아이는 참 다정해요. 아침저녁으로 만날 때마다 ‘엄마, 보고 싶었어.’ 그래요. 저는 열흘 넘게 학회에 다녀와도 ‘엄마 다녀왔어.’ 하고 마는데.지금은 ‘이 아이는 다정한 기질을 지녔구나.’ 하고 받아들였지만 예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단다. 그래서 화내고 소리치는 일을 반복했다. 아이를 보살피며 어려움을 겪는 부모에게 ‘속 시원한’ 조언을 들려주는 그녀 역시 한때는 초보 엄마였다.​처음엔 이론적으로 설명했어요. ‘부모와의 애착은 아이가 평생 맺는 대인 관계의 기본 틀이 된다’처럼요. 그런데 교육 후에 받는 질문이 늘 비슷하더라고요. ‘애가 조르는데 휴대 전화는 언제 사 줄까요?’ ‘학교 다녀와서 숙제부터하고 놀면 되는데 왜 안 할까요?’ 그러다 보니 제 경험담을 말할 때 공감대 형성이 훨씬 잘되는 걸 알았죠. 거창한 이론보다 현실적인 대처법을 알려 주는게 효과적이더라고요.그녀는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몇 년이 가장 힘들었단다. 정신 바짝 차리고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다그치듯 물었다. “숙제는? 준비물은? 일기는 썼어?” 아이가 아니라, 그 애가 해야 할 일만 보였다.몇 년이 흘러 학교생활에 익숙해지자 다른 엄마 노릇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잘해야 명문대를 간다.” “중학교성적이 수능 점수다.” 주변의 말이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모든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바랄 거예요. 그런데 명문대를 가서 대기업에 취직하면 정말 행복할까요? 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죠.대신 아이들을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우고자 했다. 어려운 일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힘들 때 울지 않는 게 아니라, 적당히 울다 스스로 그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이가 처음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면 주저앉아 운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툭 털고 일어나 다시 페달을 밟는다. 이렇듯 아이가 실패와 좌절을 맛본 뒤 다시 기운을 차리는 ‘맷집’을 늘려야 영혼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의대생들 가운데 고된 의대 생활을 마치고도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에서 그만두는 경우가 늘었다고 했다. 환자나 보호자, 병원 사람들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이다.물론 적성에 맞지 않거나 정말 힘들면 그만두는 게 맞아요.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나 조직에서 갈등이 생겨 고통스럽다고 무조건 피하는 건 문제가 됩니다. 그런 일은 다른 곳에서도 벌어질 수 있거든요. 결국은 세상에서 도망치게 돼요.물론 그녀도 안다. 자식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자신도 두 아이를 키운 엄마이기에. 하나 그게 사랑이 아니라 불안 때문임을 알았단다. 넘어진 아이는 기다려 주면 스스로 일어나는데, 그걸 알면서도 부모가 일으켜 주는 건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느끼는 마음의 고통 때문이다.​대개 아이가 실패하는 게 싫어 엄마가 해 주거나,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아빠가 대신 결정을 내려 준다고 해요. 그거 아세요? 부모가 적극적으로 키운 아이가 도리어 소극적으로 자라요. 자기 의지가 안 생기거든요. 이미 할 게 결정돼 있으니 호기심도 일어나지 않죠. 아이가 생각할 기회가 없는 거예요. 부모 뜻대로 하면 되니까.이렇게 해서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아 오면 부모는 뿌듯해한다. 하지만 아이는 그 성적을 전적으로 자신의 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 판단은 믿을 만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르는 게 낫다고 여긴다. 그러다 보면 삶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스스로 내린 결정을 미숙하다고 생각하며 중요한 순간엔 우유부단해진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하며 차라리 누군가 정해 주길 바란다.