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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귀룽나무 카페의 여인

 

손 편지를 쓰는 분이 있었다. 정확히는 엽서였다. 더 정확히는 관제엽서. 

 

엽서라는 이름도 새삼스러운데 관제엽서라니 더 그렇다. 그녀가 쓰던 관제엽서의 가격이 160원이라고 했던 것 같다. 십오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장편 소설이라도 끝내면 나는 종종 먼 동네를 일주일쯤 여행하곤 했다. 되도록 내가 사는 서울에서 먼 산촌이나 바닷가 마을로. 집을 떠나 있는 동안은 글도 안 쓰고 책도 안 읽고 텔레비전도 보지 않았다. 그냥 슬슬 걷고 무언가를 먹고 산봉우리를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수평선 끝에다 멍청한 시선을 던져 두곤 했다.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과 잠깐의 인연이 생기기도 했는데 그녀도 그중 하나였다. 남도의 아름다운 언덕 마을에 있는 작은 카페 주인인 그녀는 놀랍게도 일흔이 넘은 나이였다. 그런데도 독특한 카페 분위기 때문인지 어색하기는커녕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녀는 휘핑크림 대신 산양유를 넣은 아이스크림을 직접 만들고, 커피콩을 기계가 아닌 무쇠 절구에 으깨듯 빻았다. 그리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예쁜 그림을 곁들인 엽서를 썼다.

 

길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젊어 한때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는데 그때의 제자들과 사십 년 넘게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했다. 제자들은 원주, 서귀포, 목포, 청주 등 전국 각지에서 그녀에게 역시 엽서를 보내왔다. 메일과 휴대 전화 문자 메시지가 일상이 된 세상에서 손 편지는 그 자체로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엽서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 내용이 공개되는 형식이어서 나도 그녀의 제자들이 보내온 엽서를 읽을 수 있었다. 카페 벽에 가득했으니까. 제자들도 그 사실을 잘 아는 듯 어떤 제자의 엽서에는 “우리 선생님 카페에 자주자주 들러 주세요. 산양유 아이스크림 짱!”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여러 번 제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을 받는지는 제자들로부터 온 엽서의 내용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떡볶이집에 가서 떡볶이 돈가스를 주문하려 했는데 떡볶이집이라 떡볶이라는 말을 빼고 주문했더니 떡볶이 없는 그냥 돈가스가 나왔더라는 내용 같은 거였다. 

 

떡볶이집이라서 돈가스 시키면 당연히 떡볶이 돈가스가 나오는 줄 알았다고 울상을 지었더니 떡볶이집 주인 청년이 지체 없이 떡볶이 일 인분을 공짜로 턱 하니 내주더라고.

 

어쩌다 한 번 쓰거나 일 년에 두어 번 보내는 편지라면 이런 내용으로 채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식이라는 것은 뜸할수록 화급하거나 심각한 것일 테니까.

 

이런 내용도 있었다. 콧방울 얘기였다. 콧방울이란 코의 끝부분에 양쪽으로 불쑥 내민 부분을 이르는 말인데, 그걸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편지를 보낸 제자는 뒤늦게 안 모양이었다. 

 

거울 앞에서 자기도 콧방울에 힘을 주어 움직여 봤더니 정말 콧구멍이 벌름거렸다며 신기해 죽겠다는 듯 편지를 써 보낸 것이었다. “선생님도 그게 돼요? 그게 되나요?” 하며.

 

그걸 여태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는 게 나로서는 더 신기했지만 그 엽서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려 보았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밝히지는 않겠지만 재밌고 무구해 보이는 그 제자의 이름은 요즘 아이들 예쁜 이름 순위에도 오를 만한 것이었다.

 

나는 그 제자의 이름에 깃든 사연을 그녀에게서 들었다.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그녀였던 것이다. 지어 주었다기보다는 바꿔 주었다고 해야 맞을까. 제자의 예쁜 이름은 원래 제자의 딸 이름이었노라고.

 

딸은 그럼 엄마의 이름을 갖게 된 거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오래된 일이라며 선선하게 말했다. 딸은 세상을 떠났다고.

 

딸을 잃은 고통으로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제자에게 그녀는 오랫동안 설득의 편지를 보내다가 이름을 딸의 이름으로 바꾸고 딸의 못다 한 생을 살라고 권했다고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화를 내고 한동안 편지를 끊었던 제자는 몇 년 전부터 다시 엽서를 보내오기 시작했다고. 물론 예쁜 딸의 이름으로. 그리고 지금은 저렇게 시답잖은 콧방울 얘기까지 하게 된 거라며 그녀는 웃었다.

 

산양유 아이스크림 카페에 일흔이 넘은 주인이 잘 어울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번지수까지 알 수 있으니 늦었지만 그녀에게 손 편지를 써 볼까. 카페 담장 안에 서 있던 키 큰 귀룽나무도 흰 꽃을 피웠겠지.

 

 

구효서 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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