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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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마루] 꿈을 공작하는 사람

 내 중학생 시절 국어 선생님은 목소리가 크고 활기찼다. 씩씩하게 걷고 우렁찬 소리로 웃었다. 나는 웃는 동작에 그렇게나 많은 근육이 쓰이는 줄 그때 처음 알았다. 어깨를 활짝 펴고 고개를 젖힌 뒤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는 그녀의 모습을 몰래 따라 해 본 적도 있다. 움츠린 근육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펴지는 기분이었다.

 

당시 고입 시험 준비로 적막하게 굳은 교실에서는 선생님만이 소리와 색깔을 지녔다. 책상에 문제집을 벽처럼 쌓아 놓고 버티던 아이들이 조심스레 소리를 섞고 색을 훔쳐보았다. 선생님은 한결같이 소란스러웠다. 큰 소리로 누군가를 호명하고 어깨를 팡팡 두드려 댔다. 선생님 걸음걸이나 웃음소리를 흉내내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웅성거린 건 여름 방학 숙제 목록을 받아 든 뒤였다. 모의고사 오답 노트, 수학 기출 문제 프린트처럼 익숙한 단어들 사이에 국어 숙제만이 생소한 탓이었다. “단편 소설 창작하기(원고지 60매).”

 

소설이라고? 나는 질린 얼굴로 아이들과 함께 수군거렸다. “세상에, 소설 쓰기가 숙제라니 말도 안 돼. 그걸로 대체 뭘 하라고?” “국어 성적 올리는 데 소설이 무슨 소용이야?”

 

보충 수업이 끝난 즉시 나는 집으로 내달렸다. 흰 종이를 꺼내 놓고 땀을 뻘뻘 흘리며 소설을 썼다. 숙제니까 어쩔 수 없지. 변명과 함께 눌러쓴 글자들을 몇 번이고 고쳤다. 표지를 만들어 붙이고, 원고가 낱장으로 풀어질까 봐 구멍을 뚫어 노끈으로 묶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평생 글을 쓰게 될 줄은. 세상에, 소설 이까짓 게 다 뭐람. 그렇게 투덜거렸다. 첫 소설책이 나오자마자 나는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그때 선생님이 내 준 숙제 때문이에요.” 나는 따지듯 말한 뒤 선생님이 사 준 맥주를 마시고 치킨 날개를 뜯어 먹었다. 선생님은 여전히 우렁차게 웃다가 내게 물었다.

 

“그럼 이젠 뭘 할 거야?” “또 책을 내야죠.” “그러고 나서는?” “또, 또 책을 내야죠. 선생님은요?” “내 장래 희망은 말이야.” 나는 흠칫 놀라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장래 희망이라고? 아이들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써 넣는 그거? 진로 조사 할 때나 물어보는 그 장래 희망?

 

“나는 나중에 책방 주인이 될 거야. 책만 파는 곳 말고 사람들끼리 독서 모임도 갖고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책방. 작가의 방 같은 것도 있음 좋겠다. 네가 와서 글도 쓰고 나랑 수다도 떠는 거야.” “선생님은 이미 선생님이잖아요?” “지금은 그렇지. 그러니까 나중에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렇게 선생님과 헤어졌다. 선생님이 사 준 케이크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선생님을생각했다. 선생님, 선생님 장래 희망은 선생님이었을 거잖아요. 그게 이루어졌으면 끝 아닌가요? 다른 꿈이 왜 또 필요해요?

 

이후 선생님과 만나지 못하고 여러 해가 흘렀다. 다음 책, 또 다음 책을 출간했음에도 이상하게 내 안의 계절은 하나뿐이었다. 중학생 시절 땀을 뻘뻘 흘리며 문장을 짜낸 여름밤이 매일 반복되는 기분이었다.

 

그 시절과 다른 것이 있다면 나는 지쳐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원고를 책상에 벽처럼 쌓아 올린 채 나는 불투명한 젤리처럼 굳어 갔다. 다시금 소리와 색이 사라진 세계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작가가 되었지.

 

그래서 그 다음엔? 초조하고 스산한 마음이 나를 짓누른 때였다. “오랫동안 생각해 오던 일을 강화읍에 작은 책방 열기부터 시작하려고 해.” 네게 언젠가 말했던 것처럼, 이라고 선생님은 메일을 이어 갔다. 십여 년 만의 연락이었다. 나는 선생님이 부천의 작은 맥줏집에서 늘어놓은 말을 떠올렸다.

 

선생님의 장래 희망에 대해서도. 선생님이 되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되어 책방 주인을 꿈꾸었고, 책방 주인이 되어 독서 모임을 꿈꾸었고, 하는 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나는 오래오래 떠올렸다.

 

은퇴했다고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선생님은 소란하고 활기찬 사람이니까. 고이거나 굳어 버릴 틈 없이 바쁘게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니까. 책방 이름에 붙은 꿈 공작소라는 덧말을 소리 내어 발음해 보았다. 선생님다웠다.

 

나는 조만간 선생님의 작은 책방에 들르겠다는 답을 남겼다. 오늘을 씩씩하게 걸어 내일로 가겠다고, 꿈을 공작하는 그곳으로 찾아가겠다고. 책방 주인이 되었지만 내게는 여전히 선생님인 당신에게 가겠노라고.

 

안보윤 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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