그녀는 당부했다. 부모의 마음속‘불안’을 들키지 않으면서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주면 좋겠다고, 부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갈지라도 말이다. 새로운 시도를 격려하고, 실패한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 주면 한 뼘씩 자랄 거라고.*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5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나무처럼 살 수 있다면 <나무 의사 강전유 님>
2018.03.08   조회수 : 2,322    댓글 : 6개
오는 6월 28일부터 ‘나무 의사’와 ‘수목 치료 기술자’ 국가 자격이 신설된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나무 종합 병원 강전유 원장(81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주름 잡힌 얼굴엔 웃음이 흘렀다.​정말 기쁩니다. 그동안에는 아무나 나무에 약을 뿌리고 수술했는데 이젠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할 수 있게 됐어요. 나무뿐 아니라 사람 역시 살리는 일이에요. 나무가 병들었다고 독한 약을 막 뿌리면 나무도 상하지만 사람도 다칠 수 있거든요.1976년 4월, 그는 국내 최초로 ‘나무 종합 병원’을 열었다. 나이 마흔한 살에 십사 년간 다닌 산림청 임업 연구직을 그만두면서까지 선택한 결정. 동료들은 “누가 나무 치료한다고 의사까지 부르겠느냐. 그러다 굶어 죽기 딱 좋다.”라며 만류했다. 하나 그는 확고했다. 그간 임업 연구원에서 나무의 병충해를 연구해 온 터다. 나무가 왜 병드는지, 해로운 벌레는 무엇인지, 아픈 나무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연구실에서 병든 나뭇가지와 해충과 씨름하며 살았다. 하지만 기껏 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법을 알아내도 직접 찾아가 고쳐 줄 수 없었다. 공무원 신분이라 국가 기관이나 공공 기관의 요청이 아니면 갈 수 없기 때문. 그저 간혹 오는 전화 문의에 성심성의껏 답해 줄 밖에.당시엔 시들시들한 나무는 베어 땔감으로 쓰면 그만이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나무를 치료하는 민간 전문가가 있을 리 만무했다.‘누군가는 나무를 치료해야 해. 내가 해 보면 어떨까? 원인만 분석하는 게 아니라 나무 한 그루라도 찾아가 살리는 거야.’ 이 생각이 그를 나무 의사의 길로 이끌었다. “혹시 잘 안되면 어쩌나 걱정하진 않으셨어요?” 조심스레 던진 질문에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퇴직금이 오십삼만 원 나왔는데 딱 그 돈 들여서 나무 종합 병원을 차렸어요.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지금 망해도 아쉬울 거 없다’고요.나무가 점점 많아지니 나무 의사가 꼭 필요할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러나이 일로 큰돈을 벌거나 성공하리란 기대는 없었다. 그저 나무처럼 살면 된다고 여겼다.​나무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삽니다. 키가 큰 나무, 작은 나무, 뾰족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뭉툭한 나무도 있죠. 사람도 나무처럼 저마다 자기 생긴 대로 살면 되는 거 아닐까요. 모두 부자거나 명망 있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세끼 밥 먹고 누워 잘 데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처음엔 찾는 이가 아예 없었다. 개원 후 일 년간 수입이 없자 세무서에서 찾아와 이럴 바에는 폐업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까지 했다.그날 이후 그는 손수레에 나무 치료 약을 싣고 거리로 나갔다. 정원수가 많은 동네를 다니며 담 너머 아픈 나무가 보이면 초인종을 눌렀다. 집주인은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자기 집 나무를 치료하겠다고 하니 벌컥 화내기 일쑤였다.​“귀댁의 나무는 건강합니까?”라는 전단을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반응은 신통치않았다. 사람들은 대학 나와 공무원 하던 사람이 나무에 약이나 뿌리고 다닌다며 혀를 끌끌 찼다.