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카테고리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 <청소 직업 전문 학원 원장 정재현 님>
2017.11.07   조회수 : 4,648    댓글 : 1개

청소를 누가 돈 주고 해? 누구나 할 수 있는데.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해야지.

어떤 이에게 청소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막상 하자니 귀찮은 일로 다가온다. 하지만 청소 직업 전문 학원 정재현 원장(52세)은 주위를 깨끗이 정리해야만 정신 역시 맑아진다고 믿는다. 청소는 사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카피라이터, 옥외 광고 전문가, 농부, 여행사 대표 등 그동안 거친 이력은 화려하지만 지금의 일에 가장 만족한다고 말한다. 

 

카피라이터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한번은 전자수첩 홍보를 맡았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꽤 많은 돈을 벌자 자신감이 생겨 옥외 광고 분야까지 진출했죠.

그런데 갑자기 아이엠에프의 그림자가 그를 덮쳤다. 잘될 줄 알았던 일은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했지만 늘 위기에 가로막혔다. 

 

3개월 동안 집에 틀어박혀 망연자실했죠. 이제 남은 건 몸뚱이뿐이구나 하면서요. 그러다 예전에 일본으로 어학연수 갔을 때가 떠올랐죠. 거기서 제일 인상 깊었던 건 청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었어요. 청소부라는 직업에 자부심이 대단했죠. 내겐 아직 건강한 몸이 있으니 그 분야에 도전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저기……. 청소를 배우고 싶습니다.” 청소 업체에 연락하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을 받지 않아도 좋으니 시켜만 달라고 매달리길 수차례, 고맙게도 한 청소 대행업체 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지저분한 곳을 쓸고 문지르는 게 전부였지만 청소에 매력을 느끼기 충분한 기회였다. 무엇보다 일의 순서를 익힐 수 있었다.

 

여러 번의 사업 실패 후 배운 게 있어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에만 신경 쓰면 절대 잘할 수 없다는 거예요. 아마 어린 나이였다면 청소를 초라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몸을 쓰는 일만의 특별함을 깨달았어요. 땀 흘릴수록 정신이 맑아진다는 거죠. 공간이 말끔해진 만큼 머릿속 잡념이 싹 사라졌어요. ‘아, 누구나 깨끗한 공간에서 살 필요가 있구나!’ 이 분야에서 점점 비전을 찾았죠.

그는 본격적으로 청소 대행업체를 차렸다. 일이 들어오면 도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아내와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부끄러워 고개 숙인 적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제법 단골도 생겼다. 어느집은 너무 지저분해 처음엔 치우는 데만 여덟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기간을 두고 몇번씩 방문하자 시간이 짧아졌다.고객은 몰라보게 달라진 표정으로 자랑했다. “이제야 깨끗한 곳에서 지내는 기쁨을 알겠어요. 날마다 조금씩 치우다 보니성격도 밝아졌고요. 고맙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성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2013년, 청소 전문 학원을 열었다. 주위에선 누가 청소를 돈 주고 배우느냐며 타박했지만 ‘나처럼 알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 역시 청소를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묻고 또 물었다. 어떤 세제를 써야할지 몰라 공부하고, 제조사에 연락하다 밤을 샌 적도 있었다.


타일만 해도 목재, 도기, 유리 등 종류가 여러 가지예요. 어떤 도구에 무슨 세제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죠. 또 원인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사람들의 주된 고민 중 하나가 부엌 정리거든요. 부엌에서 제일 중요한 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마루와 싱크대 사이 공간이에요. 먹을 게 있고 어두운 곳이라 바퀴벌레가 생기기 쉽거든요. 먼지를 닦고 환기를 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히 해충을 막을 수 있죠. 이렇듯 파고들수록 공부할 것이 많다 보니 수강생들이 입을 쩍 벌린다니까요. 무엇보다 청소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함께 깨닫는 과정이 보람있어요.

스물셋의 청년부터 일흔넷의 어르신까지, 나이와 사연은 천차만별이지만 누구 하나 청소를 쉽게 여기지 않는다. 단순 기술뿐 아니라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를 배운 그들은 자신을 ‘삶을 변화시키는 전문가’라 말한다.

