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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좋은생각

[특집]결혼 선물

하필이면 결혼식 날 아침부터 소낙비가 내렸다. 친구들로부터 쉴 새 없이 전화가 걸려 왔다. 결혼식에 늦는다는 전화부터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온다는 연락까지. 그 와중에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못 올 것 같다던 단짝 진숙이가 식장 근처라고 연락한 것이다.

 

전남 고흥에서 서울까지는 기차를 타도 다섯 시간이 넘게 걸렸다. 예식 시간에 맞추기 위해 새벽 첫차를 탔을 터다. 진숙이의 헤실헤실한 웃음을 떠올리니 옛일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초등학교 육 학년 때의 일이다. 같은 반 친구 생일 파티에 갔다가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친구와 말싸움이 났다. 생일을 맞은 친구를 비롯해 대여섯 명이 그 아이 편을 드는 바람에 나는 졸지에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분하고 창피한 마음에 먼저 가 보겠다며 뛰쳐나왔다. 생일 파티를 시작하기 전이어서 배는 고픈 데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그때 어렴풋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진숙이였다. 왜 나왔냐고 묻자 진숙이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네 잘못도 아닌데 애들이 너한테만 뭐라고 하잖아! 그리고 여럿이 한 명한테 그러는 건 잘못된 거야.

 

아이들 눈치 싸움에 아무 계산 없이 순수하게 손을 내밀어 준 진숙이가 고마웠다. 진숙이 손에도 우산은 없었다. 우리는 기왕 젖은 김에 버스를 타는 대신 집까지 걸어 가기로 했다. 빗물 머금은 들판을 지나 축축해진 언덕을 넘었다. 어쩐 일인지 마음만큼은 뽀송뽀송했다. 비 오는 날 함께 걸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됐다.

 

그날 이후 진숙이와 나는 단짝이 되었다.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 걸었다. 나는 서울에서 대학 생활을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진숙이는 인근 소도시에 있는 회사에 취업했다. 처음으로 떨어져서 각자의 길을 걸었다. 우리는 한 달에 두어 번 시간을 내서 만났다.

 

내가 취업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진숙이는 전남 고흥으로 시집을 갔다. 농사짓는 남편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고 했다. 나는 진숙이를 위해 몇 달 동안 모은 적금을 깨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보내 주었다. 진숙이는 아이 셋을 낳고, 나는 계속 서울에서 직장 생활 하느라 얼굴 보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거리도 워낙 멀거니와 아이들까지 있으니 전처럼 보고 싶을 때 바로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전화 통화로 서로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를 꺼내 놓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사는 방식도, 관심사도 다르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진숙이가 그 언젠가처럼 배시시 웃으며 신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해 줄 게 이것밖에 없어, 미안해.라면서 종이 가방을 수줍게 건넸다. 직접 농사지어 짜낸 들기름 두 병이었다. 삶에 쫓겨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도 친구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으로 내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네가 와 준 것보다 더 좋은 결혼 선물이 어디 있다고.” 우리는 오랜만에 한자리에 섰다. 친구라고 늘 같은 방향으로 걸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끔씩 오늘처럼 비 오는 날 만나 잠시라도 함께 한곳을 바라보면 되지 않을까. 신부 대기실에 고소한 들기름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김경진 님 | 경기도 동두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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