하지만 그 일이 하찮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름시름 앓는 나무를 보면 안쓰러웠고 그의 손길로 생생하게 살아나면 기쁘기만 했다.1978년 여름, 문화재청에서 의뢰가 왔다. 천연기념물 115호로 지정된 중국 쥐엄나무를 치료해 달라는 것이다. 가 보니 원줄기는 부러져 없어졌고 지면에서 올라온 가지 두개만 살았을 뿐. 뿌리까지 썩은 터라 자칫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전전긍긍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비가 몰아치는 밤, 그는 나무가 쓰러질까 옆에 앉아 함께 지새웠다. 다행히 나무는 무사히 버텨 주었고 수술도 잘 마쳐 지금껏 건강하게 자란다.​나무가 나보다 오래 살길 바랍니다. 그럴 거예요.이후 나무 수술의 효과를 본 문화재청에서 의뢰가 오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날까지 나무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으면 왕진 가방을 들고 어디든 간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4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아침밥 먹는 아이들 <전문 상담 교사 손혜진 님>
2018.02.08   조회수 : 4,044    댓글 : 25개
아침밥을 먹으려고 한 시간 일찍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 있다고?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백여 명이란다. “음식 솜씨가 남달리 뛰어나신가요?” 사뭇 진지하게 묻자 손혜진 전문 상담 교사(37세)가 까르르 웃는다. 안 그래도 내내 결석하던 아이가 아침밥 때문에 학교에 오니까 어느 학부모에게 ‘선생님 밥에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나요?’ 하는 말까지 들었다니까요.​지난해 서울 휘경 공업 고등학교 입학식 날 신입생 40명이 참석하지 않았다.물론 이후로도 결석했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들을 일일이 찾아가 면담하기로 했다. 그녀 역시 몇 명을 맡아 집으로 찾아갔다.그때 처음 우진이(가명)를 만났다. 비쩍 마른 아이가 추운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은 지방에 일하러 가고 누나 역시 아르바이트로 바빠 혼자 지낸단다. 아이는 방바닥을 응시한 채 묻는 말에 대답만 했다.얼른 끝내고 다시 게임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근데 너 잘생겼다. 그런 말 많이 듣지.아닌데.진짜야. 선생님이 뭐하러 거짓말해. 너 보자마자 근사하다고 생각했어.순간 아이가 그녀와 눈을 맞추며 씩 웃었다. 게임은 곧잘 한다며 그 속에선 인기도 꽤 많다고 자랑했다. 눈에 반짝 불이 들어온 것도 잠시 이내 푸시시 꺼졌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을 걸어 내려오며 그녀는 입술만 깨물었다. 해 줄 수있는 게 없어 맥 빠진 채 삼 일을 보냈다. 하지만 우진이가 자꾸 떠올랐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는 못 살 것 같았다. 매일 저녁 아이에게 문자 메시지를보냈다. 밤새 게임하고 일어나 활동할 시간에 맞춘 거다. “우진아, 밥 먹었니?” “오늘 너무 춥지 않니?” 답장은 안 해도 꼬박꼬박 확인은 하는 눈치였다. “선생님은 학교 상담실에서 아침밥을 혼자 먹는데 외롭네. 우진이가 같이 먹어 주면 좋을 텐데.” 이 말에 처음으로 답이 왔다. “거기 잼 있어요?” “그럼, 있고 말고.” 다음 날 아침 우진이가 상담실에 나타났다. 그녀는 지금도 그 벅찬 순간을 잊을 수 없다.교복을 입은 아이가 들어서는데 번쩍번쩍 빛이 났어요.​그날 이후 우진이는 매일 학교에 왔다. 토스트에 잼을 발라 주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상담실은 언제든 열려 있으니 아무 때건 와. 친구들 데려와도 좋고.학교에 나를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는 건 처음이에요.선생님, 사실은 음식 냄새 나는 집이 늘 부러웠어요.하나둘 아침을 먹으러 오는 아이들이 늘었다. 처음 물꼬를 튼 우진이가 게임 중에 아침 같이 먹자며 오라고 했단다.기왕 아침 일찍 학교에 왔는데 밥만 먹고 가진 않잖아요.​아이들이 속속 수업에 복귀하자 이번엔 담임 선생님들이 상담실을 찾았다. 아침 준비를 돕는다는 핑계로 와서 밥 먹는 아이 앞에 앉았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아이들도 점점 말수가 늘었다. 교내에는 상담실에서 아침밥 먹는 바람이 일었다. 