 

청소를 통해 배운 게 많기에 갈수록 자부심이 커져요. 예를 들어 정리를 위해선 버릴 걸 정해야 하죠. 고객을 만나 보면 냉장고엔 작년 추석 음식, 옷장엔 3년 전 입었던 옷이 수두룩해요. 그때마다 질문하죠. ‘이게 꼭 필요합니까?’ 그럼 대부분 고개를 저어요. 당사자로선 큰 결심이죠. 버리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얻기 위해선 먼저 버려야 한다는 걸 직접 경험해 보니 제 인생도 단순하고 명확해졌어요.

 

인터뷰 전문은 좋은생각」 12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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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신정호
2018.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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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서점에 가면 
무서울 정도로 AI(인공지능)의 발전을 경고하는 책이 넘치는데,
적어도 기계가 대신 못하는 영역의 일을 
사람의 힘으로 프로정신을 갖고 덤비다면
앞으로도 직업에 희망을 갖고 계속 도전할 수 있겠네요.

버리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 공감합니다.
저도 먼저 버리고 제 인생을 단순, 명확하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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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의 기쁨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다 <미술사학자 이내옥 님>
2018.08.08   조회수 : 926    댓글 : 0개
모든 존재에는 아름다움이 들었죠. 하지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국립 박물관에서 34년간 큐레이터로 일한 미술사학자 이내옥 님(63세). 그는 박물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를 고민했단다. 관람객이 몰려오고, 선배들도 “참 잘생겼구먼.” 하고 감탄하는 유물이 그의 눈에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그 유물이 얼마나 가치 있고 빼어난 미를 지녔는지 책에서 배워 머리로는 이해했다. 하지만 가슴으로 느끼질 못하니 답답할 따름이었다.이런 미적 안목이나 감수성은 어릴 적부터 보고 느끼고 맛보며 자연스럽게 체득하기 마련이다. 하나그러기 어려웠다. 문화의 싹을 키우기엔 먹고살기가 고달팠다. 그만이 아니라동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박물관에서 유물을 살피고, 번호를 매기고, 사진 찍어 대장을 작성하기를수없이 반복했다. 하루는 어느 도자기를 보다 문득 알았다. 진품과 가품의 차이를.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많이 보고, 계속 공부하면 눈이 열린다는걸.그러고도 꽤 오랜 시간 유물을 보고 절절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공부가 진척되고 견문을 쌓은 뒤에야 남의 지식이 아니라 내 관점으로 하나하나 보게됐다. 이른바 안목이 생긴 것. 여기엔 유물만이 아닌 모든 사물의 아름다움을보는 것까지 포함되었다.박물관 일을 하며 만난 사람들 덕분이지요.부여 박물관 백제 도록을 만들 때 만난사진 작가 준초이 선생. 최고의 상업 작가인 그는 어떤 것도 좋아 보이게 찍었다. 그러니 백제 유물이 지닌 아름다움은 오죽잘 전달해 주랴 싶어 사진을 부탁했다. 그역시 자신만만했다.하지만 준초이 선생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 사유상을 찍으며 별 감흥을 느끼지못했다고 고백했다. 하루 내내 촬영했으나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찍겠다는 것. 어렵게 허가를 얻어 재촬영 일정을 잡았다.촬영 날, 그는 3톤짜리 대형 받침대를 제작해 가져왔다. 그 위에 불상을 올려놓고천천히 돌려 가며 보고 또 보았다. 어느 순간 반가 사유상의 콧날부터 이마까지 이어지는 날렵한 선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그런 후에야 겨우 만족할 만한 작품을 얻었다. 만약 준초이 선생이 금동 반가 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한 채 사진을 찍었다면 좋은 작품이 탄생했을까.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인 그가 힘을 빼고 겸허하게 다가가 마침내 그만의 방식대로 유물사진을 찍은 것이다.