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생각

장바구니0

이달의 좋은생각

[특집] 파랑 머리

서른한 살이 된 해를 기억한다. 나는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일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내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무기력했고, 실체 모를 어떤 것을 무작정 그리워했다. 서른이 될 때는 별생각 없더니 그제야 방황이 찾아온 걸까.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몇 년 후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잘 살고 있나, 뭘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따위의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많은 게 ‘문득’에서 시작되는 듯하다. 그즈음 문득 파란색 머리가 마음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스무 살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봤을 때 케이트 윈슬렛의 파랑 머리를 보고 약간 충격받았다. 처음 보는 머리색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염색할 생각을 했지?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 여운은 꽤나 컸던지, 이후 종종 끄적인 그림 속의 나는 파랑 머리였다.

 

내키는 대로 살고 싶은 한편, ‘나이가 들면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이 들기도 한다. 어차피 모든 걸 충족하기는 힘들다. 그렇기에 현재를 우선 생각하며 살아야겠지. 일상은 출퇴근이라는 틀에 고정되어 있으니 그 위에 다양한 고명을 올려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를테면 파랑 머리 같은…….

 

이틀 후 미용실로 갔다. 내 생애 첫 염색이었다. 서른한 살에 염색으로 일탈을 하다니. ‘기왕 할 거 제대로 하자.’ 싶었다.“ 무슨 색으로 해 드릴까요?”“ 전체는 보라색, 중간중간에 파란색 넣어 주세요.”

 

염색은 생각 이상으로 길고, 힘들고, 지루했다. 탈색을 두어 번 하고 나니 금발이 되었다. 염색약을 바르고 기다리기를 몇 시간. 영롱한 파란빛 머리와 지독한 몸살을 얻었다.

 

막상 하고 나니 회사에 갈 일이 조금 걱정되었지만 거울 속 내 모습은 꽤 괜찮아 보였다. 괜히 부끄러워 모자를 쓰고 집에 와서는 혼자 머리를 흔들며 춤을 췄던 것 같기도 하다. 남들 눈에는 전혀 춤처럼 보이지 않았겠지만.

 

신기할 만큼 내 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비록 그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앞으로 다시는 염색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으나.

 

그날 이후 유독 밝아 보인다는 말, 예전보다 좋아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머리 색깔 외에는 전혀 달라진 게 없는데 어떻게 전보다 더 행복한 걸까? 야근 후 저녁을 먹다가 호주행 비행기표를 사기도 하고, 일을 더 열심히 했고, 더 잘 쉬게 되었다.

 

반년 뒤 발리에서 만난 지금의 남자 친구는 훗날 추억했다. 오묘한 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고. 돌이켜 보면 나는 이것이 단순히 머리색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것을 한 작은 용기가 내 생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믿는다. 어떤 시도에는 일상을 꽤 많이 바꾸는 힘이 있다.

 

이정은 님 | 싱가포르에서

 

 

 

 


고객문의

  • 정기구독02 - 337 - 0332
  • 다량문의02 - 330 - 03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