아이들 수가 늘자 선생님들이 자발적으로 거들어 주었다. 교장 선생님은 학교에서 비용을 보태겠다며 말했다. 처음엔 혹시나 애들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려했는데 생각을 바꿨어요. 결석하던 애들이 학교에 오는 거니까 해 봅시다.​6월, 갑자기 방송사에서 취재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교육청에서도 우수 사례로 널리 알리자고 했다. 그녀는 아이들이 상처 받을까 걱정했다. 우리 애들 밥 먹는 거 찍지 마세요.그녀는 촬영 중에 목소리를 높이고 인상을 찌푸렸다. 주변 선생님들이 “손 선생 목소리가 이렇게 큰지 처음 알았네.”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한데 기우였다. 기사가 알려지자 아이들은 창피해하기는커녕 자랑스러워했다. ‘사랑으로 아침밥을 해 주는 선생님들이 있는 학교’에 다니는 것을. 기사에 누가 악성 댓글이라도 달면 재학생, 졸업생이 반박해 주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3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옥상 화가 김미경 님>
2018.01.08   조회수 : 5,873    댓글 : 9개
기자 출신 화가라니 어쩐지 생소했다. 인왕산 초입 카페에서 만난 김미경 화가(57세)는“전 세계적으로도 거의 없을 걸요.”하며 웃었다. ‘서촌 옥상 화가’로 알려진 그녀는 20년 넘게 언론인으로 일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지는 이제 5년 차, 스스로를 ‘초보 작가’라 칭한다. “원래 그림에 재능이 있었나 봐요?”하는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아니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리고 정말 열심히 했어요.그녀가 처음 그림을 그린 건 30여 년 전 한겨레 신문사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만평을 그리던 박재동 화백의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사내 미술반에 들어갔다. 자료실 한구석을 화실로 꾸며 일주일에 한 번씩 점심시간마다 모여 서로의 얼굴을 그렸다. 없는 시간을 쪼개 스케치 여행을 떠나고 전시회도 보러 갔다. 분초를 다투며 일하는 일간지 기자들이 여유롭게 그림을 그렸다니, 그녀는 지금 생각해도 놀랍단다. 미술반 모두는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린 게 전부였다. 그런 부원들의 그림을 박재동 화백은 무조건 칭찬했다. 자~알 그렸다.솔직한 감정이 그림에 나타난다.그녀는 칭찬에 고무돼 미술반 활동을 더 열심히 했는데, 그러다 그림의 매력에 푹 빠지고 말았다. 기사를 작성하는 게 머리와 몸을 쓰는 일이라면 그림을 그리는 건 마음과 손을 쓰는 일이라는 느낌이 든 거다. 신문을 만들며 하루를 바삐 지내다 보면 문득 마음을 쓸 수 있는 미술반 활동 날이 기다려졌다. ‘그림 그리고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 전화 한 통이면 붓을 두고 나가야 했고, 스케치 여행 중에 사건이라도 터지면 도로 출근해야 했다. 그런 그녀를 박재동 화백은 이렇게 위로했다. 난 전생에 수억 년 동안 수백만점의 그림을 그렸을 거야. 그게 쌓여 이번생에 화가로 태어난 것 같아. 어쩐지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녀는 한 달, 아니 일 년에 한 점이라도 그리면 1억 년 후에는 화가로 태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살았다. 2005년 기자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가 딸과 살면서도 늘 되뇌었다. 난 1억 년 후엔 전업 화가가 될 거야.2012년 4월, 그녀는 7년간 살던 뉴욕을 떠나 한국에 돌아왔다. 아름다운재단의 사무총장직 제안을 받아들인 거였다. 몸에 딱 맞는 일이라고 여겨 열심히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귀국한 지 고작 한 달 지났을 무렵, 이상하리만큼 간절히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어쩌면 그날부터였는지 모른다. 사무실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서촌 풍경이 눈 시리도록 아름다워 밤새 스마트폰으로 그렸던 날.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돌아와 만난 한국 풍경은 새삼스러웠다. 난생처음 본 것인 양 반했다. 병풍처럼 둘러싼 인왕산과 그 아래 펼쳐진 기와집들……. 