얼마 전 작고한 최영도 선생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변호사로 일하며 평생 토기를수집했다. 토기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암 수술 후 입원 중에도 좋은 물건이 있다는 말에 병실을 빠져나가 지방까지 달려가 사 왔단다. 그런 선생이 수집한 토기 1,700여 점을 국립 중앙 박물관에 기증했다. 변호사답게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토기를 어떻게 다루고 보관할지도 썼다.그는 최 선생을 포함해 많은 수집가를 만났다. 그들은 처음엔 한 점, 두 점모으는 데 재미를 붙이다 점점 수집품의 장래를 고민한다. 그러다 결국 그 물건들을 공공 박물관에 기증한다. 자신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그 아름다움을 살리지 못할 바에는 대접받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는 것이다. 소유가 아닌존재로 두는 것. 그는 수집가들에게서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요즘은 젊은이들에게 배웁니다. 음식의 맛을 찾는 것도 하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겁니다. ‘미니멀리즘(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방식)’에서부터 ‘소확행(작고 확실한 행복)’까지, 우리 시대와 달리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삶의 방식에 격려를 보냅니다. 또한 책을 많이 읽고, 여행을 자주 하면서 이류나 삼류가 아닌 최고의 것을 보면 안목이 열릴 겁니다. 우리 사회가 그런 쪽으로 나아가고 있고, 또 그렇게 되리라 낙관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 삶은 훨씬 풍성하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9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최선을 다하면 기회는 온다 <쇼트 트랙 선수 김아랑 님>
2018.07.09   조회수 : 2,562    댓글 : 3개
여름날에도 빙상 경기장은 몸이 움츠러들 만큼 공기가 찼다. 김아랑 선수(22세)는 익숙한 듯 얇은 패딩 점퍼 차림에 야무지게 윗옷까지 챙겨 왔다. 힐끗보더니 대뜸 옷을 건넨다. “추우시죠? 이거 걸치실래요?” 지상 훈련 중인 후배를 보자 살뜰히 안부를 묻고, “우아! 국가 대표 처음 봐요.” 하고 신기한 듯 쳐다보는 어린이에겐 손을 흔들어 준다.문득 평창 동계 올림픽 여자 쇼트 트랙 1,500미터 결승전이 떠올랐다. 간발의 차로 메달 획득이 무산된 김아랑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눈물을 쏟는 최민정 선수에게 다가가 다독였다. 활짝 웃는 그 장면은 사람들 뇌리에 오래 남았다.“정말 축하해 주고 싶었어요. 대견하잖아요.”그 일에 대해 묻자 그녀가 답했다. 그러곤 덧붙였다.“저도 최선을 다했어요. 후회 없는 경기여서 저 자신도칭찬해 줬어요.”후련한 마음에서 우러난 미소였다.그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친오빠와 스케이트를 시작했다.제가 스케이트를 신고도 잘 서 있어서 코치님이 한번 시켜 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했대요.스케이트는 흥미로웠다. “특히 쇼트 트랙은 1등으로 앞서다가도 넘어질 수있고, 마지막까지 누가 이길지 모르는 재미가 있어요.” 또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기회가 온다는 것도.하지만 어린 시절 탄탄대로만 달린 건 아니다. 아들딸을 운동시킬 만큼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고향 전주에는 빙상 경기장이 단 한 곳뿐이라훈련 장소도 부족했다. 팀을 옮겨 서울에 올라왔으나 또래 유망주들에게 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연습에 매진했다. 굳은 심지를 다질수 있었던 건 부모님 덕분이다.단 한 번도 성적 때문에 혼난 적이 없어요. 시합 다녀오면 결과도 묻지 않고 ‘우리딸 수고했어.’ 하셨죠.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중 3 때 시합을 망친 후 펑펑 우는데어머니가 말했다.넌 잘할 수 있는 아이야.이 시합이 전부가 아니잖아. 잊어버리고 다음에 잘하면 되지.그때 알았다. 성적이 나빠도, 국가 대표가 되지 못해도 부모님은실망하지 않는 것을. 또 언제나 ‘다음’이 있다는걸. 이 일은 그녀가 위기를 겪을 적마다 스스로를 다잡고 일어서는 힘이 됐다.