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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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오늘의 만남] 별명 하나

 

은행 일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이레 아버지를 만났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찻집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잘 자랐지요?” 이레 아버지는 자랑스럽게 아이들 안부를 알려 주었다. “우리 이레는 화가가 되었십니더.” 

 

이레는 오래전 내가 산골 초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담임을 맡은 아이다. 학원도 없는 산골이라 그림 수업이라곤 담임의 가르침이 전부였다. 새 학기가 시작된 주, 교실에 진열할 작품을 한 점씩 가져오기로 했다. 이레는 찰흙으로 빈 병을 꾸며 제출했다. 꽤 그럴듯해 보였다. 

 

“야, 멋있다. 이레는 화가로구나.” 그날 이후 이레는 아이들 사이에서 ‘화가’로 불렸다.

 

한 달 뒤, 군청에서 ‘벚꽃 그리기 대회 참가 요청’ 공문이 왔다. 아이들은 입을 모아 이레를 추천했다. 용기백배해진 이레는 기꺼이 나가겠다고 했다. 나는 수업을 제쳐 두고 수채화 그리기 특강을 했다. 칠판을 도화지 삼아 색분필로 그림을 그려 보였다. 

 

“나무에 물감을 칠할 때는 페인트칠하듯 하지 말고 이렇게 점을 찍듯이 해 주세요. 그러면 사이사이로 하늘도 보이겠지요.” 아이들은 내가 미술에 문외한이라는 것도 모른 채 박수를 쳤다. 이레는 커다란 합판을 메고 당당하게 대회장으로 떠났다.

 

그날 저녁, 나는 아내에게 민망할 정도로 면박을 받았다. 읍내 중심 초등학교에 근무하는 아내가 알려 준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아내는 대회에서 아이 삼십 명을 인솔했다. 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동안 동료 교사들과 정자 쪽으로 올라갔다. 

 

그때 바위 뒤에서 혼자 그림 그리는 아이를 발견했다. 도화지에 점을 수백 개 찍고 있었는데 도무지 그림이라고 할 수 없어 보였다. 담임이 누군지 물어보니 내 이름이 튀어나왔다고. 부끄러워 꽁무니를 뺐다는 아내는 이후로 종종 그 사건을 들추어 나를 놀렸다.

 

이레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이레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바꾸어 주었다. 이레는 개인전도 성공적으로 몇 번 열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 추억과 아름다운 고향이 자기 그림의 밑바탕이 됐다고. 

 

어떻게 화가가 되었는지 궁금하다는 내 말에 이레가 답했다. “선생님이 저를 화가라고 불러 주신 덕분이지요.” 나는 아내에게 자랑하고 싶어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임채인 님 | 전 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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