자연과 역사와 사람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 그때부터 낮에는 일하고 밤과 주말에는 내내 그림만 그렸다. 한번은 밥도 안 먹고 그림만 그리다 쓰러져 자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몸져누웠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그림생각뿐이었다. 결국 직장을 그만뒀다.​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둬. 그냥 취미 생활로만 해.그림이 밥 먹여 주니?이제 곧 환갑이야. 어릴 때부터 미술 하던 애들도 힘들다는데 어쩌려고 그래.그녀도 다 아는 얘기였다. 27년간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며 꼬박꼬박 받았던 월급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불안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좋아하는 일을 못하면 살 수가 없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난하게 살지 뭐. 1억 년 후 말고 지금 하자.’ 그림을 그려 먹고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누가 네 그림을 사 준대?’ 비웃는 사람도 있겠으나, 실력을 갈고닦으면 언젠가 마음에 가닿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까 싶었다.​그림으로 큰돈을 벌거나 세상에 걸작을 남겨야겠다는 마음은 없어요. 이제라도 하고 싶은 걸 찾았으니 그걸 하며 행복하게 지내고 싶은 거예요.초반에는 생활비를 마련하려고 집 근처 빵집에서 아르바이트했다. 그녀가 일했던 직장 근처라 가끔 동료들도 마주쳤다. “괜찮으셨어요?”라고 묻자“그게 어때서요? 그렇게 일해 그림 그릴 종이도 펜도 살 수 있는데요.”하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5년, 그녀는 회사에 다니는 것처럼 하루 7시간씩 꼬박꼬박 그림을 그렸다. 옥상으로 혹은 길거리로 출근하며 1년에 백 장도 넘게 주변 풍경을 그렸다. 기자 출신답게 처음엔 보이는 대로 묘사했단다.집 창문이 세 개면 정말 세 개만 그렸어요. 사실 그대로 표현해야 할 것 같았죠. 하지만 그리면서 깨달았어요. 내가 뭘 그리고 싶은지, 또 뭘 그려야 하는 지도.눈에 보이는 풍경, 그건 사실화이기도 하면서 그녀가 바라본 모습이자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내가 좋아서 그리는 시간이 계속 쌓여 더 나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건 그림 실력과는 또 달라요. 내 삶이나 생각이 성숙해야 표현할 수 있는 거예요.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2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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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밥 같은 빵 <오월의 종 대표 정웅 님>
2017.11.30   조회수 : 7,471    댓글 : 10개
잘 다니던 직장을 하루아침에 그만두고 제빵 학원에 등록했다기에 빵에 관한 특별한 사연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사실 빵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돈 주고 사 먹지도 않았다니까요.오월의 종 대표 정웅 님(50세)이 멋쩍게 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계속 승진해 설령 임원이 된다 해도 지금과 똑같은 일을 하겠구나 생각하니 회의가 들었어요. 아무 의미가 없겠더라고요.잘 살고 있다 믿었던 그의 세계가 흔들렸다. 지금이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아 사표를 던졌다. 그날 회사 건너편에 있는 제빵 학원을 발견했다.​회사를 꽤 다녔는데 그런 곳이 있는 걸 처음 알았어요. 생각 없이 그저 왔다 갔다만 한 거죠. 뭐 하는 곳인지 궁금해 창문 너머로 훔쳐봤어요. 문득 ‘빵만드는 일이면 내가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요리 한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그가 빵을 만들겠다니. 가족, 친구, 회사 동료 모두가 입을 모아 반대할 때 갓 결혼한 그의 아내만 이렇게 말했다. “그럼 한번 해 봐요.” 그 말에 힘을 얻어 그는 빵을 굽기 시작했다. ‘얼마나 가겠어?’ 하며 빈정거리던 사람들이 무색하게 오늘까지도.