그녀는 소치 동계 올림픽과 평창 동계 올림픽에 연이어 출전해 각각 금메달을 목에걸었다. 결과만 보면 선수 생활이 승승장구한 듯 보이지만 부침이 많았다. 국가 대표에 선발돼 열아홉 살에 소치 올림픽에 나갔으나, 경기 당일 급성 위염으로 주 종목인1,500미터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그 후 2016/17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탈락하기도 하고, 스케이트 날에 얼굴을 베이는 사고도 겪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생각했다. ‘다음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자.’ ‘열심히 해서 다음 시즌에는 국가 대표가 되자.’‘다리나 허리를 다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이런 생각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소치 올림픽에서 계주 금메달을땄고, 2017/18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종합 2위를 기록해 평창 올림픽에 나갔으며, 얼굴 흉터 역시 점점 옅어졌다.다만 2016/17 시즌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탈락했을 땐 꽤나 마음고생했단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쟤는 끝났어. 다시 국가대표 되기 힘들겠지.화가 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하나 상황을 탓하기보다 인정하자고 마음먹었다.“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더 열심히 하면 돼.” 어머니도같은 말을 해 주었다. “괜찮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되지.”혹시 불안한 적은 없었어요?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불안감은 준비가부족할 때, ‘내가 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 온다고 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으려 철저하게 준비했단다. 평창올림픽을 겨냥해 2년 훈련 계획을 세웠다.‘국가 대표가 되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아예 배제했다. 초반에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훈련을 거듭하자 부담감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어느순간 스케이팅이 더 즐거워졌다.4년간 준비한 올림픽을 마친 지금 좀 편안해졌느냐고 물었다. 다부진 대답이 돌아왔다.제가 운동선수이긴 한가 봐요. 계속 운동을 해야 하니까 마음놓고 쉬지 못하겠어요. 아직은 더 해야 할 때구나 싶어요.*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8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마음을 담아야 맛이 난다 <동무밥상 대표 윤종철 님>
2018.06.07   조회수 : 3,054    댓글 : 4개
돈 욕심 부리면 망한다는 걸 남한 와서 배웠지요.함경북도 온성 출신인 윤종철 님(63세)은 1998년 두만강을 건너, 2000년에 남한으로 왔다.딸을 위해 돈을 벌고자 간 중국에서 남한 모습을 알게 된 것이다. 당시 그가본 한국은 자유롭게 일하고, 개인이 잘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는 곳.다단계에 빠지기도 하고 이자를 많이 준다고 해서 투자했다가 정착금을 홀랑 날리기도 했어요. 돌아보면 전부 내 탓이에요. 쉽게 큰돈을 벌고 싶어 사기꾼들 말에 혹한 거죠. 욕심 부린 나를 반성했어요. 내가 잘하는 걸 열심히 하며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섰어요.사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기술이 있었다. 바로 요리였다.열여덟 살에 군 입대 하니 나를 훈련소가 아닌 옥류관으로 데려가지 뭡니까.그전까지 부엌엔 들어가 보지도 않았다. 한데 하루아침에 평양 최고의 식당에서 일하게 된 것이다. 그의 훈련은 요리였다. 옥류관에서 넉 달간 보조로 일하며 부지런히 익혔다. 그런 다음 다른 훈련병 세 명과 시험을 치렀다.기왕 칼을 잡았으니 최고로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죽기 살기로 했습니다.밤잠 설쳐 가며 ‘요리 공부’를 한 끝에 일 등을 차지해 군 장성 식당에 배치됐다. 고위급 장성 열여섯 명을 위한 곳이었다. 각기 다른 지역 출신이라 입맛도,좋아하는 음식도 제각각. 