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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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햇살 마루] 상 이야기

내가 여덟 살이던 때,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기도 전의 일이다. 난생처음 학교에서 열린 사생 대회에 참가했다. 내 기억 속 첫 ‘컴페티션(경연)’의 날. 주제는 내가 읽은 동화 속 한 장면 그리기였다.

 

그날 내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옆자리 친구의 그림은 지금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생생히 기억난다. 그 친구는 외국에서 살다 왔고, 이름도 ‘새라’인 데다가,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 학년짜리가 구사했다고 보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신선한 기법을 써서 나를 단번에 매료시켰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위에 수채화 물감을 덧칠하면 물감이 크레파스가 칠해진 부분만 근사하게 비껴간다는 사실을, 나는 새라의 그림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날 저녁, 나는 목욕을 마친 뒤 엄마에게 새라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했다. 알록달록한 양탄자 위에 풍성한 파마머리의 공주님이 앉아 있고, 커다란 부리를 가진 새 수십 마리가 양탄자의 가장자리를 물고 힘차게 날갯짓하고 있는 그림에 대해서.

 

양탄자는 하늘을 날고 있었고, 공주님의 머리카락은 양탄자가 날아가는 방향과 반대로 휘날리고 있었으며, 배경에는 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고. 하얀색 크레파스로 그린 구름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옅은 하늘색 물감 위에서 도드라졌고, 꼭 진짜 구름 같았다고.

 

나는 그렇게 멋진 그림을 그린 새라가 꼭 상을 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엄마가 내 그림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어떤 그림을 그려 냈는지, 상을 받을 것 같은지. 나는 내 그림이 형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내 건 그냥 그렇다고. 상을 못 탈 것 같고, 안 타도 상관없다고.

 

그해 학부모 백일장 문집에 엄마의 글이 실렸다. 활자화된 엄마의 글을 읽는 건 처음이었는데, 나는 첫 문단을 읽자마자 깜짝 놀랐다. 내가 사생 대회 후 새라의 그림 이야기를 했던 일이 고스란히 적혀 있던 것이다.

 

순간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당시 나는 목욕하고 난 직후였고, 완전히 발가벗은 채로 그 이야기를 했다. 내가 팬티도 입지 않고 한 이야기가 온 동네로 배포되는 책에 실렸다는 사실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 이야기를,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을 나한테 허락도 없이, 심지어 나를 알 법한 사람들이 보게 하는 게 그 어린 마음에도 어쩐지 부당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그런 마음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어느 날, 딸이 사생 대회를 하고 와서 종알거렸다는 이야기. 대회가 있다고 집에서 스케치북이며 크레파스 등등을 챙겨 갈 때에는 분명 자기도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고 상을 타고 싶었을 텐데, 정작 다녀와서는 온통 친구의 그림에 대한 칭찬이었다는. 

 

자신은 상을 안 타도 상관없으니 그 친구가 꼭 상을 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딸의 눈이 얼마나 반짝였는지,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자기보다 잘난 친구를 대하는 마음이 질투가 아닌 게 얼마나 기특했는지.

 

그 글에는 내가 팬티도 입고 있지 않았다는 내용 같은 건 없었고, 내 그림은 그냥 그랬다는 나의 쭈그리 같은 멘트도 쏙 빠져 있었다. 글 속의 나는 실제의 나보다 조금 더 사려 깊었고 조금 더 근사했다.

 

나는 그 글의 주인공이 새라가 아닌 나라는 사실이 무척 신기하고 또 기뻤다. 그리고 그냥 지나갈 뻔했던 삶의 한 장면이 언어를 입고 종이에 인쇄되어 글이 될 수 있으며 그걸 읽는 일이 아주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나도 이런 글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 대회에서 새라는 최우수상을 탔고, 나는 아무 상도 타지 못했다. 엄마는 학부모 백일장에서 딸의 이야기로 장려상을 탔다. 그로부터 이십오 년 뒤, 나는 창비 신인 문학상을 타면서 소설가로 데뷔했다.

 

장류진 님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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