​자격증을 딴 지 3년 되던 해 그는 일산에 ‘오월의 종’ 빵집을 열었다. 3년 후엔 꼬박꼬박 집에 돈을 가져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던 거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그러지 못했다. 그가 천연 발효종 빵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빵집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무척 생경했다. 사람들은 후식으로 먹을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빵을 선호했다.​저는 쌀밥 같은 빵을 만들고 싶었어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빵, 이런 식감이면 좋겠다 하는 빵 그리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빵. 그래서 천연 발효종 빵을 만들기 시작했죠.사람들이 모르는 빵을 만들다 보니 ‘오래된 빵이다’, ‘상한 것 같으니 환불해 달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결국 빵집은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가게 보증금도 못 건지고 빚까지 졌다.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나요?” 그는 질문을 받자마자 대번에 답했다. 수천 번도 넘게 포기하고 싶었다고.제빵 학원에 다닐 때 반죽의 기본인 ‘둥글리기’를 못했어요. 나이 들어 왔으면서 노력도 안 한다고 된통 혼난 날, 기가 팍 죽더라고요. 이 길이 아닌가 고민에 빠졌죠. 그 후에도 힘든 순간이 수없이 많았어요. 하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일인데 중간에 포기 할 수 없었어요. 누구도 찬성하지 않는 일을 한다고 나선 만큼 ‘그러면 그렇지.’라는 말은 듣기 싫었거든요.그래서인지 그는 신입 제빵사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나도 서른 넘어 시작했어.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야. 기죽지 마. 빵을 만들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돼. 시간을 갖고 열심히 하면 너도 잘 만들 수 있어.”하고 격려한다.2005년, 이태원에 다시 빵집을 열었다. 작고 소박한 가게. 거기서 그는 혼자 일했다. 마지막 기회라 여겼기에 빵 종류도 추려서 평소 하고 싶던 딱딱한 유럽식 빵만 만들어 팔았다. 외국인이 많은 동네라 기대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3년간 묵묵히 빵을 구웠다. 신제품을 개발하다 손님이 부르면 나가서 빵을 담아 주고, 오븐을 보러 갈 땐 손님에게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찾는 이가 하나둘 늘었고 사람들은 그의 빵에 길들여졌다.그러던 어느 저녁, 빵이 전부 팔렸다. 전날까지도 반 이상 남아 이웃에게 나눠 준 터라 의아했다.이상하다,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겼나?그는 밖으로 나가 거리를 둘러봤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빵은 매진됐다. 그리고 어느덧 사람들이 줄 서는 빵집이 되었다. 입소문이 나자 백화점 입점 제안이나 프랜차이즈 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그는 딱 잘라 거절했다.그럼 빵 맛이 변해서 안 돼요. 제 빵은 손이 많이 가고 오래 걸려요. 대량으로 만들기 어렵습니다.그가 만드는 빵은 대개 밀가루, 물, 소금 그리고 효모종으로만 반죽한다. 이런 저배합 빵일수록 조리법이 같아도 매번 동일하게 나오기 어렵단다. 지금껏 들은 칭찬 가운데 가장 기분 좋았던 말이 “빵 맛이 여전히 똑같네요.”라고. 오랜 단골이던 영국 손님이 한국을 떠났다가 3년 만에 다시 들러 해 준 말이다. 앞으로도 그런 빵을 만들고싶다고 했다.​빵이 나오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그의 손을 거친다. 처음 제빵을 시작할 때부터 그가 바라던 바다. 오븐을 여는 순간이 매번 설레는 것도 여전하다. 어떤 맛이 날지 궁금하기에. 원하는 맛이 나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한다. 그러면서 사는 재미와 행복을 느낀다.오늘 만든 빵이 오늘 다 팔리면 그걸로 족해요. 더 욕심내지 않아요. 내가 원하는 빵을 만들고, 또 그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 맛있게 먹길 바라죠. 나도 손님도 빵으로 행복하면 좋겠어요. 그렇게 오래오래 빵을 만들고 싶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시간이 지나간 자리 <가구 수리 전문점 양호방 대표 오양호 님>