맛없으면 호통치고, 먹고 싶은 음식 조리법을 알려주며 만들라고 했다. 그곳에서 십 년간 요리하며 군 복무를 마쳤다. 하지만 요리사로 살기는 싫었단다. “북한에선 요리사가 괄시받는 직업이었어요. 할아버지가 유명 요리사였는데 평생 대접을 못 받으셨죠.” 그래서 회령 경공업 단과대학에서 발효를 배워 졸업 후 공장에서 된장, 간장 등을 만들었다.군에서 갈고닦은 요리 실력은 한국에서 뒤늦게 빛을 발했다. 북한 여러 지역의 음식을 꿰뚫는 덕분에 이호경 대표의 요리 교실 ‘호야쿡스’에서 북한 음식을가르치고 또 음식점을 차릴 발판도 마련할 수 있었다. 처음 가게를 열 때만 해도 이런 후미진 골목까지 누가 찾아올까 싶었다. 그런데 입소문이 나며 사람들이 가게앞에 줄 서기 시작했다. 그때 알았다. 자신의 기술로 정성을 다하면 통한다는걸.그는 쉬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 가게를닫는 월요일에도 아내와 김치를 담근다. 김치를 통에 담는 것까지 직접 해야 ‘딱 소리나는 맛(북한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하는말)’이 난단다.영업을 일찍 마치는 일요일에는 순대를만든다. 그가 자랑하는 함경도 식 순대.돼지고기를 다져 갖은 채소와 찹쌀을 넣어 속을 만듭니다. 그걸 돼지 창자에 채워 넣죠.말로 하면 쉬운데 막상 만들면 무척 힘듭니다. 그래도 제대로 만든 북한 음식을 보여주고 싶어 계속합니다.그는 정통 북한 음식을 고집하지만 한국사람들 입맛을 고려해 요리법을 조금씩 바꾸고 메뉴도 과감히 변경한다. 그가 제일좋아하는 음식인 옥수수 국수를 손님들이즐기지 않자 메뉴판에서 지우고, 얼마 전오리탕도 돼지국밥으로 바꾸었다.평양냉면은 옥류관에서 배운 대로 만들되 여기에 맞게 변형했다. 북한에서는 냉면을 먹을 때 가위로 자르지 않는다. 그래서면을 반죽할 때 목 넘김에 좋으라고 식소다를 섞는다. 하나 건강을 생각하는 남한 사람들은 화학조미료를 꺼려 뺀단다. 국물도 북한에서는 꿩고기를주로 썼지만 여기서는 구하기 쉬운닭과 꿩을 섞어 쓴다. 또 동치미 국물을 넣어 쨍한 맛을 내고, 간장으로간한다.집에서도 다 내가 해요. 가게에서든 집에서든 계속해야지, 안 그러면 요리가 늘지 않아요.그래서 외식도 꺼린다. 북한 음식은 원재료를 살려 살짝 싱거운 데 반해 남한 음식은 양념을 진하게 한단다. 북한 음식의 맛을 잊을까 겁이 난다고 했다.술집에 가서도 안주로 과자 몇 개만 집어 먹을 뿐 다른 건 일체 맛보지 않는다.우리 어머니가 해 준 옥수수 국수, 그 맛이 아직도 기억나요.그의 고향에서는 옥수수 농사를 지어 먹고살았다. 어머니가 해 준 옥수수국수는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우거짓국에 옥수수 면을 넣어 끓인 것이었다. 여덟 자식 입에 먹을 걸 넣어 주느라 부엌을 떠나지 못한 어머니. 비록 어머니에게서 요리를 배우지는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걸 깨우쳤다. 음식에 마음을담아야 맛이 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아무리 몸이 아파도 부엌에 선다. 그의손을 거친 음식이라야 손님상에 나간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7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정성을 들이는 일 <염색가 신상웅 님>
2018.04.27   조회수 : 2,682    댓글 : 0개
좋아서요. 다른 이유가 뭐 있겠어요.많고 많은 색 가운데 왜 푸른 쪽물을 들였느냐는 질문에 염색가 신상웅 님(50세)은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십수 년 쪽물만 들인 사람의 대답이라고하기에는 어쩐지 밋밋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저는 푸른색을 가장 좋아해요. 쪽 염색으로 다채로운 푸른색을 만날 수있죠. 쪽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이에요. 언뜻 보면 같은 색처럼 보이지만 모아 두면 다 달라요.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그가 쪽 염색을 하며 살 줄은 스스로도 몰랐다.이십오륙 년 전, 대학 다니던 무렵이었다. 인사동에 천만 걸어 선보인다는 전시회가 열려 찾아갔다. 천연 염색가 한광석이 자연의 빛깔을 끄집어내 천에 재현한 작품들이었다.색에 예민한 미술 학도라 그랬을까, 호기심이 생긴 그는 무작정 작가에게편지를 보내 방문하고 싶다고 청했다. 허락을 받아 여름 방학 내내 벌교에 머무르며 농사일을 거들고 염색 과정을 지켜보았다. 학기 땐 주말에 수시로 찾아갔다.귀한 일 같아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그렇게 하기를 십 년. 그때까지도 색을 그림에 이용하려 했을 뿐 염색을 할 생각은 없었다.서른을 앞두고 그는 늘 바라던 긴 여행을 떠났다.