2017.10.10   조회수 : 6,016    댓글 : 1개
이거 진짜 소중한 거예요.오래되긴 했는데 아직 쓸 만해요.가구 수리 전문점 양호방에 전화한 사람 대부분은 비슷하게 말한다. 일한지 42년, 오양호 님(60세)은 갖가지 사연이 담긴 가구를 매일 어루만졌다.타고난 손재주로 어린 시절부터 지게나 쟁기를 곧잘 만들던 그였다. 고향을떠나 서울로 올라와야 했지만 자신 있었다. 하지만 일은 생각보다 까다로웠다.설계할 때 단 몇 밀리만 실수해도 조립할 수 없었다. 가장 어려운 건 가구 칠이었다. 물감 배합이 너무 뻑뻑해도, 묽어도 안 됐다. 조금 잘못 칠해도 가구가쭈글쭈글하거나 물감이 마르지 않았다. 오로지 손의 감각으로 가장 적당한 배합을 찾아야 했다.10년 동안 가구 제작, 수리, 칠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우자 실력이 탄탄해졌다. 미처 몰랐던 나무의 매력을 발견한 것도 그 무렵이다. 예컨대 오동나무는손으로 못을 꾹 누르면 들어갈 만큼 가볍고 무른 재료였으나 벌레가 먹지 않고, 잘 닳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가구는 습도나 온도에 따라 계속 늘었다 줄었다 해요. 그런 것을 하나씩 알수록 애착이 생겨 나중엔 향기만 맡아도 행복했어요. ‘넌 결이 어쩜 이리 근사하니.’ ‘고놈, 참 잘생겼다.’ 하며 서로 교감했죠.이후 그는 수리만 전문적으로 했다. 의뢰품에 따라 매번 다른 기술이 필요해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1994년, 그는 아예 자신의 가게 ‘양호방’을 차렸다.하루는 노부부가 낡은 자개장을 보여 주기에 ‘할머니, 차라리 하나 사는게 어떠세요?’라고 물었더니 냅다 화내는 거예요. ‘희로애락을 같이한 복(福)있는 물건인데 어찌 함부로 버리라 하느냐, 당신은 직업 정신도 없느냐’면서요.숨은 사연을 몰랐던 거예요. 사정을 알았다면 절대 못했을 말이죠.제아무리 장인이 만들었고, 귀한 재료가 쓰였을지라도 애정이 담긴 물건이 최고예요. 물건에 추억이 담기면 더 이상 물건이아닌 보물이거든요. 저 역시 아버지의 2단장을 잃어버린 걸 두고두고 후회하죠. 아버지 몰래 서랍에 박힌 못을 빼서 토끼 사육장을 만들다 혼난 일, 아버지가 고장 난 장을 고치던 모습 등 아직도 옛일이 생생합니다. 만약 그걸 간직했다면 아버지의 흔적을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을 텐데…….물론 모든 손님이 결과에 만족한 건 아니었다. 옛것 그대로의 멋을 살렸더니 오히려 어디가 달라졌느냐고 따지는 손님도 있었다. 종이만큼 얇게 대패질해 벌어진 틈을메우는 게 복원 작업이다. 그만큼 과정이까다롭다.그리 치열하게 했는데 왜 속상하지 않겠어요. 그럴 땐 우선 설득해요. ‘이 가구만의멋이 있어요. 무조건 새것처럼 고친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돈은 받지 않을게요. 대신절대 다른 수리점에 맡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이대로 사용하는 편이 훨씬 좋아요.’손님의 요구에 맞추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 그는 양심을 지키려 애썼다. 노력할수록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붙이고 채우는 것, 큰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다. 때론 너무 화가 나 작업대를벗어난 적도 많았다. 기껏 잘하다가 칠만 조금 어긋나도 전체 모습이 엉망이되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면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멍청한 것, 알면서도 그런 실수를 해!’라며 자책도 했다. 하지만 뚝심 있게 매달리는 것 말고는 위기를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숱하게 좌절하는 사이 가구는 그에게 참을성을길러 준 셈이다.참 고마운 존재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좀 더 아껴 주면 좋겠어요. 일반 가정에 많이 두는 원목 가구에서 제일 중요한 건 습도 조절이죠. 날씨가 건조할때는 방바닥을 청소하듯 물걸레로 닦아 주면 좋아요. 온도에 예민하니 절대가습기나 난방 기구를 올리면 안 되고요. 의자나 서랍처럼 매일 쓰는 것은3~5년 뒤에 수리하세요. 중간에 한 번만 손봐도 평생 쓸 수 있으니까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11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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