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에서 문득 초등학생 때 떠나온 충북 괴산의 고향 집을 떠올렸다. 청주, 서울에서 유학하며 ‘언젠가 다시 가야지.’ 하는 마음을 품은 터였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 ‘내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다 보니 염색이 떠올랐다. 갖가지 색 가운데 쪽빛을 들이고 싶었다.서른 중반 봄부터 그는 쪽씨를 얻어 모판에 뿌렸다. 오월 중순쯤 10센티 정도 자란 쪽 모종을 밭에 옮겨 심으면 석 달 후엔 1미터를 웃돌 만큼 훌쩍 컸다.쪽에서 염료를 뽑는 일 또한 쉽지 않다.다 자란 쪽을 베어 항아리에 꾹꾹 눌러 담은 후 물을 가득 채운다. 이삼 일 뒤 에메랄드빛 물이 우러나오면 쪽을 건져 내고 석회를 넣은 다음 힘껏 저어 앙금을 만든다. 여기까지가 염료를 모으는 일이다.미리 내려 놓은 잿물에 앙금을 섞은 다음 매일 저어야 해요. 하루에도 열 차례 이상 반복해야 발효가 잘됩니다. 한두 달은그렇게 저으며 기다리는 거지요.발효 과정까지 마치면 쪽물은 농익어 염색 준비를 마친다. 그다음엔 천을 쪽물에담가 염색한다. 긴 시간 동안 수많은 과정을 거쳐 흰 천에 푸른색이 스며드는 순간가슴이 벅차다. 주변에 푸른 천들이 켜켜이쌓이고, 그 천을 흔들면 푸른 먼지가 펄럭이고, 그의 손도 푸르게 물든다.일본엔 이런 말이 전해진답니다. 쪽 염색을 하는 사람은 결코 나쁜 일을 할 수 없다고. 손에 물든 푸른색 때문에 금세 들통나거든요.처음엔 색에 압도당해 염색물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한데 삼사 년쯤 지나자 조금단조롭게 느껴졌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천의 두께, 물들이는 횟수, 햇볕, 공기까지 여러 요인이 결합해 새로운 푸른색이 태어난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색을 내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고민을 거듭하던 무렵 그는 연암 박지원의 글을 읽다가 ‘화포’를 만났다. 화포는 무늬를 넣어 쪽물을 들인 천. 연암이 화포 두루마기를 입은 기록이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이전의 염색과 다른,푸른 천에 생기를 불어넣을 방법이었다.그는 화포를 ‘천에 무늬로 의견을 남기는것’이라고 정의하며 덧붙였다.저도 푸른 천에 제 생각을 담고 싶어졌어요.2005년부터 그는 염색을 쉬는 겨울마다여행을 떠났다. 시작은 쪽 염색과 화포를조사하다 책에서 본 묘족(중국 남부에 주로거주하는 소수 민족)이었다. 그들은 일상에서쪽물 들인 옷을 입었다. 또 밀랍으로 천에무늬를 만들었다. 바로 그가 찾던 화포였다. 서점 구석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보고 몽족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중국,태국, 베트남, 라오스, 일본 등의 구석구석을 살폈다.제가 원하는 걸 찾으면 좋지만, 본다고해서 달라질 건 없었어요. 한국에는 이제 남아 있지 않은, 제가 하는 일의 ‘현재’를 보고 싶었어요.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도요.그가 찾은 마을 몇몇에서도 전통이 빠르게 쇠퇴했다. 품과 비용이 많이 드니 어찌 보면 지금 시대에는 경제적이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분명 이런전통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 여성이 손수 물들여 무늬를 넣은천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모습을 보았고, 상해의 도심에서 푸른 화포로 치파오를 만들어 파는 가게도 만났기에. 그리고 스스로가 정성을 들여 십수 년간 이 일을 하고 있기에.전통적인 방식을 좋아할 단 1퍼센트 사람을 위해서라도 저는 계속하고 싶어요. 누가 찾을 때 남아 있도록.*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6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사랑으로 지켜봐 주세요 <정신 건강 의학과 교수 조선미 님>
2018.04.06   조회수 : 3,274    댓글 : 0개
“인터뷰 약속 때문에 따님과 통화할 때 마무리 인사만 5분 넘게 했어요.”​이 말에 아주대 정신 건강 의학과 조선미 교수(56세)가 활짝 웃었다. 그야말로 ‘엄마 미소’였다.​큰아이는 참 다정해요. 아침저녁으로 만날 때마다 ‘엄마, 보고 싶었어.’ 그래요. 저는 열흘 넘게 학회에 다녀와도 ‘엄마 다녀왔어.’ 하고 마는데.지금은 ‘이 아이는 다정한 기질을 지녔구나.’ 하고 받아들였지만 예전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단다. 그래서 화내고 소리치는 일을 반복했다. 아이를 보살피며 어려움을 겪는 부모에게 ‘속 시원한’ 조언을 들려주는 그녀 역시 한때는 초보 엄마였다.​처음엔 이론적으로 설명했어요. ‘부모와의 애착은 아이가 평생 맺는 대인 관계의 기본 틀이 된다’처럼요. 그런데 교육 후에 받는 질문이 늘 비슷하더라고요. ‘애가 조르는데 휴대 전화는 언제 사 줄까요?’ ‘학교 다녀와서 숙제부터하고 놀면 되는데 왜 안 할까요?’ 그러다 보니 제 경험담을 말할 때 공감대 형성이 훨씬 잘되는 걸 알았죠. 거창한 이론보다 현실적인 대처법을 알려 주는게 효과적이더라고요.그녀는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몇 년이 가장 힘들었단다. 정신 바짝 차리고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다그치듯 물었다. “숙제는? 준비물은? 일기는 썼어?” 아이가 아니라, 그 애가 해야 할 일만 보였다.몇 년이 흘러 학교생활에 익숙해지자 다른 엄마 노릇이 찾아왔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잘해야 명문대를 간다.” “중학교성적이 수능 점수다.” 주변의 말이 그녀를 흔들었다. 그녀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모든 부모가 자녀의 행복을 바랄 거예요. 그런데 명문대를 가서 대기업에 취직하면 정말 행복할까요? 전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죠.대신 아이들을 ‘영혼이 강한 아이’로 키우고자 했다. 어려운 일을 잘 견딜 수 있도록. 힘들 때 울지 않는 게 아니라, 적당히 울다 스스로 그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아이가 처음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면 주저앉아 운다. 하지만 몇 번 반복하다 보면 툭 털고 일어나 다시 페달을 밟는다. 이렇듯 아이가 실패와 좌절을 맛본 뒤 다시 기운을 차리는 ‘맷집’을 늘려야 영혼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의대생들 가운데 고된 의대 생활을 마치고도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에서 그만두는 경우가 늘었다고 했다. 환자나 보호자, 병원 사람들과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것이다.물론 적성에 맞지 않거나 정말 힘들면 그만두는 게 맞아요. 그런데 타인과의 관계나 조직에서 갈등이 생겨 고통스럽다고 무조건 피하는 건 문제가 됩니다. 그런 일은 다른 곳에서도 벌어질 수 있거든요. 결국은 세상에서 도망치게 돼요.물론 그녀도 안다. 자식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자신도 두 아이를 키운 엄마이기에. 하나 그게 사랑이 아니라 불안 때문임을 알았단다. 넘어진 아이는 기다려 주면 스스로 일어나는데, 그걸 알면서도 부모가 일으켜 주는 건 아이를 기다리는 동안 느끼는 마음의 고통 때문이다.​대개 아이가 실패하는 게 싫어 엄마가 해 주거나,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아빠가 대신 결정을 내려 준다고 해요. 그거 아세요? 부모가 적극적으로 키운 아이가 도리어 소극적으로 자라요. 자기 의지가 안 생기거든요. 이미 할 게 결정돼 있으니 호기심도 일어나지 않죠. 아이가 생각할 기회가 없는 거예요. 부모 뜻대로 하면 되니까.이렇게 해서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아 오면 부모는 뿌듯해한다. 하지만 아이는 그 성적을 전적으로 자신의 공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 판단은 믿을 만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르는 게 낫다고 여긴다. 그러다 보면 삶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스스로 내린 결정을 미숙하다고 생각하며 중요한 순간엔 우유부단해진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하며 차라리 누군가 정해 주길 바란다.그녀는 당부했다. 부모의 마음속‘불안’을 들키지 않으면서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봐 주면 좋겠다고, 부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갈지라도 말이다. 새로운 시도를 격려하고, 실패한 아이를 따뜻하게 안아 주면 한 뼘씩 자랄 거라고.*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5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동행의 기쁨
나무처럼 살 수 있다면 <나무 의사 강전유 님>
2018.03.08   조회수 : 3,554    댓글 : 7개
오는 6월 28일부터 ‘나무 의사’와 ‘수목 치료 기술자’ 국가 자격이 신설된다. 이 이야기를 꺼내자 나무 종합 병원 강전유 원장(81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주름 잡힌 얼굴엔 웃음이 흘렀다.​정말 기쁩니다. 그동안에는 아무나 나무에 약을 뿌리고 수술했는데 이젠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할 수 있게 됐어요. 나무뿐 아니라 사람 역시 살리는 일이에요. 나무가 병들었다고 독한 약을 막 뿌리면 나무도 상하지만 사람도 다칠 수 있거든요.1976년 4월, 그는 국내 최초로 ‘나무 종합 병원’을 열었다. 나이 마흔한 살에 십사 년간 다닌 산림청 임업 연구직을 그만두면서까지 선택한 결정. 동료들은 “누가 나무 치료한다고 의사까지 부르겠느냐. 그러다 굶어 죽기 딱 좋다.”라며 만류했다. 하나 그는 확고했다. 그간 임업 연구원에서 나무의 병충해를 연구해 온 터다. 나무가 왜 병드는지, 해로운 벌레는 무엇인지, 아픈 나무를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지. 연구실에서 병든 나뭇가지와 해충과 씨름하며 살았다. 하지만 기껏 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법을 알아내도 직접 찾아가 고쳐 줄 수 없었다. 공무원 신분이라 국가 기관이나 공공 기관의 요청이 아니면 갈 수 없기 때문. 그저 간혹 오는 전화 문의에 성심성의껏 답해 줄 밖에.당시엔 시들시들한 나무는 베어 땔감으로 쓰면 그만이라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나무를 치료하는 민간 전문가가 있을 리 만무했다.‘누군가는 나무를 치료해야 해. 내가 해 보면 어떨까? 원인만 분석하는 게 아니라 나무 한 그루라도 찾아가 살리는 거야.’ 이 생각이 그를 나무 의사의 길로 이끌었다. “혹시 잘 안되면 어쩌나 걱정하진 않으셨어요?” 조심스레 던진 질문에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퇴직금이 오십삼만 원 나왔는데 딱 그 돈 들여서 나무 종합 병원을 차렸어요.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이 있어요. ‘지금 망해도 아쉬울 거 없다’고요.나무가 점점 많아지니 나무 의사가 꼭 필요할 거라는 계산이 섰다. 그러나이 일로 큰돈을 벌거나 성공하리란 기대는 없었다. 그저 나무처럼 살면 된다고 여겼다.​나무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삽니다. 키가 큰 나무, 작은 나무, 뾰족한 나무가 있는가 하면 뭉툭한 나무도 있죠. 사람도 나무처럼 저마다 자기 생긴 대로 살면 되는 거 아닐까요. 모두 부자거나 명망 있는 사람이 될 필요는 없잖아요.세끼 밥 먹고 누워 잘 데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처음엔 찾는 이가 아예 없었다. 개원 후 일 년간 수입이 없자 세무서에서 찾아와 이럴 바에는 폐업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까지 했다.그날 이후 그는 손수레에 나무 치료 약을 싣고 거리로 나갔다. 정원수가 많은 동네를 다니며 담 너머 아픈 나무가 보이면 초인종을 눌렀다. 집주인은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자기 집 나무를 치료하겠다고 하니 벌컥 화내기 일쑤였다.​“귀댁의 나무는 건강합니까?”라는 전단을 만들어 뿌리기도 했다. 반응은 신통치않았다. 사람들은 대학 나와 공무원 하던 사람이 나무에 약이나 뿌리고 다닌다며 혀를 끌끌 찼다.하지만 그 일이 하찮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시름시름 앓는 나무를 보면 안쓰러웠고 그의 손길로 생생하게 살아나면 기쁘기만 했다.1978년 여름, 문화재청에서 의뢰가 왔다. 천연기념물 115호로 지정된 중국 쥐엄나무를 치료해 달라는 것이다. 가 보니 원줄기는 부러져 없어졌고 지면에서 올라온 가지 두개만 살았을 뿐. 뿌리까지 썩은 터라 자칫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전전긍긍하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태풍이 불기 시작했다.비가 몰아치는 밤, 그는 나무가 쓰러질까 옆에 앉아 함께 지새웠다. 다행히 나무는 무사히 버텨 주었고 수술도 잘 마쳐 지금껏 건강하게 자란다.​나무가 나보다 오래 살길 바랍니다. 그럴 거예요.이후 나무 수술의 효과를 본 문화재청에서 의뢰가 오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날까지 나무가 아프다는 연락을 받으면 왕진 가방을 들고 어디든 간다.*인터뷰 전문은「좋은생각」 4월 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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